2021. 7. 2. 21:36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10장. 스승과 제자의 관계
-- 머리말 --
질문자: 어떻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처음 일어났습니까?
라메쉬: 조직화된 모든 종교도 처음에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되는 그 무엇이, 모든 것이 생겨나온 그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떤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영원하고 보편적인 철학을 바탕으로 삼았지요. 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이 근원적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서 근원적 진리를 개념화하고 해석하고 자기 생각을 내세우면서 엄청난 틈이 생겼습니다. 사람과 신 사이에 틈이 생겼지요. 이런 틈이 생겨난 까닭은 근원적 진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개인과 신을 모두 개념화하고 개체로서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신을 가장 높은 개체, 신성한 개체로서 일종의 영적인 계급을 붙이지만 신성하고 가장 높음에도 여전히 개체에 불과한데, 기도하고 숭배하는 모든 사람이 개인으로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언급해야만 하는 개체에 불과하지요. 이렇게 사람과 신이 분리될 때, 여기서 생긴 틈은 메꾸어져야만 합니다. 이런 틈은 자신이 신과 사람 사이에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매개자들이 메꾸었고 이런 매개자가 중재하지 않으면 개인은 신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개념이 조장되었습니다. 근원적 진리에 대한 해석이 다양해지면서 결국에는 종파들이 생겨났고 거기서 다시 세분되었는데, 각 종파에는 구루가 되는 종교 우두머리가 있었습니다. 이런 종교 우두머리는 그 집단 구성원들 위에 굴림하면서 엄청난 힘을 가지는데, 이 힘은 법이 갖는 힘보다 휠씬 더 큰 영역에 미쳤습니다. 법은 오직 세속의 일에만 적용되지만, 종교 우두머리가 잡은 권력의 힘은 이 세상 너머에까지 미쳤습니다. 그리하여 종교라는 이름 아래 불공평하고 잘못된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왜 때때로 우리는 그런 끔찍한 거짓 영혼들이 일어나서 종교적 대참사를 일으키는 일을 보게 되는가?"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윌리엄 로(William Law)가 여기에 답을 주는데, "이 사람들은 먼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서 신을 향했다."라고 말하면서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종파에서 초인적이고 심지어 초자연적인 힘들을 약속하고 사람들은 이런 것들에 현혹됩니다. 그리고 육체적 또는 정신적 규율을 굳은 의지로 수행해야지만 결과물을 얻을 수 있듯이 이런 초자연적 힘들도 확고한 의지를 갖추고 특정한 규율들을 수행하면 정말 얻을 수 있다고 말해야 했겠죠.
인도에서 싯디라고 부르는 이런 초자연적 힘들이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왜? 무엇이 찾는 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인가?"죠. 제가 1987년 로스엔젤레스에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자신은 물 위를 걸을 수 있기를 원하고 이 목적을 이루려고 하타 요가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묻더군요. 전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했습니다. "그런 종류의 힘은 제가 줄 수 없을 것 같군요. 저조차도 그런 힘이 없어요. 누가 그런 힘을 제게 준다고 해도 달갑지 않아요. '사양하겠습니다. 전 차라리 배 타는 것이 더 좋습니다.'라고 말할 겁니다."
질문자: 진정한 구루는 어떤 식으로 이 영적 그림에 등장하나요?
라메쉬: 진정한 구루가 등장하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유사 이래 어떤 사람에게 근본적이고 초월적인 시각을 가져다 주는 직관적인 통찰을 일으키는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왔습니다. 이런 통찰이 있으면서 현실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것으로 변하고 이전에 현실로 여겼던 것이 현실로 보이지 않고 전혀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 현실로 체험되지요.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할 점은 이렇게 극히 드문 경우의 이런 소수의 사람들은 이렇게 일어난 일이 자신의 노력 때문에 일어난 일이 결코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일이며 하늘 또는 참전체성이 주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중 몇몇은 이런 엄청난 비밀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어하는 의향이 강해집니다. 하지만 이들은 곧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역의 종교 우두머리들과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심지어 그 땅의 법과도 충돌을 빚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생활해가는데,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아무도 정말 모릅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느낄 수도 있지요. 무언가가 그 사람을 예전보다 좀 더 친절하고 좀 더 호의적이게 만든 거죠. 이 변화는 현상세계의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내적인 것인데, 관점의 변화지요. 예전에는 현실로 보였던 것들이, 감각들로 명백하게 인지할 수 있었던 그런 일과 현상들이 더는 현실로 보이지 않습니다. 나타나지 않고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비 현시가 현실로 체험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보통 일상의 생활을 이어가지만, 이런 초월적 지식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이 불가사의한 사건과 상황들로 인해 자신들의 집을 찾아오는 것을 보고서 놀랍니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문을 열어 기꺼이 가르침을 나누어주지요. 이렇게 비로소 진정한 구루와 제자의 관계가 생깁니다. 이것은 가르침을 과시하는, 제가 표현한다면, 가르침을 "팔아넘기는" 이런 종류의 관계가 아니고, 이런 지식의 문턱에 있는 사람들이 어찌어찌하여 구루의 집으로 인도되었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는, 이례적으로 고요한 관계입니다. 이런 지식을 나누는 일은 아주 작고, 아주 고요한 범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도 깨닫게 된 제자는 자기 속의 실재가 스승 안에 있는 실재와 같다는 사실을 체험합니다. 어떤 차이점도 있을 수가 없죠. 제자들이 체험하는 실재는 스승이 이전에 본 실재와 같습니다. 이해가 일어났음에도 제자에게는 구루를 향한 엄청난 사랑이 있고 스승이 나누어 준 이 지식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이 있어, 많은 제자가 깨달음 이후에도 아름다운 시를 바치면서 자신의 구루께 존경을 표합니다. 구루를 향한 이런 종류의 사랑은 동양인 제자들에게는 아주 당연합니다. 하지만 제가 서양 세계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이런 종류의 사랑이 아마도 서양에는 없는 어떤 관대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7년도에 제가 서방세계에 도착해서 대담을 시작한 지 몇 주되지 않았을 때 누가 "이거 선생님 겁니다."라고 말하면서 닫힌 편지봉투를 제게 건넸을 때 아주 놀랐는데, 꽤 당황했다고 해야겠죠. 나중에, 제가 열어봤더니, 아주 짧은 시 한 편이 담겨있었고, 그 시에 상당히 감동했습니다. (*책의 편집자 웨인 리쿼만이 건넨 시이며, 편집자 글에 내용이 나와있다. - 옮긴이) 그 시는 절대 있지 못할 겁니다. 그 시는 구루를 향한 엄청난 사랑을 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저 자신을 구루라고 생각한 적이 전혀 없었기에 더 당황했죠. 헨리 데니슨이 저를 미국으로 초대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죠. 그 후에 한 미국인이 편지를 제게 주게 됐는데, 편지 내용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아내가 있고, 두 아이의 아빠이고 어느 정도 돈도 잘 버는 사업을 하는 다 큰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몇 주전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한 남자를 향한 이 엄청나고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이해 못 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엄청난 사랑과 연민이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저는 심지어 느낌이 좀 과장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경우는 아닌 걸로 판명 났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루는 제가 막 설명했듯이 그렇게 나타납니다. 어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가사의하게 자기 자신의 구루에게로 인도될 때 보면, 이 사람들은 아마 탁월한 박티일 수도 있고 지식의 성향을 좀더 가지는 사람일 수 있고, 아니면 오히려 이 둘이 함께 있는 사람일 겁니다. 진정한 구루와 진정한 제자는 일어나는 비개인적 일의 일부이고 현상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자연 발생적인 일의 일부이며 참전체성 기능의 일부입니다. 구루의 은총은 영적 가르침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나타내 보입니다. 산스크리트 말로는 우파데샤입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자주 오해해왔습니다. 우파데샤는 제자의 눈을 응시하거나, 속삭이거나, 또는 다른 모든 종류의 방식을 포함해서 다양한 형태로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진정한 우파데샤라는 단어의 의미는 진정한 본성으로의 회복 또는 진정한 본성으로 회복되어 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파데샤는 주체와 객체로, 나와 다른 사람들로 분리해온 개인의 분리된 마음을 치유해서 순수한 존재라는 최초의 상태가 되는, 원래의 완전함과 신성함으로 회복하게 도와줍니다.
질문자: 어떻게 진정한 구루인지 알 수 있지요?
라메쉬: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명백하고 구체적이며 강한 어조로 답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열성적인 찾는 이에게 이것저것 하라며 지시하는 사람은 진정한 스승이 아닙니다. 찾는 이는 이미 기존에 하는 활동 때문에 괴롭기에 평화와 휴식, 고요함을 찾습니다. 찾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활동을 멈추는 일입니다. 스승이 찾는 이에게 뭔가를 더 하라고 하거나 하고 있는 행동 대신에 뭔가를 하라고 해도 이것은 찾는 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활동은 마음 속에 형상을 만드는, 즉 개념화를 뜻합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하는 활동은 에고를 강화시키면서 자신에게 내재하는 행복의 상태인, 삿칫아난다를 파괴하는 것을 뜻합니다. 선생 또는 조언자가 활동을 하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스승이 아니라 파괴자입니다. 이런 상황은, 창조자, 브라마가, 아니면 죽음, 야마가 스승으로 위장해서 나타났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진정한 스승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갈망하는 자를 해방시키지 못 합니다. 오직 자신을 속박하는 족쇄를 더 강하게 만들 뿐입니다."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죠. 하지만 이런 강한 어조의 말씀은 라마나 마하리쉬 자신의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강한 어조의 말씀은 오직 찾는 이를 향한 자비에서 비롯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진정으로 누구에 의한 행위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단지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고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변화고 마음이 방향을 바꾸는 것일 뿐입니다.
질문자: 하지만 가짜 구루들과 그들에게 영향받은 수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할 방법은 없나요?
라메쉬: 정말 수 많은 사람이 그들을 찾아가는 것이 사실이고 이런 상황 자체가 참전체성, 즉 '있는 그대로' 비개인적 작용의 일부지요. 그들을 구제할 방법을 묻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참의식이 나타내 보이는 현상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인에서 성자로,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제자에서 궁극적 깨우침을 얻는 제자로 나아가는 진화가 진행 중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이런 비개인적 진화일 뿐이고 궁극적 깨달음은 결코 개인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와 시각의 변화이고 동일시된 의식이 자신의 비개인성으로 변하는 일입니다. 어떤 깨달음이든지 거기에 도달하는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해가 밝아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일을 계속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일어나게 놔두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일반적인" 충고에 반대되는 것을 알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 다르샨, 스승과의 만남 --
질문자: 제가 한번은 선생님이 계시는 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선생님의 모든 것이 제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웃으셨죠. 선생님과 시간을 아무리 더 보낸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맞나요?
라메쉬: 그래서 제가 웃었죠. 저를 몇 년 동안 계속 껴안고 있다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전달되는 깨달음이란 있을 수가 없지요.
질문자: 하지만, 그냥 선생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
라메쉬: 구루와 가까이 있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될만한 변화를 일으킨다고들 하죠.
질문자: 어떻게요?
라메쉬: 모르죠.
질문자: 탄트라 선생들은 에너지가 전달된다는 샥티(shakti, 신성한 힘 - 옮긴이)에 관해서 말하는데요. 즈나니와 함께 있으면 무엇이든지 전달되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게 전달되는 일이 어떤 특정한 순간에 일어나기로 되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일어나겠지요. 기본적으로 궁극적인 사실은 다른 것에서 전달되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내"가 있는 한,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정도입니다.(30jung)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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