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53)

2021. 6. 25. 22:42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수행과 기술들 -- 

 

질문자: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나태해 진다는 말을 늘 들어와서 수행을 포기하는 것이 두렵습니다. 

 

라메쉬: 이렇게 두려운 것은, 보통은 오랜 시간 앉아서 명상하지 않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나거나 열 단계 뒤로 후퇴할 거라는 말을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이런 두려움이 일어날 때는, 단순히 두려움이 목격기만 해도 그냥 사라질 겁니다. 영원히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지만, 매번 두려움이 일어날 때 마다 그냥 목격되면, "뭔가를 해야 하는데, 안 그러면 이런 얽매임이 계속될 거야."와 같은 얽매임이 없이 두려움은 잘려나갈 겁니다. 두려움은, 일어나면서 목격되면, 수직으로 잘려나가게 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기는 수평적 얽매임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 비파사나 명상을 가르치는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누가 그 여 선생에게 물었답니다. "마음을 어디다 두고 계셨어요?!" (웃음) 

 

질문자: 몸-마음을 좀 더 수용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지 않을까요? 명상이나, 프라나야마 호흡법, 특정한 식습관, 또는 무엇이든지 좀 더 열린 마음이 되게 만들어 주는 것들 말이죠. 

 

라메쉬: 있지요. 하지만, 그것 조차도 당신 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명상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고서 명상 수련을 하는 것이 자신이 하는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일어나는 그 명상은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 몸-마음 유기체는 그런 행동이 일어나도록 창조된 것이죠. 당신은 오직 자신에게 허락된 것만 할 수 있을 거라는, 이 가장 기본적인 요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질문자: 확실히 시도는 해볼 수는 있잖아요. 

 

라메쉬: 아, 그럼요. 시도할 수 있는데, 신 또는 참전체성 또는 당신이 뭐라고 부르던지 간에, 그것이 당신에게 시도하도록 허락하면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 마하라지께서는 '나는'(내가 있다)에 집중하는 것을 말씀하셨죠. 전 그렇게 하면 곧 바로 객체가 되어버립니다. 

 

라메쉬: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것은 "내"가 "내가 개인적으로 노력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어날 거라면, 일어나겠지."라는 깨우침이 있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깨우침이 항복이죠. 

 

질문자: 선생님의 모든 말씀을 들으면 동의 할 수 밖에 없지만, 언제나 어떻게 하면 여기서 거기로 갈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은총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짐작은 합니다. 저는 17년이라는 세월을 이런저런 영적 수행을 하면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뭔가를 하고 그 뭔가를 하면 우주 참의식에 도달할 거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을 모셨죠. 그런 후에 기본적으로 이미 그 상태에 있으며 그것은 은총에 의해서만 일어나고 자신을 영적 스승에게 집중하고 헌신하는 공덕에 의해서만 그것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신 또 다른 한 스승과 수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후로 수많은 헌신 수행과 종교 의식, 명상, 식습관 등등 여러 가지를 했습니다. 이런 해야했던 수많은 것들은 여기서 거기로 가려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전 이 모든 것을 17년간이나 했고, 이제는 여기 있군요. (웃음) 

 

라메쉬: 그럼요. 다른 곳에 간 게 아니죠. (웃음) 보시면, 요점은 관점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는 거죠. 당신은 찾는 이로서 자신이 뭔가를 찾고 있다는 측면에서 생각해왔습니다. 제가 묻는 말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 누구입니까?" 

 

질문자: 선생님께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깨닫게 되는 개인이란 없고 깨달음은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나서도 저는 여전히 똑같은 지점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 전 뭘 해야 합니까? 거기로 가려면 뭘 해야 합니까? (웃음) 

 

라메쉬: 아주 맞는 질문입니다. 답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답은, 당신은 해왔던 것을 계속하라는 겁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질문자: 제가 해왔던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메쉬: 뭘 하든지 당신이 지금 하는 것이요! 

 

질문자: 하지만 전 더는 그것들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웃음)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그것들이 제게 쓸모 없다는 생각에, 이제 한계에 다 달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시작하면서 제가 원하던 것을 가져다 주는 것 같지 않군요. 

 

라메쉬: 좋아요. 그럼 하지 마세요! 

 

질문자: 절망에 빠지는군요. 

 

라메쉬: 아니죠! 여기에 핵심이 있어요. 절망에서 벗어났던 것이 아니죠.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거죠. 기본적으로 당신은 계속해서 '신의 의지인가? 나의 의지 인가?'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옵니다. 17년간 뭔가를 하고 변하려고 노력한 것은 자신의 의지를 따랐던 겁니다. '신의 의지'에 기회를 줘 보세요. '신의 의지'에 조금만이라도 기회를 줘보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세요. 놀랄 겁니다.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말씀하시는 참전체성을 느끼게 해주는 수행이 선생님의 가르침 중에 있나요? 

 

라메쉬: 보시면, 이것이 바로 문제의 핵심입니다. "내"가 "나"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 반대의 경우라면, 가능하죠! 자, 그 일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당신이 일어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제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이런 까닭에 책 '아이 앰 댓'을 보면 모순되는 점들이 많이 보이죠. 마하라지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네는 명상을 해야 하네."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자네 문제는 모두 명상하는 데서 오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상이 초기에는 순화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은 명상 수련을 하는 그 개인이, 그 명상가가 그 수행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작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누가 명상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은 하루에 명상을 14시간 한다고 털어놓더군요. 하루에 명상을 14시간이나 한답니다! 그래서 마하라지 말씀의 요점은 명상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명상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질문자: 저는 명상을 해도 될까요? 

 

라메쉬: 명상을 얼마간 해왔습니까? 

 

질문자: 모르겠습니다. 

 

라메쉬: 그 질문에 대한 진정한 답은, 명상이 떨어져 나갈 필요가 있으면 떨어져 나갈 거라는 겁니다. 개념적으로 영적 도표를 생각해보면, 개인을 나타내는 한 점이 명상이 요구되는 한 특정한 지점에 놓이게 되면 명상이 일어날 겁니다. 명상 자체를 목적으로 잘못 오인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계속될 겁니다. 그리고 만일 미래에 이 점이 지워지고 또 다른 점이 만들어질 때가 된다면, 언젠가 이 점에서는 명상이 필요 없음을 알게 될 겁니다. 명상은 이전에 일어났죠. 그래서, 어떤 특정한 시간에 뭐가 일어나든지 간에,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렸는지, 진전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 지와 같은 의문은 전혀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을 하지 않을 재간이 없지요. 바로 지금 여기서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지 않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경청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입니다. 

 

질문자: 엄청난 역설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닌가요? 

 

라메쉬: 물론 그렇죠. 

 

-- 이해를 "붙들고" 있기 -- 

 

질문자: 마음이 기능이나 현실의 문제에 신경쓴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축복을 잃어버리는, 즉 아난다(ananda. 지복, 즉 더없이 완벽한 행복을 이르는 산스크리트어다. 삿-칫-아난다, sat-chitananda, 라는 궁극의 본질을 이루는 세가지 요소중 하나다.- 옮긴이)를 잃어버리는 일이 아닙니까? 

 

라메쉬: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존재함"이 행위도 포함한다는 사실이지요. 그래서 뭔가를 하고 있을 때, 자신이 존재함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자주 불평합니다. 평상시 하는 것을 모두 멈추고 "존재함"에 있을 수 있기를 바라지요. 완전히 오해죠! 행위에 완전히 몰두할 때가 바로 존재함에 있는 거죠! 여기에 존재함이 있는 까닭은 간단한데, 그때는 마음이 관념을 만들어 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관념을 만들어내지 않을 때 행위에 정신을 온전히 쏟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으면 행위에 완전히 집중하게 됩니다. 마음이 부재하죠. 그렇기에 그런 행위가 존재입니다. 

 

질문자: 그럼, 정말 문제는 단지 "내가 뭔가를 빠뜨리고 있다."는 생각뿐이군요. 

 

라메쉬: 정확해요! 정확히 그렇습니다. 

 

질문자: 그 생각은 전혀 사실이 아니죠. 

 

라메쉬: 보시면, "지금 하는 것이 싫어. 뭔가 다른 게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죠. 그래서 '있는 그대로'를 바꾸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그 마음이고, 바로 그 문제죠. 

 

질문자: 지금처럼, 우리가 다 함께 모여서 집중할 때는 참의식에 대한 선생님의 말씀과 우리가 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아주 명백해 보이는데요. 하지만 내일 아침 다시 이렇게 이해하려면 쉽지가 않을 겁니다. 저희가 어떻게 할지 말씀해주세요? 

 

라메쉬: 보시면, 마음이 말하죠. "대단한 순간들이었지. 그런 순간들이 더 있었으면 좋겠군."하고. 마음은 붙잡고 싶어하고 들었던 것에 매달리고 싶어하지요. 저를 보려고 사람들이 뭄바이에 와서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누고 떠납니다. 가기 전에 때때로 이렇게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해주실 말씀이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있어요. 여기서 들은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질문자: 그럼 매일 새롭게 시작하는군요? 

 

라메쉬: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무엇을 들었든지 간에 가만히 놔두면, 그것이 더 깊어지게되는 기회가 생기죠. 하지만 마음이 그것을 붙들면, 붙잡은 것을 놓치게 되죠. 아시겠습니까? 

 

-- 옳고 그름 -- 

 

질문자: 주체 행동 의식과 책임 관념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어떤 원칙이 상황 속에서 옳고 적절한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나요? 

 

라메쉬: 생각하는 마음이 간섭하지 않으면, 일하는 마음이 하고 있는 일을 고려해서 옳은 일을 알아서 찾아 할 겁니다. 하지만 일하는 마음이 옳고 그름을 따질 때는 그때 하고 있는 일만을 고려할 겁니다. 일하는 마음은 개념적으로 옳고 그른지는 고려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도덕 관념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도덕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종류의 도덕률에 묶인 사람은 그렇게 도덕성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종종 놀라고 당혹해합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죠. 도덕 관념이 없는 사람들은 스스로 윤리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릇된 일을 하게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이런 사람들이 정말로 좋은 사람들이고 하는 일들이 대체로 옳고 사악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 놀랍니다. 

 

질문자: 한쌍의 상반된 것들을 말씀하시는군요. 

 

라메쉬: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질문자: 그래서, 그 사람들은 같은... 

 

라메쉬: 서로 연결되어 있죠. 이것이 요점입니다. 

 

질문자: 그 말씀을 들으니 심리학에서 실수는 언제나 배움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까닭을 알겠군요. 우리가 정말 잘 못하고 있다면, 잘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죠. 

 

라메쉬: 옳은 말입니다. 그리고 종종 이런 사실은 의식적으로가 아니라 잠재의식적으로 알아차립니다. 자, 제가 옳고 그름에 관해서 한 도교의 현자가 말한 구절을 읽어드리죠. 이 현자는 대단한 도덕 군자였던 공자가 가르치는 도덕을 꾸짖습니다. 현자가 말합니다. "선함과 아름다움에 관한 이 모든 말은 끊임없이 콕콕 찌르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불안하고 초조하게 한다. 하늘과 땅이 자신의 영원한 흐름을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해와 달이 자신의 영원한 불빛을 어떻게 유지하는 지를, 별들은 어떻게 각자의 위치를 지키며 정렬을 유지하는지, 새들은 자신의 무리를, 나무와 우림은 자신의 서식지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성심껏 배워야 한다. 뭘 해야 할지 의식적으로 알고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냥 행할 뿐인데, 왜냐하면 이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내면의 힘이 자신의 앞길을 인도하도록 하고 자연이 정해놓은 길을 따라 가는 것을 또한 배워야 한다. 그리고 곧 더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외치면서 힘들게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백조는 흰색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일 목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말했듯이 정확히 이것이 서로 연결된 상반된 것들의 개념이나, 인간의 마음은 상반된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고 싶어하지요. 

 

질문자: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사람에 따라서 다 틀리고 또한 판단이 개입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라메쉬: 그렇죠. 정확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삶에서는, 사회와 법이 말하는 것을 모두 늘 따를 수는 없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죠. 실제로, 한 유기체가 그 당시 법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는 뭔가를 말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말은 했지요. 

 

-- 말을 쓰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들 -- 

 

질문자: 책 '아이 앰 댓'에서 보면, 마하라지께서는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당신은 고요해야 하고 참근원으로 돌아가서 '나는'(내가 있다)에 머물러야 한다."라고 늘 말씀하시는데요. 하지만 저는 여기서 어떤 것도 못하겠습니다. 

 

라메쉬: 못하죠. 제가 말했듯이, 저도 똑 같은 문제로 6개월 동안 거의 돌아버릴 것 같았죠! 여기서 정말 요점은 마하라지께서 당신이 할 수 없는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신다는 점이죠. 

 

질문자: 마하라지께서는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죠. 그리고 전 "글쎄, 전 이것 조차도 할 수 없으니, 완전히 꼬였군." 하고 생각하게 되죠. 

 

라메쉬: 그래서 그 때문에, 저는 마하라지께서는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만 했죠. 사람들은 그분에게 자주 "깨달음의, 아니면 적어도 깨달음의 과정이 시작되기 위해 필요한 사전 조건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마하라지는 "성실함"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다가 말씀 중에, "당신은 성실해야만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죠. 아시겠습니까?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면 성실해집니까?"라고 묻겠죠. 하지만 그분께서 정말로 뜻하신 바는, 과정은 오직 성실함이 있을 때만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말을 쓸 수밖에 없죠. 라마나 마하리쉬를 찾아 뵈었던 한 사람이 자신은 때때로 모든 것이 수동적으로 느껴지는 의식 상태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지만, 그에 대해 반응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그 사람은 마하라지께 "이 상태가 있기에 좋은 상태입니까? 아니면 마음이 자신을 기만하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하리쉬께서 "그것이 정확히 목표로 해야 할 마음의 상태 또는 의식의 상태입니다."라고 답하셨습니다. 자, 아시겠습니까? 마하리쉬께서는 "목표로 해야 할"이라는 말을 써야 하셨지만, '어떤 누군가가' 목표로 해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죠. 그리고 마하리쉬께서는 이렇게 덧붙이셨죠. "하지만 이 상태가 가끔씩만 일어나기 때문에 당신은 의심을 합니다. 그리고 의심했어요. 그러나 이 상태가 좀 더 자주 일어날 때는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말을 쓸 수밖에 없지만, 그런 말들로 인해서 여러 달 동안 고민에 빠질 수도 있지요. 제 경험상 확실합니다. 

 

질문자: 그래서 뭘 하시거나 안 하셨습니까? 

 

라메쉬: 그냥 마하라지께서 어떤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까지 고민 속에서 기다렸죠. 그러다가, "당연하지!"라고 했죠. 하지만 그런 고민은 이 유기체에 일어나야만 했죠. 마하라지께서 하신 말씀은 묘사하는 것이지, 처방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이해가 일어나야만 했죠. 

 

질문자: 추측하건대, 진정한 찾는 이라면 찾게 되겠죠. 모든 곳에서 이것을 찾게 되겠죠. 책을 알아보고 읽겠죠.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이런 찾음에 끌려 다니죠. 

 

라메쉬: 그 모두가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끌려 다닌다"는 표현은 꽤 정확한 표현이군요. (웃음) 정확하고 적절한 까닭은, 이것이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그럼, 저희는 그냥 맥주 한 잔 더 해야겠군요. (웃음) 

 

라메쉬: 그 보다 더 좋은 표현이 어디 있겠습니까! (웃음) 당신이 그 맥주를 못 마시게 되어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면서 맥주 한 잔을 못 얻을 겁니다. 

 

질문자: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에 관한 건데요. 제가 개인이라고 생각하는 한, 내 삶은 내가 만들어가고 내가 선택한다고 믿으면서 "마치 그런 것처럼" 이라는 개념이 약간 흐려집니다. 

 

라메쉬: 보시면, 따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당신은 뭘 합니까? 당신이 해왔던 것을 그대로 계속 해나갑니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겁니다. 어떤 변화가 필요하면, 말했듯이, 일어날 겁니다. 변화가 안 일어나면, 그 순간 참전체성이 기능하는데 변화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마치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계속 해나가고, 마치 자신의 삶을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것처럼" 계속 해나가면 됩니다

 

                              - 리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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