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스님의 경책(22)

2021. 6. 7. 22:54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ㅇ. 

조주스님이 행각할 때 임제스님을 찾아왔다.

그때 임제스님이 발을 씻고 있었는데 조주스님이 물었다.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이오?"

"마침 내가 발을 씻고 있는 중입니다."

조주스님이 앞으로 다가가서 귀를 기울여 듣는 시늉을 하자

임제스님이 말했다. 

"또다시 두번째 구정물을 퍼부어야 겠군요"

그러자 조주스님은 곧 내려가버렸다. 

 

.

정(定) 상좌(上座)가 임제스님을 뵙고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라고 물었다.

임제스님이 선상에서 내려와 그의 멱살을 움켜잡고

한대 후려 갈기며 밀쳐버렸다. 

정상좌가 멍하여 우두커니 서있으니 곁에 있던 스님이 말하였다. 

"정 상좌여! 왜 절을 올리지 않는가?"

정상좌가 절을 하려는 순간 홀연히 깨달았다. 


ㅇ.

마곡스님이 찾아와 좌구를 펴며 임제스님에게 물었다. 

"십이면 관세음보살은 어느 얼굴이 진짜 모습입니까?"

그러자 임제스님이 자리에서 내려와 한 손으로는 좌구를 거두고 

한 손으로는 마곡스님을 붙잡으며 

"십이면 관세음보살이 어디로 갔는가?" 하였다. 

마곡스님이 몸을 돌려 임제스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므로

임제스님이 주장자를 들어 후려쳤는데 마곡스님이 이를 받아 쥐니

서로 붙잡고 방장실로 들어갔다. 

 

ㅇ. 

임제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할'은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할'은 땅에 웅크리고 있는 금빛털 사자와 같으며,

어떤 '할'은 어부가 물고기를 꾀어 들이는 장대 같고 

어떤 '할'은 활로써의 작용을 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 스님이 머뭇거리자 임제스님이 "할" 하였다. 

[해설]

'금강왕 보검의 할'이란 표현에서 금강왕의 보검은 가장 단단하고 견고하여 다른 모든 것을 부술수 있는 한편,

다른 무엇에도 부서지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보검같은 할은 일체의 번뇌와 분별망집 등 어떤 것을 만나도 단칼에 날려 보내는 할이다. 

'금빛 사자의 할'이란 사자가 모든 짐승의 왕으로 그 울음소리만 들어도 모든 짐승이 놀라 자빠지듯이 그 고함소리에 부처나 보살, 온갖 유정이나 무정들이 혼비백산 한다는 것이다. 또 먹이를 사냥할 때 숨죽이고 움직이지 않고 웅크린 채 먹잇감을 노리고 있다가 사정권 안에 들어 오면 순식간에 달려들어 금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이, 학인의 병통으 ㄹ예리하게 관찰해 대처하여 깨달음으로 이끄는 할이다. 

'어부가 물고기를 꾀어들이는 장대같은 할'에서, 물새의 깃을 묶어 장대 끝에  꽂아서는 물속의 고기를 그물로 유인하는 도구를 말하는데, 물새의 깃은 영초(影草), 즉 풀로 그림자를 드리우는 역활을 한다. 이러한 할은 학인이 실지로 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그 허실을 염탐하고 서로의 역량을 시험하고 떠보는 할이다. 

'할로써 작용하지 않는 할'은,고함을 지르긴 하나 할로써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분명히 할을 해놓고도 할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할은 성품이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손에 잇으면 잡고, 입에 있으면 할을 하고 말도 한다. 또한 이 할은 앞의 세 가지 할을 모두 수용하지만, 어느 일정한 할로서 항상의 일할(一喝)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할은 근본에서는 다 같다. 모두 다 진여의 작용으로서의 '할'에 기반한다. 

금강왕보검의 할이 단지 번뇌무명을 끊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할이 아니다. 

번뇌무명을 끊기만 한다면 그것은 죽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번뇌 무명을 끊고, 끊은 그 자리가 진여로 드러날 때 만상을 비추는 지혜가 드러난다. 

금빛사자의 할이나 물고기를 꾀어들이는 장대같은 할도 마찬가지다. 

진여의 작용으로서 '할'이  네 가지 할의 뿌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흉내내는 할이 단숨에 발각되고 네 가지 할 중에 무엇을 쓰더라도 의미있는 할이 된다. 

 

                        - 관심 성윤갑 강설<자신과 마주하는 임제록>에서 발췌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