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46)

2021. 5. 7. 21:40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그냥 있으라 -- 

 

질문자: 마하라지께서 라메쉬 선생님께 "그냥 있으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라메쉬: 다시 한 번 말의 한계에 관한 문제인데, 그 말 때문에 전 6개월간 완전 지옥이었죠. "왜 마하라지께서 그냥 있으라고 말씀하시지? 난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럼 마하라지께서는 누구에게 그냥 있으라고 물으시는 거지?" 어느 날 아침 불현듯 선명해졌는데, 마하라지께서는 누구에게도 "그냥 있으라."라고 물으신 게 아니었어요. 존재 속에는 어떤 "누구"도 있을 수 없어요. 존재는 있는 모든 것입니다.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비개인적인 이해를 통해서 깨우쳐야 하는 것이었죠. 비개인적인 이해는 뭔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개인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이해입니다. 

 

질문자: 그럼 책 '아이 앰 댓'에서, 마하라지께서 "조용히 고요하라."라고 말씀하신 것도 말의 한계에 부딪힌 문제가 틀림없군요. 마하라지께서 우리 육체를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군요. 

 

라메쉬: 제가 좀 전에 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무엇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나"란 있지 않아요. 하지만 스승들이 수동태로만 계속해서 말할 수가 없지요. 수동태로 말하면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죠. 말은 그냥 나오고 싶은 대로 흘러나올 뿐입니다. 사람들이 종종 마하라지께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책 '아이 앰 댓'에서 나오는 내용 사이에 맞지 않는 점이나 모순되는 점들을 설명해달라고 묻곤했어요. 마하라지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지요. "보게, 책 '아이 앰 댓'은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모리스 프리드만이 썼지. 어긋나거나 모순되는 점들이 있을 수밖에 없지. 생각해보게, 그 책이 출판되기 전까지 여러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첫째로, '내가 아는', 내가 가진 그 지식은 직관적 확신인데, 사람들이 찾아와서 질문하니까 표현할 뿐이지. 나는 내 마라티어 어휘력만큼만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표현에 한계가 있고 더구나 내가 교육받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더 제한되겠지. 모리스가 마라티어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었으니까 내 말도 제한적으로 밖에 이해할 수가 없었겠지. 그러고 나서도 모리스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다시 영어로 써야 했네. 그리고 마지막 원고가 출판되기 전에 편집도 해야 하고. 그러니 '내가 아는' 것과 책 '아이 앰 댓'에 나오는 내용 간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나?"

 

-- 라메쉬의 사다나 -- 

 

질문자: 선생님의 첫 번째 구루께서는 아드바이타에 관심이 있었나요? 

 

라메쉬: 아드바이타에 관심은 계셨지만 기본적으로 힌두교의 아드바이타인 베단타였어요. 제 성향은 늘 도(道)와 노자에게로 완전히 기울여져 있었지 힌두교와는 전혀 상관없어요. 신기하게도 마하라지는 노자나 도를 전혀 들어본적도 없으셨지만 그분 가르침은 노자와 아주 비슷해요. 노자 이외에, 제가 초기에 관심이 있어서 읽었던 글 대부분은 위무위(爲無爲, Wei Wu Wei,1895~1986)의 글이었어요. 위무위 글은 난해해서 쉽게 이해가 안됩니다. 그가 쓴 한 서문을 보면 일부러 난해하게 적었다고 했는데, 좀 더 깊은 설명이 필요한 사람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라더군요. 1965년도에 누가 위무위의 책 한 권을 주었어요. 대충 읽고 그 책이 진정한 보물인 것은 알았지만, 그때는 그 진가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렇게 또 한 번, 그 점성술 예언처럼 잊고 있었죠. 제가 마하라지께 가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그 책이 생각나서 읽었더니 놀랍더군요. 마하라지께서는 아침에 대담을 여셨는데, 제가 저녁에 그 책에서 읽은 것을 다음 날 아침 마하라지께서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정말 환상적인 일이었죠! 위무위는 중국인이 아니예요. 아일랜드 귀족이고 백만장자였습니다. 프랑스 남부에 성을 가지고 있었어요. 와인에 있어서 권위자였고 덩치가 큰 남자인데, 키가 190센티미터나 되는 거구였습니다. 

 

질문자: 위무위는 완전히 깨달았습니까? 

 

라메쉬: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질문자: 다른 즈나니(*역자주, 깨달음이 일어난 현자를 가르키는 산스크리트어로, 자신의 본성을 아는 지식인 즈나나를 깨우친 사람이란 뜻이다)를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즈나니만이 즈나니를 알아본다고들 하더군요. 

 

라메쉬: 어떤 즈나니도 저를 찾아온 적이 없어요. 그리고 저도 다른 즈나니를 찾아 다닌 적도 없어요. 

 

질문자: 오직 즈나니만이 즈나니를 알아본다고들 하는데, 사실인가요? 

 

라메쉬: 아마 그렇겠죠. 조금만 말해보면, 확실해질 겁니다.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아시타바크라 기타를 잘 아시나요? 

 

라메쉬: 그럼요. 사실 제가 번역했는걸요. (웃음) 

 

질문자: 사실상, 그렇군요! (웃음) 제가 선생님 번역본(*역자주. 책 A Duet of One: The Ashtavakra Gita Dialogue, 아드바이타 출판에서 1989년 출판.)을 읽었군요. (더 크게 웃음)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네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여기 계신 것에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라메쉬: 절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질문자: 그리고 선생님의 대단한 인내심에도요. 

 

라메쉬: 말했듯이, 이 유기체는 어느 정도의 인내심이라는 축복을 받았는데, 물론 라마나 마하리쉬 만큼은 아니죠. 그런데 마하라지는 인내심이 없었죠. 

 

질문자: 마하라지가 아니라 선생님께 오게 돼서 다행이군요. 마하라지께서는 아마도 저를 내치셨겠죠! 

 

-- 가르침의 수준들 -- 

 

질문자: 마하라지의 저서중 한 책에서 보면 서양인들은 전생에 라마의 전사들이었다고 말씀하셨어요. 라메쉬 선생님께서도 이 말씀을 하실 때 그 자리에 계셨나요? 

 

라메쉬: 마하라지께서는 그 말씀을 꽤 자주 하곤 하셨죠. 

 

질문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라메쉬: 말씀의 내용은 라마 신이 원숭이 군대의 도움을 받는 라마야나 신화를 언급하는 것이예요. 라마가 전쟁에서 승리했을때 도움을 준 그 용감한 원숭이들에게 다음 생에서는 현상세계와 깨달음을 모두 즐기도록 은혜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마하라지가 유머있는 분이라는 것이죠. 별로 중요한 뜻은 없어요. 마하라지께서 이 신화를 언급하면서 정말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은, 마하리지를 찾아오는 인도인들 가운데 정말 그분의 가르침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마하라지께서 누군가의 병을 고칠 수 있는지 아니면 아들이 직장을 얻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에 관심이 있었어요. 대부분 마하라지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못 찾을 거라고 말씀하셨죠. 자신은 참의식에 관해서만 말하기 때문에 상투적인 명상이나 다른 종류의 수행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도와줄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셨지요. 비록 아드바이타라는 단어가 인도인들에게 익숙하기는 했지만 이 변함없는 철학인 아드바이타에 관심있던 사람은 아주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 온 사람들은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요. 제 생각에는 마하라지께서 이 점을 언급하신 것 같습니다. 마하라지께서 그 말씀을 하실 때 그 자리에 있었나요? 

 

질문자: 아니요.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진던이 편집했던 책 같습니다. 

 

라메쉬: 언급한 신화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하라지께서 서양인들의 진심 어린 마음과 열성에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는데 의미가 있지요. 서양인들은 수천 킬로미터가 넘는 아주 먼 길을 큰 돈을 들여서 왔으니 이 주제에 정말로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또한, '아이 앰 댓'이나 마하라지의 다른 책들을 읽으면 마하라지 주위에 청중이 늘 많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은, 극히 작은 모임이었어요. 모인 사람들 수가 보통 여덟 명이나 열 명 정도였죠. 주말이나 돼야 스무 명 정도 됐을 겁니다. 찾아 온 인도 사람들이 다 관심이 없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많은 인도인도 관심은 있었죠. 하지만 마하라지께서 보시기에 인도인들이 가르침에 열려있는 정도가 서양인들 만큼은 아니었나 봅니다. 보통 서양인들은 인도의 문화적 환경에 길들여져 있지 않지요. 다른 종류의 조건에 길들여져 있겠지만. 인도인은 틀에 박힌 수행에 길들여져 있어요. 예를 들면, 이런저런 경전들을 보고 그 사이에서 나타나는 명백한 모순을 지적하면서 마하라지께 어떻게 하면 그런 모순들을 없애고 조화롭게 만들 수 있는지를 묻는데, 이런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런 질문에 마하라지께서는 변함없이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보게, 난 거의 까막눈에 가까우니 이런 것들을 물으면 답을 해줄 수가 없지." 그리고 질문한 사람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이렇게 말씀하셨죠. "여기에 산스크리트어 석사학위에 인도 철학 박사학위까지 있는 여자 분이 있으니, 이분과 의논하게나." 마하라지께서는 반복해서 말씀하셨어요. "나는 어떤 경전에도 관심 없네. 어떤 책에도 관심 없지. 나는 오직 여러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밖에 세상이 있고 우리가 서로 볼 수 있고 서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만 관심있다네. 그러니까 우리가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여기에 뭔가가 있어야만 하네. 우리의 감각들이 제 기능을 하려면 뭔가가 있어야만 한단 말이지. 나는 이 본질에 관심이 있고 이 본질은 참의식이네." 마하라지께서는 대담 중에 적어도 스무 번은 "있는 모두가 참의식이야."라고 말씀하셨죠. 

 

-- 누군가에게는 침묵만으로 충분치 않다 -- 

 

질문자: 제가 참석했던 모든 대담에서 보면 제 생각에는 많은 질문이 지능적인 질문이더군요. 모두가 "라메쉬! 라메쉬! 라메쉬! 라메쉬!"하며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친절하시게도 선생님께서는 모두에게 답을 해주시네요. 제 질문은, "침묵이 뭔가요?" 

 

라메쉬: 침묵은 제가 마하라지와 있을 때 필요한 것입니다. 저 혼자 마하라지와 있으면 그분께서 주실 것이 침묵이지요. 이런 지식이 전달되는데, 이런 지식이 직관적으로 도달하는데 가장 강력한 매개체가 침묵입니다. 침묵이 가장 효과 있는 매개체이기는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침묵만으로 충분하지 않지요. 영적 진화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안내가 필요한데, 이런 안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하라지께서는 다양한 개념을 사용하셨어요.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침묵은 말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침묵이란 마음의 침묵입니다. 침묵은 의문이 부재하고 생각이 부재하는 진정한 명상이예요. 이 이해가 일어나는데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입니다. 의문을 가지는 마음이, 지능이 의문을 만들어내고 더 많은 의문을 일으킬수록 자아와 이해 사이에 더 많은 장벽이 생긴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될 때 침묵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런 침묵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서만 일어날 수 있어요. 당신이 침묵을 일으킬 수는 없어요. 그리고 그런 침묵이 올 때는 말이 전혀 필요 없어집니다. 정말, 어떤 말도 견딜 수가 없게 되죠! 이해가 밝아올 때는, 심지어 "그대가 그것이다."라는 위대한 표현도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이해가 없을 때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죠. 이런 까닭에, 이 모든 책들은 바로 그 "그대"를 위해서, 말 없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영적 진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대"를 위해서 씌어진 것이죠. 이 모든 말이 시간 낭비라는 사실이 돌연 선명해지는 때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 필요해요. 그때란 이것이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라고 이해한 다음이지요. 이해가 있을 때에만 이 농담에 웃습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이 농담은 가장 비참한 농담이 될 수도 있어요. (25jjung)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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