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43)

2021. 4. 16. 20:26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누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 -- 

 

질문자: 그 수피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라메쉬: 생각 없었는데 이제 물으시니, 이야기해 보죠.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조정 대신들이 모여서 왕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데, 누더기를 걸친 한 수피 수도승이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와서 왕이 앉을 자리에 앉아버렸습니다. 가장 높은 대신인 수상이 기겁하며 물었죠. "도대체 네가 누군데, 여기에 이렇게 들어왔느냐? 대신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는 것이냐?" 수피가 말했습니다. "대신? 아니, 나는 그 보다 높다네." "뭣이라, 너는 수상이 될 수 없느니라. 내가 수상이니라. 니가 왕이냐?" 수피가 대답했습니다. "왕이 아니네. 나는 그 보다 높다네." "네가 황제냐?" "아닐세, 나는 그 보다 높다네." "예언자신가?" "아닐세, 나는 그 보다 높다네." "네가 신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닐세, 나는 신이 아니며, 나는 그 보다 높다네." "하지만 신보다 높은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수피가 말했습니다. "그래, 맞았네. 나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바로 근원이고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것입니다. 나타나지 않는 것이 나타나는 것이 되었습니다. 본체가 현상세계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절대가 상대가 되었습니다. 잠재적 에너지가 활성화된 에너지가 되었습니다. 텅 비어있던 무대에 이 연극이 상연되었죠. 텅 비었던 캔버스에 이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은 아무것도 아닌 바로 공(空)입니다. 우리들은 인식 때문에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 "누가 무엇을 찾고 있는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 그 누구란 텅 빔일 뿐이기에 실재하는 누구는 있을 수 없고, 속이 꽉 찬 누구는 있을 수 없고, 속이 꽉 찬 개별적인 개체로서의 찾는 이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찾고 있는 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봤습니다. 찾고 있는 그 "무엇"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혀로 맛을 보거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찾고 있는 그 어떤 것이란 전혀 어떤 '것'이 아니죠. 이 찾고 있는 어떤 것을 현자들이 어떻게 설명했는지 알아봅시다. 스승 도신대사(道信大師)(*역자주, Master Yung ToAh Sh, 중국 선의 4조 도신 대사를 말하는 것같다.)는 이것을 '자비의 위대한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가 말하길, "오직 그것을 찾아 헤 멜 때만 잃게 된다. 붙들고 있을 수 없으나 없애버릴 수도 없거니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것은 제 갈 길을 간다. 고요히 머물면 그것이 말하나, 말하면 그것은 벙어리가 된다. 자비의 위대한 문은 활짝 열려있고 그 앞에는 어떤 장애도 없다." 다른 한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이 위대한 니르바나인가? 위대한 니르바나는 태어나고 죽는 카르마에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나고 죽는 카르마란 무엇인가? 위대한 니르바나를 바라는 것이 나고 죽는 카르마이다." 그러니,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찾으려는 바로 그 생각, 깨달음을 바라는 바로 그 생각 자체가 가장 큰 장애죠. 우리는 모두가 찾는 이입니다. 자신을 돌아 보고 "무엇이 나를 찾는 이로 만들었는가? 내가 찾는 이가 되겠다고 선택했었나? 어느날 불쑥 '내일부터 나의 진정한 본성을 찾을 테'라고 결정했나? 어쩌다 일렇게 됐지?"라고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이 찾는 이가 되겠다고 선택하지 않았죠. 이렇게 찾기 시작하게 만든 것은 밖에서 들어 온 어떤 생각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아내라고 재촉하고 강요하던 생각이죠. 

 

-- 누가 책임지나? -- 

 

질문자: 전 책임감을 포기하고 놓아버릴 수가 없네요. 계속 머리 속을 맴도는 것은 내 몸의 건강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 이 책임감을 놓아버리면 건강이 나빠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마도 그럴 걸요. 

 

라메쉬: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놓아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몸을 관리하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고 건강이 나빠지게 둔다면, 그 또한 일어나기로 되어있는 일입니다. 같은 가르침을 듣고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이 다르면 결과도 다르죠. 

 

질문자: 예, 결과도 걱정이 됩니다. 

 

라메쉬: 이 이해가 가져다 주는 것은 이렇습니다. 평소에 하던 수행을 걱정없이 계속합니다. 명상을 한다면 계속하세요. 명상을 안 한다면 일부러 명상을 시작할 필요 없습니다. 채식주의자라면? 계속 채식하세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계속 먹던대로 먹으세요. 누구도 일부러 변할 필요가 없습니다. 변화가 필요하면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뭔가가 변해도, 새로 뭔가를 시작하거나 하던 일을 멈추더라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입니다. 

 

질문자: 만일 살인을 저지르고 잡히지 않으면, 분명히 무사히 모면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늘 있을 겁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것에 대한 무언가가 있지... 

 

라메쉬: 일어난 일이 '자신'한 일이 아니라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를 저질르고 나서 그것이 '자신'의 죄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죄책감이 없겠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이런 이해가 있는데, 어쩌다 이 유기체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를 입었다면 일어난 일과 그에 따르는 결과까지도 받아들입니다.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지요. "내"가 있으면, 당연히 죄책감도 있지요. 

 

-- 개인이 타고난 본성과 영적 길의 관계 -- 

 

질문자: 어떤 길이 최상의 영적 길인가요? 

 

라메쉬: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궁극적 진리에 관해 하신 말씀을 명심하세요.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고 길도 없고 목표도 없고..." 그렇게 질문하는 것은 뭔가를 정말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인데, 길이 있고 목적이 있고 모든 사람에게 알맞으면서 누구든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 있다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게 되지요. 일반적인 오해지요. 누구도 다른 사람과 똑 같은 특징을 타고난 사람이 없어요. 제가 저번에 말했듯이 개개 인간의 몸은 정말 동적 에너지의 한 개별 패턴에 지나지 않아요. 개인이란 특정한 패턴을 따라서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면서 고동치는 에너지일 뿐이죠. 그리고 몸-마음 유기체 제각각 자신의 독특한 패턴을 가집니다. 힌두 경전들에서는 이것을 일컬어 달마(Dharma)라고 하지요. 오랫동안 달마를 잘못 해석하고 다른 뜻이라고 여겨 왔지요. 달마는 글자 그대로 "고유의 본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장미의 달마는 장미의 향기가 나는 거예요. 개별 유기체의 달마는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생각하는 것을 포함해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반응하는 방식은 그 개별 유기체가 잉태되고 창조될 때 타고나는 특징들에 달려있어요. 제가 말해드릴 수 있는 건 어떤 길을 가다가 다른 길로 바꿀 때 이것이 이전에 가던 길을 불신하는 것이라든지 이전 구루를 져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 구루는 잊어버려요. 그런다고해서 원래가던 길을 불신하는 것도 아니예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죄책감을 느끼거나 신의를 저버린다고 생각하지 말고 흐름을 따라가라는, 이 보편적 참의식이 이끄는 데로 따라가라는 말입니다. 그런 죄책감이나 신의를 저버린다는 느낌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느낌들 중에서도 최악이지요. 아라비아의 현자 모누이무스(Monoimus, 150~210)가 아주 멋진 말을 했습니다. 모노이무스가 말하길, "슬픔과 기쁨, 사랑과 증오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보라. 깨어있지 않아도 깨어있고 깨어 있어도 잠을 자며 사랑에 빠지지 않아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라. 이 모든 것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대는 자신과 다른 모든 것 안에 심지어 티끌에서 조차도 깃들어 있는 신을 발견하게 됨으로 그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그대 자신을 발견하리라." 

 

질문자: 어제 선생님께서 박티 요가와 즈나나가 만나는 지점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요. 그것에 관해서 좀더 말씀해주시겠어요? 

 

라메쉬: 그러죠. 정말로 박티와 즈나나를 구별 지을 수는 없어요. 사람들 각자는 자신을 찾는 이로 변화시킨 그 힘에 의해서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인도되지요. 박티와 즈나나에 관한 아주 훌륭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비토바(Vithoba)라는 신에게 음식을 올리던 남데브(Namdev)라는 성자가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비토바가 실제로 음식을 먹었다고 하지요. 결과적으로 남데브는 신이 실제로 받아들이는 음식을 올리는 진정한 박타로서 어느 정도 유명세를 탔습니다. 한번은 남데브가 텐트 안에서 여러 성자들과 앉아있었어요. 그들 중에 고라 쿰바(Gora Kumbhar)라는 즈나니가 있었어요. 쿰바는 도공이라는 뜻이죠. 누군가 애정을 다해 말했어요. "고라시여, 당신께서는 도공이시기에 그릇이 잘 구워졌는지 아닌지를 아실 겁니다. 당신의 지팡이를 드시어 모두의 머리를 두드려보시고 누가 익지 않았는지, 누가 아직 완전히 굽히지 않았는지 말씀해주소서." 쿰바가 남데브에게 와서 그의 머리를 두드리고서는 "이 사람이 안 익었소. 이 사람은 잘 구워지지 않았소."라고 말했지요. 남데브는 무척 화가 났어요. 다음날 비토바에게 가서 말했지요. "이건 나쁩니다. 공평하지 않다고요! 고라 쿰바라가 저보고 아직 안 익었다고 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게서 도대체 무슨 박티를 받아들이셨나요?" 그러자 비토바가 남데브에게 말했어요. "보라, 이제 너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나를 너머서 신을 너머서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토바가 말했어요. "네가 무엇을 해야 할지 일러주겠다. 한 특정한 시바 신의 사원으로 가라. 거기에 살고 있는 한 남자를 찾을 것이다. 그를 찾아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라." 남데브는 그 사원으로 가서 거기 누워있는 한 남자를 발견했는데, 이 남자는 완전히 자신의 상태에 빠져있었는데, 자신의 발을 시바 신을 상징하는 시바링검(Shivalingam)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남데브는 소름 끼치게 놀랐지요. "아니 뭐 하는 짓이요? 신성한 시바링검에 자기 발을 올려놓다니요." 라며 소리를 질렀지요.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제가요? 몰랐군요. 전 너무 아프고 허약해져서 제 발조차 들 힘이 없네요. 발을 좀 들어서 시바링검이 안 계시는 곳에다 옮겨주시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남데브는 그 사람 발을 들어서 옮기는데, 발을 놓는 곳마다 시바링검이 그 아래에 나타나는 거예요. 어쩔 줄 모르던 남데브는 마지막으로 발을 자기 머리에다 올려 놓았더니, 남데브는 불현듯 완전한 이해를 경험했어요. 그래서 이것이 비토바가 그에게 남긴 가르침이고 전하고자 한 것이었지요. 

 

질문자: 지식의 길이 가장 어려운 길인가요? 

 

라메쉬: 즈나나, 즉 지식의 길은 박티나 카르마 요가에 끌리도록 타고난 사람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길이겠지만, 이것은 마치 행동의 길, 즉 카르마 요가가 지식의 길을 따르는 사람에게 아주 어려운 것이나 마찬가지죠. 제 자신의 경험이나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보면 박티와 지식은 자주 함께 갑니다. 즉, 지식의 길은 박티를 배제하지 않아요. 지식을 따르는 사람이 앉아서 바잔 음악을 듣고 너무도 열중한 나머지 눈물을 흘릴 수도 있지요. 그리고 박티의 몸-마음 유기체는 확실히 헌신자의 전유물이 아닌 것에도 반응해요. 그리고 극히 드문 경우지만, 헌신자가 분리된 신에게 헌신하는  하나의 개체라는 자신의 정체성를 잃어버리면서 정체성이 사랑과 헌신으로 녹아들기도 하지요.(24cho)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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