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41)

2021. 4. 2. 22:02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질문자: 이런 주제에 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친구들과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는지에 관해서 말하는 거는요? 이건 그냥 계속... 

 

라메쉬: 그냥 개념화하는 일이죠. 

 

질문자: 그럼 취지에 전혀 맞지 않군요? 

 

라메쉬: 쓸데없는데 힘쓰는 것일 뿐이죠. 이 사실을 이해하면 자연히 말 수가 적어집니다. 

 

질문자: 선생님, 제가 저번 날에 살면서 놓쳤다고 생각하는 것들, 용기가 없어서 롤러코스터를 못 타거나 한 이런 일들에 평생 얼마나 기분이 안 좋았는가에 관해서 말했는데요. 이건 마치 아르주나가 전사가 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저도 계집애 같은 역할을 하며 살기로 되어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그럼, 이론적으로, 용감하지 않는 것에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군요? 

 

라메쉬: 이론적으로가 아니죠. 절대 이론적으로가 아닙니다. 직관적인 확신이 있어야만... 

 

질문자: 계집애 같아도 괜찮다고요? 

 

라메쉬: 당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괜찮아요! "계집애 같다"는 건 분리된 마음이 붙인 이름표일 뿐입니다. 

 

질문자: 전 늘 저 자신이 아닌 다른 뭔가가 되기를 원하는군요. 

 

라메쉬: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질문자: 신이 자신이 즐기려고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나"라고 불리는 한 개체 안에서 일어나는 참의식이 라메쉬라고 불리는 개체 안에 있는 참의식에게 말하고 있습니까? 

 

라메쉬: 물론이죠. 그렇죠. 

 

질문자: 대화하면서 즐기는군요. 

 

라메쉬: 그렇죠. 있는 모두가 참의식입니다. 그리고 이런 찾음의 과정은 정말로 개인 의식이, 개인과 동일시된 의식이 삶의 일부로써, 놀이의 일부로써, 릴라의 일부로써 자신의 비개인성을 찾는 과정입니다. 

 

질문자: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고려해 보면, 제가 모든 일을 다 잘못한다고 해도, 다 그렇게 일어나기로 되어 있는 것이군요? 

 

라메쉬: 그때는 그렇죠! 그런데 어쩌다 당신이 이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어떤 힘이 당신을 여기로 데리고 왔고 당신은 이 가르침을 듣고 있지요. 그리고 이렇게 들음으로써 어떤 이해가 일어난다면, 그 이해 때문에 인식이 바뀔 것입니다. 

 

질문자: 하지만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요? 

 

라메쉬: 그럼, 그것도.. 

 

질문자: 그 일도 일어나기로 되어 있던 일이군요? 

 

라메쉬: 맞습니다.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해가 있어야 한다면, 그런 오해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는 그런 오해를 피할 길이 없죠. 

 

질문자: 비록 일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옳은"일을 하더라도, 자신과 여전히 동일시하고 있는 저희들은 그순간 뭔가를 "잘못"해서 괴로움을 겪습니다. 과거에 그렇게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행동을 똑바로 해서 앞으로 오는 고통을 피하지요. 

 

라메쉬: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게 괴로움을 겪게하는 잘못된 행동들 조차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이고 신의 의지의 일부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영화 속 한 백작이 가훈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 가훈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습니다. 이 가훈에 전 엄청난 영향을 받았지요. 그때 제가 아마 15살이나 16살 정도 였을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은 양면효과를 가져옵니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는 이 또한 지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깊이 절망할 필요가 없지요.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너무 좋아라 환호하지 않을 겁니다. 이 또한 지나가죠.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삶과 생활 그리고 이 우주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본적인 것은 변함없이 계속되는 변화입니다.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세상에서 안전의 보장을 찾는 인간은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자: 항복이 정말 뜻하는 바가, 자신이 책임을 지고 있다는 믿음 이외에는 포기할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라메쉬: 정확히 그 뜻입니다. "항복"이란 말은 제일 많이 오해되는 말들 중 하나입니다. 항복이란 의지력을 항복하는 것이고 주체 행동 의식을 항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항복을 자신의 모든 물질적 재산을 포기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버리죠. 진정한 항복이란 순전히 자신에게 의지력이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의지로 받아들인다는 것일뿐입니다. 

 

질문자: 어쨌든, 의지력은 환상이군요. 

 

라메쉬: 바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의지력이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고, 수십 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다 의지력을 갖게되면 신도 세상을 제대로 운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죠! 

 

질문자: 때때로 마하라지의 말씀을 읽다보면 말씀들이 아주 명확해서...그때는 뭔가 아는 것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해하면서 자유로워졌죠. 그런데 그때 이해한 것을 전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어서 참 실망스럽습니다. 제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되돌릴 수가 없어서 실망하는 일을 멈출까요? 그처럼 명확했던 것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런 순간들을 되돌릴 수가 없군요! 그리고 지금은 아무것도 모르고 암흑 속에서 어리석음으로 헤메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가요?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습니다. 

 

라메쉬: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현상세계에서는 그 둘 다 진짜입니다. 현상세계에서는 변하지 않는 상황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의기양양했다가 의기소침하고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일이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로써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서서히 그런 기복을 목격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실망하는 일이 서서히 사라지겠죠. 

 

질문자: 하지만, 제가 가진 그런 순간들이 지식을 가져다 준 것같은데, 다시 찾아올 수가 없군요. 마치 제가 다른 곳으로 가기 때문에 그 곳에 있던 것은 다 놔두고 가야만 하는 것같습니다. 

 

라메쉬: 그렇게 아주 평화로운 경험을 바라는 것은 마음이죠. 역설은 마음이 그런 순간을 찾으면 찾을수록 자신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로 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복과 같은 뜻인 받아들임이 궁극적인 답이죠.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죠. 좌절을 포함한다면 좌절도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은 받아들이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없애버리지?"라고 말하죠. 

 

질문자: 그것도 받아들여야하지 않나요?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요? 

 

라메쉬: 그렇죠. 물론이죠! 

 

질문자: 받아들일 수 있기 전에 받아들일 수 없는 단계도 허락해야만 하군요. 

 

라메쉬: 그럼요. 모두 다죠. 제가 말하는 찾는 이의 불행이 바로 이것입니다. 

 

질문자: 그런데 전 이런 좌절을 원하지 않고, 이 때문에 좌절을 없앨 수도 없군요. 

 

라메쉬: 좌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질문자: 이때문에 선생님께서 언제나 '있는 그대로'로 돌아가시는군요. 

 

라메쉬: 정확합니다. 그 또한 일어나야 하죠. 

 

질문자: 여기서 즈나나와 박티가 만나는군요. 지식의 헌신이라는 측면에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받아들일 만큼의 신념이죠. 

 

라메쉬: 즈나나, 즉 지신에서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받아들임"이라는 말이죠. 헌신에서는 신의 의지에 항복한다는 "항복"이란 말이구요. 

 

질문자: 받아들임과 항복이 같군요? 

 

라메쉬: 똑 같죠! 어떤 길을 따라가든지 궁극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깨달음이 일어나기 직전에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나"란 절대 있을 수가 없고 "나"란 환상이라는 세상 가장 깊은 확신에 도달합니다. "내"가 자신을 받아들이라고 신을 설득할 수는 없죠. "내"가 행복해야지만 비로서 신이 일어납니다. 

 

질문자: 받아들인다고 말하는데는 문제가 있는데,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죠.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받아들이는 자가 없는 받아들임, 그런 받아들임이고, 이해하는 자가 없는 이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불현듯 번뜩이는 이해, 바로 이거죠. 이렇게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일에는 이해하는 자도 없고 이해되는 대상도 없습니다. 있는 모두가 받아들임이죠. 오직 목격만이 있을 수 있는데 이 까닭은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질문자: 무엇이 있든지 간에 있는 모든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전 그냥 제 삶을 그 순간 순간 살아가면 그만이고 이런 것은 다 필요가 없겠군요. 

 

라메쉬: 그렇죠. 에드워드 커밍스가 "그냥 있을 수 있다면, 있어요. 그게 안되면, 힘을 내고 남들 일에 계속해서 끼어들어요. 성공하고 실패하면서 그만 두게 될 때까지." 

 

질문자: 그냥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계속하는 거군요, 걱정없이요? 

 

라메쉬: 물론이죠. 바꿀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삶을 변화시키거나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수록 장애가 더 생기죠. 

 

질문자: 완전한 이해를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군요.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이해하는 저는 어떻게 받아들이나요? 불완전함도 받아들일 수 있나요? 

 

라메쉬: 그럼요. 여기서 요점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든지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든지 간에 받아들이는 "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든지 전체를 받아들이든지 간에 오직 일어날 수만 있는 일이고 그 유기체 운명의 일부지요. 

 

질문자: 그럼 결과를 바꾸려고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라메쉬: 여기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과를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결과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이해하기 전에는 그런 노력을 멈출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결과를 바꾸려고 할 까닭이 있습니까? 

 

질문자: 선생님께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의지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인가요? 왜냐하면 결과를 바꾸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는 바꾸려는 행동이 계속 일어날 것이고 바꾸려고 사회 활동을 할 여기가 충분하죠. 

 

라메쉬: 그럼요! 그런 성향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죠. 모든 사람이 그런 성향을 갖는 것은 아니죠. 

----페이지 252 / 351--- 사회 활동은 그런 행동을 낳게하는 성격을 가진 유기체들을 통해서 일어나겠지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의 과정이군요. 개체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목격이군요. 

 

라메쉬: 모든 것은 개인과 상관 없는 '비개인적' 과정이죠.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죠. 티뷰론에 있을 때 대담이 없던 날인데, 대담을 주관한 집주인은 정원에서 장갑을 끼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별안간 그녀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들어와서 "라메쉬 선생님,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제가 모든 것이 비개인적인 과정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신경 쓸 것이 없겠군요? 자아탐구도 필요없고, 헌신도 필요 없고, 따로 신경쓸 것이 없죠?"라고 묻더군요. 저는 "맞아요! 멋진 말입니다. 신경 쓰지 않게되는 까닭은 아주 간단해요. 비개인적인 과정이 받아들여지면 어떤 것에도 신경 쓸 "당신"이 없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기뻐하면서 다시 정원 일을 갔지요. 보시면, 이것이 받아들여지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이 개념일뿐이고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전혀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런 비개인적인 작용은 자신을 독립된 개체라고 생각하는 개인이 있는 한은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지요. 

 

질문자: "나는 정말 어떻게든 어떤 일도 한 적이 없다."라고 그냥 인정해 버리는 것과 같지 않나요? 

 

라메쉬: 물론이죠!! 

 

질문자: "내가 항복할 것이다."가 아니죠. 

 

라메쉬: 당연하죠! 맞는 말입니다. "당신"이 항복할 수는 없죠! 항복은 오직 '신의 뜻'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이해만으로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해는 정말 가슴 깊이 내려가죠. 사실 언제나 승리해 온 것은 '신의 뜻'이죠. 지금 승리하고 있는 것도 '신의 뜻'이고 앞으로 승리 할 것도 '신의 뜻'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데 오래 걸릴수록 더 오래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제게 이렇게 까지 설명해주는 인내심이 있군요. 마하라지께서는 아니죠. (웃음) 누가 마하라지께 "마하라지 선생님, 전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라고 말했더니 마하라지께서는 "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좋아. 그럼 괴로워하게나!!"라고 말씀하셨죠. (웃음) -(23cho)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새벽 6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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