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37)

2021. 3. 5. 22:04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목격 -- 

 

질문자: 이 "목격"이라는 것을 다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전 이해가 안되네요. 

 

라메쉬: 그러죠. 보시면, 목격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어요. 첫 번째는 평범한 사람이 완전히 얽매여 있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이해가 밝아오고 얽매임 줄어들면서 목격의 상태가 되어가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해가 완성되면서 얽매임이 목격으로 대체됩니다. 목격할 것이 있는 한 목격은 일어납니다. 목격할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 비목격 상태가 됩니다. 라마나 마하라쉬께서는 이 상태를 "자연의 상태"라고 부르셨어요. 그리고 이런 자연의 상태가 한 동안 방해없이 계속되면 깊은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 상태를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여하튼 깊은 상태입니다. 목격과 비목격이라는 이 두 상태는 자동차 자동 기어 장치처럼 자동으로 왔다갔다해요. 여기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목격은 저 멀리 있는 목표가 전혀 아닌 것 같네요. 왜냐하면 목격의 진정한 면을 들여다보면 목격이란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목격에는 정말 어떤 감정도 없고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군요. 그냥 목격이 있고 그냥 그뿐이네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고 언젠가는 도달해야하는 목표같은 것이 전혀 아니라, 사실상 매 순간 일어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군요. 

 

라메쉬: 그렇죠. 그리고 사실 이 때문에 제가 당신은 정말로 집을 떠난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질문자: 얽매이지 않고 목격하는 것이 영화를 보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라메쉬: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영화를 볼 때는 영화를 보는 동시에 반응도 함께하지요. 어제 저희가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갔어요. 아이들은 못들어오죠. 그런데 누가 까르륵거리는 아기를 안고 들어왔더군요. 그 아기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영화를 똑같이 보고는 있었지만 반응하지는 않았죠. 아기는 목격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아기는 영화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영화를 보면 영화 속 인물에 얽매이기 때문에 목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 마치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삶 속에서 살아가는 이 인물에 얽매이는 것과 같군요? 

 

라메쉬: 정확히 그렇습니다. 얽매이는 까닭은 "내가 행위자며 내가 경험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예요. 이렇게 되면 얽매이게 되겠죠.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그냥 일어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치면 그때는 목격이 일어납니다. 

 

질문자: 실망이 큽니다. 목격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어요. 저는 늘 계속해서 목격이 일어나기를 바라거든요.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까요? 그런데 불가능한 것을 제가 바라고 있네요. 

 

라메쉬: 바로 그겁니다. "나는 목격한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것은 마음이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는 일일뿐입니다. 그래서 돌고, 돌고, 돌고, 돌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차가 모래에 빠졌을 때 가속하면 할수록 차 바퀴가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것과 같아요. 이때 차 바퀴를 빼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외부의 힘이죠. 이 목격이라는 것은 마음의 것이 아닙니다. 이 목격이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 것인데, 비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으며 "~해야한다거나 ~이어야만 한다"와 같은 말을 쓰지도 않아요. '해야한다'거나 '하지 말아야한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죠. 목격은 그저 보는 것이예요. 화가 나면 화가 목격되지만, "화내지 말았어야 했어."라고 말하는 "나" 또는 마음-지능이 여기 없어요. 다른 말로하자면 "화"라고 하는 독립적이고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행동과 연관짓거나 자신의 행동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감정이나 욕구가 일어나더라도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고서 목격되면 모두 잘려나갑니다. 이와 같은 목격에는 개별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질문자: 전 인식을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전 이런 인식을 찬찬히 살펴보죠. 

 

라메쉬: 바로 이 때문이예요. 이 때문에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늘 남아있는 겁니다. 마음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과 가까이 있고 싶어해요. 일어나는 모든 일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것이 마음의 본성이예요. 이런 까닭에 통제권을 가진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기가 엄청나게 두려운 겁니다. 마음 또는 "나" 또는 지능은 "내가 알지 못한다면, 내가 책임지지 않는다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거야."라고 여겨요.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혼란이 있었습니까? 

 

질문자: 모르죠. 

 

라메쉬: 바로 그거죠! 정확히 그렇습니다. 그럼 신경을 왜 씁니까? 태어나기 전에 어떠했는지 모르고 죽고 나서 어떠할지를 몰라요. 이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서 왜 자기가 없으면 갑자기 현상세계의 흐름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질문자: 그런 걱정은 안 합니다. 

 

라메쉬: 자기 자신을 걱정하겠죠. 참의식이라는 흐름 속의 물 한 방울이 자신이 하나의 물 방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흐름 자체가 되고 싶어하지요. 그렇게 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마음 챙김 명상을 보면요. 제가 완전히 집중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산만한 생각같은 마음의 작용이 없는데, 이것이 긍정적인 상태이고 머물러야 할 상태죠. 제가 가만히 앉아있을 때는 이런 상태에 들어가기가 쉬워요. 하지만 걷고 있거나 운전을 하는 것처럼 정신을 완전히 집중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때는 온갖 생각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제 질문은, 선(禪) 스승이 "나는 걸을 때 걷고, 앉을 때 앉는다."라고 말한 것을 아는데요. 하지만 제가 걷고 있거나 운전하고 있을 때 이렇게 걷거나 운전하는데 집중을 해야 하나요? 아니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목격하는데 집중해야 합니까? 

 

라메쉬: 보시면, 마음 속의 생각들을 목격한다는 말은 생각들이 일어난다는 뜻이죠. 그리고 생각이 일어날 때 목격하게 되면 생각은 일어나다가도 잘려나갑니다. 자, 예를 들어 소화기관이나 호흡기관이 계속 일을 하는 가운데 생각들이 일어나고 그 생각들은 목격될 수 있어요. 만일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는다면 호흡기관처럼 자동으로 운전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각이 일어나면 목격되거나 아니면 얽매이겠죠. 그 생각들에 "내"가 얽매이게 되든지, 아니면 "내"가 사라지고 어느 정도 이해가 있으면 목격이 일어나겠지요. 

 

질문자: 그럼 선 스승이 "나는 걸을 때 걷고 앉을 때 앉는다."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요? 생각을 목격하는 대신에 걷는데 완전히 집중한다는 뜻이 아닌가요? 

 

라메쉬: 그 말은 그 스승의 경우에는 생각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보통사람만큼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예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목격될 겁니다. 그래서 걷는 것이 완전한 명상이 될 수가 있지요.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기 때문에 잘 알아요. 전 매일 아침, 저녁으로 1시간 15분씩 걸어요. 산만해서 길 밖으로 나가지는 않아요. 제 아파트 안에서 한 쪽 모서리에서 사선으로 다른 한 쪽 모서리까지 왔다갔다 해요. 걷는 동안 아무런 방해가 없으면 아무 생각도 없이 걸어요. 아니면 아주 가끔 생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끊어져나가죠. 

 

질문자: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시군요. 그냥 걸으시는군요. 

 

라메쉬: 그렇지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목격도 하나의 생각인가요? 제 말은, 생각이나 감정을 목격하는 일이 제게 일어나는 것을 보면 생각이 일어나고 바로 뒤에 목격이 있으니까, 목격하는 일이 시공간 안에서 나중에 일어나야하는 건데요. 그러면 목격이 생각이나 느낌이나 감정과 함께 동시에 일어나나요? 

 

라메쉬: 글쎄, 보시면 진정 목격은 이해입니다. 행동하는 이해가 바로 목격이예요. 그리고 이해가 깊고 꽉차면 생각이 일어날 때 생각이 목격되고 잘려나가는 일이 동시에 같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이해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이해만 있더라도, 좀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이해가 지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하더라도 어느 정도 얻는 것이 있어요. 마음이 줄곧 얽매여 왔었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날 때 어느 정도 얽매임은 있고 어느 정도 얽매임은 지속될 겁니다. 하지만 이런 얽매임도 어느 단계에서는 끊어질 거예요. 그 단계가 꽤 나중에 오는 단계라 할지라도 얽매임이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우치면서 얽매임은 잘려나갈 겁니다. 그리고 이해가 깊어져 갈수록 얽매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얽매이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얽매이는 강도도 점점 줄어들다가, 이해가 충분히 깊어지면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순간 수직적으로 바로 끊어져나가는 과정이 거의 동시에 함께 일어날 겁니다. 

 

질문자: 그러면, 목격이 1초 동안만 일어나는군요? 

 

라메쉬: 1초도 안되는 눈깜짝할 사이죠. 맞아요. 사실 목격이란 "나"로 인한 얽매임이 없다는 뜻이죠. 

 

질문자: 목격에는 목격자도 없고 목격되는 것도 없군요? 

 

라메쉬: "목격되는 것이라?" 그렇죠. 생각은 일어나죠. 생각이 일어나고 일어난 생각이 목격되고 잘려나가죠. 

 

질문자: 그러면 결국에는 어떤 것조차도 아니군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질문자: 하지만 그렇게 하려고 시도한다면... 

 

라메쉬: 그렇게 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냥 마음이 자기 자신이 작용하는 것을 보는 것일 뿐이고, 이것은 목격이 아니라 얽매임이죠. 

 

질문자: 이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나요? 한 생각에 얽매이더라도 또 다른 생각을 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기존의 생각은 잘려나가게 되지 않습니까? 

 

라메쉬: 결국에는 그렇겠죠. 남는 것은 결국 얽매임이죠. 다른 생각이 일어나고 얽매임은 계속되지요. 그래서 개념화하는 일이 계속되는 가운데 늘 남아있는 것은 얽매임이지요. 

 

질문자: 얽매임과 얽매임 사이에 목격은 안 일어나나요? 

 

라메쉬: 한 얽매임이 끝나면 다른 얽매임이 시작되요. 

 

질문자: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과 관련되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곱씹어 보는데요. 이것이 참의식의 아무것도 아님인가요? 

 

라메쉬: 그렇지요. 

 

질문자: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군요? 

 

라메쉬: 그렇죠. 목격이 생각을 끊어버리죠. 생각이 더는 없어요.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지요. 그러면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요. 여기서 요점은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생각이 적게 일어날 거라는 점입니다. 

 

질문자: 목격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나요? 

 

라메쉬: 목격은 자연 발생적으로 현 순간에 일어나요.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 잘려나가게 되지요. 다시 일어날 수도 있지만 목격이 다시 일어나면서 잘려나가게 되요. 매번 일어날 때마다 잘려나가게 되요.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생각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과 같아서 무시하면 서서히 오지 않게 된다."라고 말씀하셨듯이요.(21cho)

 

                              - 리쿼만 편집,김영진(관음)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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