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15. 21:31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이해가 깊어질수록 영향력도 커진다 --
질문자: 우리에게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것은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자유가 전혀 없는데 아주 자유롭게 느낀다고 하니까요.
라메쉬: 그렇죠! 그게 요점이죠! 바로 그겁니다. 역설이기는 하지만 진정으로 깊은 확신이 있을 때 일어나는 해방감은 엄청나고 환상적이죠. 실로 엄청나요! 뭘 하려고 해도 막지 않고 뭘 하지 않으려고 해도 막지 않아요. 사실은 반대로 말해야지 맞아요.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예요.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활동하지 않는 것도 아니예요. "나는 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을 때 일어나는 일은 의지없는 행위없음, 즉 자연 발생적인 행동이 일어나면서 그저 목격될 뿐이예요. 이런 이해가 가지는 엄청난 장점은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이 자기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일도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상대방을 절대 적으로 여길 수가 없어요.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만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이 나올 수가 있어요. 이웃을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그 사람의 행동이 그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는 적어도 증오할 수는 없을 겁니다.
질문자: 우리 대부분은 선택권이 전혀 없고 좋든 나쁘든 주어진 패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라메쉬: 좋거나 나쁘거나의 문제가 아니예요. 그냥 일어나는 일입니다. 어떤 유기체들은 뭔가를 하려는 성향을 타고난 반면 이 보다 좀 더 소극적인 유기체들도 있지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들일 뿐이예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런 사실을 지적 수준에서라도 이해하게 되면 그 영향력이 엄청나서 반드시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해가 깊어질수록 영향력도 더욱 커져요. 오직 처음에만 급해서 "이해가 왜이리 더디지? 빨리 빨리 서둘러!"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자: 아마도 이해가 깊어지면서 생각하는 마음에 머물러 있던 에너지를 일하는 마음으로 돌릴 수가 있군요?
라메쉬: 아니죠. "돌릴 수가 있다."가 아니고 "돌려지게 된다."입니다. 미묘하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예요.
질문자: 좋습니다. 일하는 마음으로 돌려지게 되면 좀 더 효율적이겠군요.
라메쉬: 물론 그래요. 왜냐하면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때문이예요. 예전에는 결과를 걱정하면서 흩어졌던 에너지가 이제는 보존되겠지요.
질문자: 보존되는 에너지가 정신적인 에너지뿐만이 아니라 육체적 에너지도 보존되지 않나요?
라메쉬: 그럼요! 그래서 제가 이런 이해가 일단 깊어지면 정신적인 일이든, 육체적인 일이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루 일과가 끝날 때는 놀랍게도 긴장을 거의 못 느끼게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예전에 느끼던 그런 피곤함이 없어요. 이것이 에너지가 보존되는 것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질문자: 개인은 명상을 할지 안 할지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인가요?
라메쉬: 참의식이 에고를 통해서 당신이 어느 장소에 있어야 할지를 지시합니다.
질문자: "명상하고 싶다."라는 생각도 '절대'가 개인의 의식을 통해서 전해주는 생각인가요?
라메쉬: 그럼요! 그렇기 때문에 찾음은 개인으로 시작해야만 해요. 그리고 에고, 즉 개인이 파괴되면서 찾음이 멈추지요.
질문자: 그러면 "에고에서 해방되고 싶다."와 같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도 일어나야만 하는군요?
라메쉬: 물론이죠. 살짝만 도와줘도 되는 경우만 아니면 그런 생각은 아주 일반적이예요. '개인으로서 찾는 자'는 일어나야만 하고, 에고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질문자: 명상을 하다보면 종종 좌절하게 되는데, "전혀 도움이 안돼!"라는 생각이 듭니다.
라메쉬: 그럼요. 당연하죠! 이런 깨달음의 과정이 어느정도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정해진 시간은 없어요. 어느 단계에서나 비약적인 도약이 있을 수 있어요.
질문자: 책 '아이 앰 댓'(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 저서. 원 제목은 'I Am That'이며, 모리스 프리드만이 영어로 번역하여 뭄바이에 위치한 체타나 출판사에서 1975년 출판함. 한국어로는 '아이 앰 댓'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됨 - 옮긴이)에서 마하라지께서 "깨달음은 반드시 갑자기 일어나며 영원한 것이다. 영원하지 않다면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라메쉬: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고, 들뜨기도 하고 침울하기도 하는 일은 에고의 일이며 현상 차원의 일이예요. 에고가 깨달음을 찾지만 깨달음이란 에고의 소멸을 뜻한다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하기 때문에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리고 "내"가 개인으로서 참전체성의 지복을 원해요. 깨달음이란 에고의 완전한 부재, 소멸, 파괴를 뜻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이해하면 이런 이해가 에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져요. 그래서 이런 깨달음이 불현듯 일어나는 순간에는 이미 에고는 사라지고 없어요.
질문자: 한 번 이해가 일어나면 사라질 수가 없나요?
라메쉬: 이해는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에 사라질 수가 없죠! 이해는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해가 바로 참의식이예요. 이해는 늘 있어왔어요. 오해가 나타난 것이지요. 오해가 사라지고 이해는 늘 있던 그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겁니다.
질문자: 하지만 오해가 언제나 다시 찾아올 수 있잖아요?
라메쉬: 그럼요. 이런 확신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오해가 왔다갔다 합니다. 그래서 들뜨기도 하고 침울해지기도 하지요. 깨달음이, 이해가, 확신이 완전해지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정상이예요. 깨달음은 모든 의문이 영원히 사라진 상태예요. 어떤 의문도 일어날 수가 없어요. 이 말은 오해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질문자: 궁극의 진리가 있기 전에 오고 가는 것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궁극의 상태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글쎄, 궁극의 상태라고 했지만 사실 어떤 상태도 아니죠?
라메쉬: 깨달음은 본연의 상태입니다.
질문자: 그렇죠. 모든 상태의 바탕이군요.
라메쉬: 그럼요.
질문자: 무슨 일이 일어나야 더는 의문이 일지 않나요?
라메쉬: 정확한 시간과 정확한 장소와 정확한 유기체가 전부입니다. 정확한 장소에 정확한 때가 되기 전까지는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일이 계속될 거예요. 이런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현상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이원성 안에 있기에 올라갔다 내려갔다하는 이런 일은 처음에는 아주 심하다가 이해가 깊어가면서 점점 약해질 겁니다.
질문자: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또 그 일이 이미 시작됐고 밖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고도 말씀하셨어요. 무슨 뜻이죠? 저는 "밖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줄어든다."라는 말씀이 저희가 이런 주제에 관심을 덜 갖게 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맞나요?
라메쉬: 아니예요. 밖을 바라보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이예요. 그래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일하는 마음의 활동은 점점 더 늘어나고 생각하는 마음의 활동은 점점 더 줄어들어요. 이것이 내면을 바라보는 일이예요. 그래서 내면을 바라보는 것은 그냥 일어나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되는 이해는 독서를 하거나 생각하고 토론회에 참석하고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면서 생겨요. 이런 일들은 모두 내면을 바라보는 일을 일으키고 깊어지게 하는 과정 상의 일이예요. 내면을 바라보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의 부재를 뜻해요. 밖을 바라보는 일, 즉 과거를 돌아보고 앞날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생각하는 마음이죠. 생각하는 마음의 활동이 점점 적어지면 내면을 보는 일은 자동으로 일어나요.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나"는 없어요. 생각하는 마음, 즉 밖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적어지면 내면을 바라보는 일은 자연히 일어나요. 정말로 같은 것이죠. 동면의 양면처럼.
질문자: 제게 가시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는데, 이해하는 사람이 없이 일어나는 이해가 있다면 마음/지능은 어디서 오나요?
라메쉬: 세상에서 가장 비폭력적인 사람인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마음을 죽이시오!"라고 말하곤 하셨어요. 누군가 그분께 "'마음을 죽이시오!'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라고 여쭈었어요. 그분께서 마음-지능은 필요하다고 설명하셨어요. 어떤 이해든지 처음에는 꼭 지능의 수준에서 시작해요. 하지만 지능은 자신의 한계를 깨우칠 수 있을 만큼 예리해야 합니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지능은 자신이 이해하려는 것이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너머서 있고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지적 수준의 이해는 더 깊은 이해로 스며들기 시작해요. 그리고 이해가 깊어질 때 지능으로 이해했던 어떤 것은 돌연 활짝 꽃을 피웁니다. 예를 들어, 저의 한 친구가 오늘 아침에 이렇게 말하더군요. "자네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는데 느닷없이 이 말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진다'가 아니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가 맞다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네. 주의 뜻대로 늘 '이루어졌지'. 그리고 주의 뜻대로 늘 '이루어질 거네'." 이 친구는 이렇게 이해가 일어나면서 지적인 수준에는 없었던 수 많은 지혜가 열렸다고 말했어요. 갑자기 떠오르는 그런 생각, 그런 통찰을 보면 이해가 더욱 깊은 수준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
질문자: 받아들이지 못할 때에는 자신의 일부가 밖으로 나가서 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개인을 약간 조정해서 다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하나요?
라메쉬: 아닙니다. 다시 한 번, 누가 그 질문을 하고 있어요?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옮겨가기 위해서 "참나"가 어떻게 조정해야할지, "참나"의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그 개인이예요. "나"는 어떤 것도 조정할 수가 없어요. 조정되어야 할 것이 있으면 조정될 것이고, 조정되게 될 것이고, 조정되도록 하는 일이 일어날 거예요. 어떤 조정도 할 수 있는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깨우칠수록 더 빨리 조정될 수 있어요. 이것이 정말 문제의 핵심이예요. 바로 마음이, 바로 "내"가 "어떻게 하면 과정을 재촉할 수가 있지? 못 기다리겠군."라고 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싶어하지요. 그 받아들임의 일부는, 아마도 그 받아들임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이 문제인가? '누구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 길을 잘 못 가고 있다거나 길을 제대로 잘 가고 있다는 느낌, 이런 모든 느낌들도 해당되나요?
라메쉬: 그럼요. 그 모두가 마음 속에 있어요. 모두가 "나" 안에 있지요. 사실 놀라운 일은 원이 완성된다는 거예요. 하지만 원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마음은 오른쪽과 왼쪽을 비교하면서 "뭘 이루었지? 아무것도 없잖아."라고 생각하겠죠. 원을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개인으로 출발해서 진전해 나가다가 찾는 과정이 원의 중간 정점에 올라서면서 여정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면서 "내가 성취하고 있구나. 내가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서서히 이해가 깊어지면서 원의 정점을 지나 내려가면서 "모르겠어. 잘 해오고 있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뭔가... 아주 무료한 것같다."라고 생각하지요. 원을 돌아 여행하면서 마음은 자신의 현 위치를 원을 올라갈 때의 상응하는 위치와 비교하면서 "난 잘해오고 있었지. 지금은 뒤 처지고 있는 것 같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길을 잘 못 가고 있나?"라고 생각하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하면, 당신은 어떤 것도 '얻은 것'이 결코 없다는 겁니다. 그것은 언제나 거기 있었어요. 늘 있던 것이 아니면 쓸모가 없어요. 뭔가를 성취했다면 무엇을 성취했든지 간에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요. 오직 '있는 그대로'만이 언제나 있어왔어요. 시간이 있기 전부터. 어떤 것을 얻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본연의 상태를 흐리던 것이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 일어날 뿐이예요. 뒤 떨어지거나 뒤 쳐지는 느낌은 "내"가 약해지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질문자: 그러면, "내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것이 깨달음인가요?
라메쉬: 몸-마음 구조체가 있는 한은 "나"는 남아 있어야 하는데, 이때는 자신을 주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고 순전히 작동의 중심으로만 남아있어요. 주체의 중심은 주체의 중심으로 인식합니다. 몸에 있는 작동의 중심은 몸-마음 구조체가 계속 되는 한은 남아있지요.
질문자: 그러면 뭐가 바뀌죠?
라메쉬: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나 모든 것이 바뀝니다. 밖에서 보면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하지만 안에서 보면 모든 것이 바뀌지요. 바뀌는 것은 태도와 시각이 전부예요. 이것 말고는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18ju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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