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 8. 21:03ㆍ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진정 환상이라고 이해하면 의문은 남지 않는다 --
질문자: 깨달은 사람이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으면 그 사람도 그 순간에 세상의 이원성을 느낄까요?
라메쉬: 아디 샹카라차리야(Adi Shankaracharya)라는 현자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한 번은 샹카라가 길을 걸어 내려가고 있는데 왕이 자신의 코끼리를 관리하는 조련사인 마위에게 샹카라를 향해서 코끼리를 돌진시키라고 명했어요. 그러자 샹카라는 도망쳐서 한 집으로 몸을 피했어요. 그날 저녁, 왕이 샹카라에게 "이 모두가 환상이라면서 왜 그대는 코끼리에게서 도망쳤소?"라고 물었어요. 샹카라는 침착하게 샹카라로 불리는 이 몸-마음 유기체도 환상의 일부이고 몸을 피하는 일도 환상의 일부라고 왕에게 설명했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이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어요. 그렇게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어느순간 "예,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어요. 정말로 이해가 가요. 사실, 저는 늘 이것이 어느정도 환상일 거라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서야 확신이 드네요."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의문들이 남아있어요. 환상이라고 이해했는데도 의문이 남아있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이 모두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환상 안에서 뭔가를 알고 싶어한다는 뜻이지요. 이 말은 자신은 쏙 빼놓고 다른 모든 것을 환상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이것이 주된 문제입니다.
질문자: 자신은 환상의 일부가 아니라는 설명을 듣고 싶어 하지만, 모든 설명이 환상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죠. 그런데 어떤 설명을 들어도 자신은 환상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확신할 뿐이죠. 진정 이 모두가 환상이라고 이해한다면 하나의 몸-마음 유기체로서의 자신도 그 환상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해할 거예요. 그리고 그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도 환상의 일부라고 이해하지요. 그러니 모든 것이 환상이라면 어떻게 의문이 조금이라도 남겠습니까?
질문자: 선생님의 책을 읽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지요?
라메쉬: 전혀없어요.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면 전혀 의미가 없지요. 하지만 필요를 느끼면 책을 읽게 되겠지요. 그리고 책을 읽다가 책의 의미를 진정 이해하면 더는 책이 필요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겠죠. 책을 읽고 개념들이 이해가되면 더는 그 개념들이 필요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요. 하지만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책이 정말로 필요해서예요. 그렇지 않다면 정말 솔직히 말해서 그 책을 읽지도 않았겠지요. 이 문제에서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아무것도 없어요.
질문자: 다른 한편으로는, 책에서 읽은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책을 읽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그 개념을 필요로 하게 되겠지요.
라메쉬: 물론이예요. 확실히 그 말이 맞는 까닭은 생각하지 않는 것도 자기 손에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예요. 그런 것에 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얽매임이예요. 얽매임이 목격되면 그렇게 시작된 생각이 끊어지면서 서서히 멈추게 되요. 목격이 다소간 계속되면 이런 생각이 점점 줄어들다가 멈출 거예요.
-- 비개인적 이해 --
질문자: 개인의 영혼이 신과 합쳐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라메쉬: 이 모두가 개념인 것을 알 겁니다. 그냥 한 가지만 믿으면 이런 개념들은 필요하지도 않아요. 이 한 가지는, 일어났던 모든 일과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과 일어날 모든 일은 오직 신의 의지에 따라서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 전부예요. 신의 의지를 믿으면, 오직 신의 의지만 믿으면, 환생이나 영혼 또는 어떤 것에 관한 개념도 당신을 괴롭히지 못할 겁니다. 이런 개념들이 당신을 괴롭히는 이유는 "나"라는 개체가 자신이 영원하기를 바라지만 개별 개체가 아닌 "나"는 영원할 수가 없기 때문이예요.
질문자: 뭘 알아야겠다고 고집 피우지 말아야 하는데요. 저는 고집이 워낙 세서요. 아마도 제가 배워야할 것이..
라메쉬: 부인, 지식을 얻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일은 그 고집을 포기하기로 되어있는 그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서 멈출 거예요. 그리고 그때는 자신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고집이 저절로 사라질 겁니다. 그때 까지는 계속 그러겠지요.
질문자: 맞아요. (웃음) 전 정말 이런 탐구의 덫에 걸려 있네요.
라메쉬: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찾는 이는 덫에 걸려있는데... "찾는 이가 누구인가?"라고 묻기 시작할 때까지 덫에 걸려있겠지요.
질문자: 찾는 이는 에고죠.
라메쉬: 찾는 이는 에고가 아니죠! 이것이 제 말의 요점이예요.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고 에고를 만들었으며, 지금은 동일시하는 것에서 탈피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비개인적 참의식이 바로 진정한 찾는 자입니다. 비개인적 참의식이 나아가는 비개인적 과정이지요. 참의식이 자신을 개별 몸과 동일시하면서 시작된 정체성은 여러 생을 걸쳐서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몸-마음 유기체에서 마음이 내면으로 향해요. 하지만 이때도 에고는 여전히 자신이 찾는 자라고 생각해요. 정체성에서 탈피하는 과정은 자신이 찾는 자가 아니며 찾는 자는 비개인적 참의식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우칠 때까지 계속되요. 이때가 되면 찾는 것이 의미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이때가 "내"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예요.
질문자: 항복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라메쉬: 항복이죠.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에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일 때 가장 순수하고 완전하며 완벽하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궁극적인 항복이예요.
질문자: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네요. 방금하신 말씀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질문자: 무엇이 자유를 경험하나요?
라메쉬: "아무도" 아닙니다.
질문자: 저는 "무엇"이냐고 물었지, "누구"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라메쉬: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말장난일 뿐입니다. "나는 아주 자유롭다."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있는 한은 이 말은 사실이 아니예요. 알시겠어요?
질문자: 예.
라메쉬: 이해가 일어날 때 해방감은 저절로 일어날 겁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누군가는 있지 않는데, 이 까닭은 이해가 일어나려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자가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예요. 이해가 일어날 때는 마음이 그런 의문을 품을 여기가 없어요. 이것이 지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즉 직관적으로 확신하는 것 사이의 차이입니다.
질문자: 그래서 이해는 정말 고요한 상태이군요?
라메쉬: 그렇지요.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는 것이군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까닭에 진정한 비개인적 이해는 오직 일어날 수만 있는 거죠. 하지만 지적인 이해는 진정한 이해가 일어나도록 이끌어주는 하나의 과정이 될 수도 있어요.
질문자: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지적으로 이해한 것이 어떻게 완전한 이해로 변하나요?
라메쉬: 은총이죠.
질문자: 그러면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니네요.
라메쉬: 바로 그겁니다. 걱정할 "누군가"가 없어요. 그리고 바로 이것이 완전한 이해, 비개인적 이해, 개별적으로 이해하는 자가 없이 일어나는 이해로 이끌어주는 진정한 이해입니다.
질문자: 깊은 잠을 자거나 공상 중에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인데요. 보통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은 보거든요.
라메쉬: 제가 변화한다고 말할 때 뜻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쁘라브리띠(paravritti)라고 합니다. 관점 전체가 변한다는 뜻이지요. 그리스 말로는 변화, 즉 관점이 변한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시스(metanoesis)라고 하지요. 보는 관점이 개인적인 관점에서 완벽한 관점, 즉 비개인적인 관점이 됩니다. 비개인적인 관점이란 자신의 몸-마음 유기체를 전체 삶과 생활의 일부로써, 즉 전체 꿈의 일부로 보는 것을 말해요. 그래서 깨달음이 일어난다고 유기체와 동일시하던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죠. 그럴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유기체가 계속 기능해야 하니까요. 유기체를 작동시키는 일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해요. 하지만 이렇게 작동시키는 일하는 마음은 유기체라는 구조의 일부일 뿐이고 실제로 이런 일하는 마음을 기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참의식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감지력이 감각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참의식이예요. 이렇게 이해하면 무엇과 동일시하기를 멈출까요? 그것은 바로 주체 행동 의식이예요.
질문자: "인식하는 것 자체가 노력이 될 수도 있다."라고 부처가 말했어요.
라메쉬: 아니죠! 인식은 노력이 아니예요. 인식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있기 때문에 인식이 일어나요. 의식이 없으면 몸-마음 유기체는 어떻게 될까요? 그냥 하나의 물체일 뿐이죠. 그런데 이 물체에 의식이 있으면 인식이 일어납니다. 인식하는 것은 그냥 일어나는 일이예요.
질문자: 오직 참의식만이 인식할 수가 있기 때문인가요?
라메쉬: 그렇죠.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참의식뿐이예요. 인간은 단지 참의식이 기능하는데 쓰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질문자: 인간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만 이전에 선생님께서 "인간이 노력을 기울이면 아마도 노력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잖아요?
라메쉬: "원인에 따른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했지요. 제가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겠죠.
질문자: 아마 그렇겠죠.
라메쉬: 그럼요.
질문자: 일어나기로 되어 있다면요.
라메쉬: 맞아요. 일어나기로 되어있다면.
질문자: 일어나겠군요?
라메쉬: 근육이 발달하기로 되어 있다면 제가 육체 운동을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기로 되어 있다면 육체 운동을 하려고 마음 먹어도 운동 근처에도 못가겠죠! 아시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만 한다면 특정한 결과가 따라와야만 해요. 이런 원인과 결과는 현상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예요. 그런데 현상세계를 초월하는 그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는데,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질문자: 깨달음이 일어나면 제가 저 자신이라고 생각해온 이 물체가 사라지게 되나요?
라메쉬: 그 물체는 분해될 때가 오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아요. 하지만 깨달음이 일어날 때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개인이라는 개념과 생각이 바뀔 겁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에,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며 자기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참전체성이 기능하며 행하는 일일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겁니다. 신이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기능해요. 자기 몸-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이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다른 몸-마음 유기체들에서 일어나는 일도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까지 이해해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행동이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더라도 그 한 개인을 자신의 적으로 여기지 않을 겁니다. 이것이 이해의 기초예요.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뜻이지요.
질문자: 그럼, 참전체성의 행동이 일어나는 것이군요.
라메쉬: 맞아요.
질문자: 제가 바로 이해했다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아니군요. 왜냐하면 이해하는 "우리"란 없기 때문이죠.
라메쉬: 맞아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렇게 이해함으로써, 더 나아가서 "깨닫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깨달음이 이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나든지 안 일어나든지 신경 안 써!"라고 이해하게 되요.
질문자: (웃으면서) 그런데 신경이 쓰이네요!
라메쉬: 누군가 제게 물었어요. 보면, 이 사람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데, "현상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말해서 이 모두가 당연하다고 가정하면 깨달음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전 이렇게 대답했지요. "쉬운 질문이군요. 깨달음이 자기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를 전혀 신경쓰지 않는 진실한 느낌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실질적으로 깨달음 바로 직전의 궁극적인 이해입니다. 깨달음을 원하는 어떤 "나"도 더는 없어요. (17jung)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성인들 가르침 > 라메쉬 발세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참의식이 말하다(31) (0) | 2021.01.22 |
---|---|
참의식이 말하다(30) (0) | 2021.01.15 |
참의식이 말하다(28) (0) | 2021.01.01 |
참의식이 말하다(27) (0) | 2020.12.25 |
참의식이 말하다(26) (0) | 2020.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