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의식이 말하다(28)

2021. 1. 1. 20:5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질문자: 우리는 자기가 자신의 몸-마음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어하지만 사실 조종 장치는 연결도 안되어 있죠? 

 

라메쉬: 아이들은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 자동차를 조종할 때 아주 진지해요. 아이들은 자기가 운전한다고 생각해요. 그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자기가 운전한다고 생각하기로 되어 있어요. 자기가 운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즐거운 거죠.

 

질문자: 반대로 실제로 길에서 운전할 때는 자기가 운전하고 있다고 생각해야겠죠. 

 

라메쉬: 그래요. 하지만 거기서도 정말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면 차를 정말 당신이 제어합니까? 아니면 제어가 되나요? 

 

질문자: 여기서 선생님은 깨달음을 얻기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하지만 저는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것이 제 앞에 놓여있든지 간에 그것과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가능한 한 얽매이지 않고 그저 바라보려고만 합니다. 참의식이 제게 뭔가를 주려고 할 때 이런 방법을 쓰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습니다만, '당신'에게는 아니죠. 그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진화의 과정이 계속되고 있고, 그 몸-마음 유기체에 일어나기로 되어있는 모든 일은 이 과정 속에서 일어날 겁니다. 거쳐가기로 되어있는 모든 과정을 거쳐갈 겁니다. 그리고 과정 중에 그렇게 훈련하는 수행이 필요하면, 그 또한 일어날 겁니다. 그래서 거의 어쩔 수 없이 여러 수행을 거치는 사람들을 보게되는 이유가 그런 수행이 그들 각자에게는 정확히 거쳐가기로 되어있는 수행들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수행을 어느정도 하다보면 이런 모든 수행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구나."라는 이해가 문득 드는 순간이 올지도 몰라요. 그러면 수행하기를 멈출지도 모르죠. 수행하기를 멈춘다면 이것도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예요. 

 

질문자: 신은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인가요? 아니면 신은 우리가 자신의 개인성이라고 부르는 것 아래에 깔려있는 고유의 본성인가요? 

 

라메쉬: 제가 해드릴 말은, 있는 모두가 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이 외부에 있는지 내부에 있는지 묻는 것은 부적절해요. 제 말은, 그 모든 시간을 통해서 수십 억의 인간 유기체와 다른 모든 유기체를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신 또는 참전체성 또는 참의식이라는 말입니다. 수십 억 인간 유기체는 모두가 다 신 또는 참전체성 또는 참의식이 작용하는데 쓰이는 도구일뿐이예요. 이 힘이 그 모든 세월을 걸쳐서 작용해온 유일한 힘이며, 지금 작용하고 있는 유일한 힘이고, 계속해서 작용할 유일한 힘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다 우리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예요. 

 

질문자: 결국에는 이 모두가 항복의 문제로 귀결되나요? 

 

라메쉬: 그래요. "내"가 사라지기 전까지 "참나"는 들어오지 못해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이 "나"를 쫓아낼 수도 없어요. 누가 "나"를 쫓아내겠습니까? "내"가 그 자신을 쫓아내지는 않아요. 그래서 궁극적으로 일어나는 일인 성불(成佛), 즉 깨달음은 비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큰 진전이예요. 당신이 신을 쫓을 수는 없어요. 정확한 시간과 장소에서 신이 당신을 쫓을 겁니다. 그러다 "신이시여, 저는 지쳤습니다. 저를 놓아주시든지 데려가시든지 하소서."라고 말하는 단계에 이를 겁니다.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쓰신 '열 한 구절의 시'를 보면 "당신께서 저를 지금 여기까지 끌고 오시고선 왜 저를 계속 매달아 놓으십니까? 왜 저를 이렇게 비참하게 놓아두십니까?"라고 말해요. 제가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 글이 라마나 마하리쉬께서 진리의 여정을 가면서 자신이 겪은 고난을 이야기하는 것인 줄만 알았어요. 나중에 이 글들이 깨달음이 일어난 이후에 적은 글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어요. 그분의 자비심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이 '열한 구절의 시'가 흘러 나왔고, 이 글은 찾는 이의 비참함을 상징해요. 신을 찾는 일은 마치 사랑니와 같아요. 아프지 않는 한은 가만히 놔둡니다. 그러다 사랑니가 아프기 시작하면 자연히 치과를 찾겠지요. 찾음은 당신의 의지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신을 찾는 일은 당신의 의지로 끝나지도 않아요. 신을 찾는 일은 개인으로 시작해서 개인이 사라지고 의지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우치면서 끝이납니다. 

 

질문자: 선생님은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를 개인으로 보고 말씀하십니다. 

 

라메쉬: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우치기 위해서 격려가 필요하고 일견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개인입니다. 찾음은 개인으로 시작해서 그 개인이 소멸되면서 끝이 납니다. 자신을 개별 개체로 의식했기 때문에 신성한 존재에게 기도를 드리는 행위가 생겨났어요. 예전에는 괜찮았지만, 특히 요즘 서양인들은 신이라는 존재에 기도하고 간절히 바랄 준비가 안 되어있어요. 항복할 준비가 안 되어 있지요. 한데, "참실재" 또는 "참의식"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서양인을 발견했어요.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제가 "신"이라는 단어를 쓸 때면 불편해하더군요. 종교가 이 거룩한 말에 무슨 짓을 했는지 한 번 보세요. "구루"라는 말도 마찮가지예요. 인도에서 구루는 공경받는 인물입니다. 제자가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때 자신과 구루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현상세계에서 구루는 여전히 제자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예요. 특히 인도에서는 깨달음 이후에 조차도 구루와 제자의 관계는 지속되지요. 하지만 여기 서양에서 "구루"라는 말의 의미가 얼마나 실추되었는지 한번 보세요. 불결한 말이 돼버렸어요.

 

질문자: 전 선생님께서 세상을 놀이나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에 비유하실 때가 제일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삶은 수 많은 아름다움과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같아 보이기 때문이예요.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런 아름다움과 의미를 치워버리시는 느낌이 드네요. 잃어버리는 느낌이예요. 

 

라메쉬: 자신이 행복하다면 자신의 삶을 사세요. 여기서 말하는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마세요. 바꾸지 마세요. 누가 뭘 바꾼단 말입니까? 변화가 일어날 거라면 저절로 일어날 겁니다. 저는 지금 더할 나위없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요. 한 개인으로서의 당신은 어떤 변화도 만들 필요가 없어요.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가세요. 책을 읽고 싶으면 읽으세요. 명상을 하고 싶으면 계속 명상을 하세요. 여기서 어떤 말을 들었더라도 괜찮아요. 안 들었어도 괜찮아요. 결과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면 일어나게 놔두세요. 어느 수준에서든지 어떤 가치나 쓸모가 있다면 이해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질문자: 비록 제가 과정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하더라도 이것 또한 과정의 일부... 

 

라메쉬: 맞아요. 비개인적 과정의 일부예요. 

 

질문자: 싸울 이유가 없군요. 

 

라메쉬: 맞습니다. 싸울 이유가 없어요. 서두를 이유가 없어요.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 이 과정이 비개인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개인적인 과정을 거치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당신은 계속 올라가겠지요. 

 

질문자: 왜 저는 계속 올라가야 합니까? 

 

라메쉬: 안 올라갈 수가 없어요! 올라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당신은 옭매어 있어요!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전혀 없습니다. 

 

질문자: 꼭두각시 인형처럼요? 

 

라메쉬: 예. 하지만 여기서 이해해야할 중요한 점은 당신은 그 과정을 서두를 수도 없고 멈추지도 못한다는 사실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계속 올라가는 일은 일어나는데, 제가 말했듯이, 조금씩은 꼭 진전해 나갑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전은 그냥 일어날 뿐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때 어느정도의 자유가, 서두르고 싶어하는 "나"로부터 벗어나는 자유가 생겨요. 이때 이것이 비개인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요. 올라가야할 계단 수가 130계단이라면 125계단에서 129계단을 오를 즈음 흘러나오는 빛을 볼 수도 있어요. 이때 "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해해요. 그러니 해방감은 이미 시작된거지요. 129번째 계단에서 130번째 계단으로 오르는 일은 늘 갑작스러운데 이 까닭은 계단 수가 총 130개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죠. 그래서 각성은 늘 갑작스러운 일이예요. 궁극적 이해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와요. 

 

질문자: 만일 저희가 총 몇 개의 계단이 있는지 알면 계단을 오르는 일이 매력적인 일이 될 것 같습니다만. 

 

라메쉬: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요. 

 

질문자: 선생님께서 어제 말씀하시길, "우리는 모두 어떤 목적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 좀 힘든데, 마하라지께서는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고 이런 단어들 조차도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같고 저도 이 말씀에 공감하거든요. 

 

라메쉬: 잠깐만요!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혼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같군요. 누가 "우리"입니까? 

 

질문자: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는 하지만, 선생님께서 몸-마음 유기체는 어떤 행동을 일으키는 특정한 특징들을 가지고 창조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들렸습니다. 

 

라메쉬: 예. 맞는 말이예요. 매 특정 순간마다 특정한 행동이 일어납니다. 이런 행동도 참의식이 기능하면서 만들어내지요. 이런 행동으로 특정한 결과가 나타날 겁니다.. 이런 결과에 따라, 즉 현재 행동의 결과에 따른 행동이 일어나려면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들이 그런 행동을 일으킬 수 있는 특징을 부여받고 창조되어야만 할 겁니다. 

 

질문자: 마치 준비된 각본처럼 들리는군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어요. 

 

라메쉬: 그럼요. 준비된 각본이지요. 하지만 깨달음이 있기전까지 개인은 이 사실을 못 깨우칩니다. 

 

질문자: 그렇지만 왜 꼭 그래야만 하지요? 

 

라메쉬: 왜 안 그래야만 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까요? 

 

질문자: 왜 그냥 진화가 시작되고 나서 각 사물의 특징들 때문에 특정한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면 안 되고 그 반대여야 하나요? 

 

라메쉬: 바로 이런 "왜?"와 "왜 아닌가?"라는 의문 때문에 힌두 철학에서 릴라(힌두교에서는 세상을 릴라, 즉 신이 하는 놀이라고 부른다. - 옮긴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릴라는 굉장한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기에 따로 대체할 단어를 찾기가 매우 어려운 몇 안되는 단어들 중에 하나예요. 제가 릴라라는 단어를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왜 릴라입니까?"라고 물으면 유일한 답은 "왜 아닌가?"죠. 

 

질문자: 왜 완전히 무작위로 일어난다고는 못 합니까? 

 

라메쉬: 이것이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여기에 우연이란 전혀 없어요! 

 

질문자: 라메쉬 선생님,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하신 말씀이 이 뜻입니까? 

 

라메쉬: 그렇습니다. 

 

질문자: 하지만, 미리 짜인 어떤 계획도 없다는 말씀인가요? 

 

라메쉬: 없어요. 모든 것이 지금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납니다. 무엇이 있었든지, 있습니다. 무엇이 있든지,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 것이든지, 이 또한 있어요! 

 

질문자: 선생님은 우리가 경험할 준비가 됐을 때는 우리의 몸-마음 구조체가 경험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글쎄 그러면 왜 저희가 선생님 말씀을 듣기위해 여기에 오고 책들을 읽습니까? 왜 선생님은 스승을 찾아뵙고 시간을 보냈습니까? 제 말은, 결국에는 그냥 일어날 일이고 우리는 그냥 흘러갈 뿐이라면 저희가 그냥 여기 있는 것이 좋고 말씀 듣는 것을 즐기려고 여기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라메쉬: 당신은 여기 있지 않을 수가 없어요! 저도 여기 있지 않을 수가 없어요. '말하고 있는 이것'과 '말을 듣는 그것'은 여기서 '말하고 듣는 일'이 하나의 사건으로 일어나기 위해서 여기 있어야만 해요. 당신은 자기 자신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듣는 일은 그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고 이 일은 진행되고 있는 깨달음이라는 탈정체성 과정의 일부지요. 그리고 이 일은 탈정체성이라는 과정 상에서, 진화라는 과정 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예요. 구체적인 하나의 사건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듣는 일이 그 몸-마음 구조체를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까닭은 이 일이 바로 이 순간, 이 장소에서 이렇게 일어나야만 하기 때문이죠. 참전체성 작용의 일부로 일어나는 일이예요. 

 

질문자: 그러면 내가 뭔가를 얻으려고 노력한다는 이런 느낌을 그냥 내려놓고 어딘가로 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뭔가를 얻기를 바라지 않으면서 있어야할 곳에 그냥 있으면 되겠군요? 

 

라메쉬: 예. 하지만 여기서 명심할 점은, 당신이 내려놓기를 바라는 것과 내려놓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사실이예요. 내려놓는 일은 오직 당신이 내려놓기를 바라지 않을 때만 일어날 겁니다. 

 

질문자: 하지만 저는 그렇게도 할 수 없는... 

 

라메쉬: 어느정도 역설이 있지요. (웃음) 

 

질문자: 그럼요. 그리고 저는 원하지 않으려고도 노력하지 못하고... 

 

라메쉬: 보시면 이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지요. 이런 찾음에 내재하는 고유의 진퇴양난의 상황입니다. 무엇이 자신을 찾는 이로 만들었는지 기억해보면 전체적인 안목이 생길 겁니다. 어느 특별한 날에, 특별한 순간에 그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자신이 "나는 찾는 이가 될꺼야."라고 결정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면 그날, 그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서 당신을 찾는 이로 만들었을까요? 어떤 생각이, 어떤 충동이, 어떤 힘이 그 몸-마음 구조체를 찾는 이로 바꾸었어요. 다른 식으로 한 번 얘기해보죠. 수 많은 다른 사람들은 이런 주제에 전혀 관심도 없는데 왜 하필 당신이 찾는 이가 되었을까요? 이것은 당신이 한 일이 아니죠. 그냥 일어난 일이예요. 이것이 핵심이예요. 그리고 과정이 계속 진행되면서 찾는 이는 여러 다른 길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특정한 한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길로 가야하나? 저 길로 가야하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선택은 진정 당신의 몫이 아니예요. 선택은 태어나는 순간, 잉태되는 순간 이미 결정되어 있어요.(17cho)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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