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가 현각 선사의 지관(止觀) 법문(13)

2020. 12. 2. 22:36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2) 원만함(圓)을 밝힘 

a. 인위(因位)의 3덕(德) : 법신 ,반야 , 해탈

[본문]

원만함 중에 세 가지 마땅히 구비해야 한다. 

① 첫째는 법신이 어리석지 않으면 반야이고, 

반야가 집착이 없으면 해탈이며,

해탈이 적멸하면 법신이다. 

② 둘째는 반야가 집착이 없으면 해탈이고,

해탈이 적멸하면 법신이고,

법신이 어리석지 않으면 반야이다.

③ 셋째는 해탈이 적멸하면 법신이고,

법신이 어리석지 않으면 반야이며, 

반야가 집착이 없으면 해탈이다. 

하나를 들면 곧 세 가지가 구비되므로 

셋을 말하지만 본체는 곧 하나이다. 

 

[해설]

원만함의 세 가지 3덕

① 법신 - (불치) ->반야

② 반야 - (무착) -> 해탈

③ 해탈 - (적멸) ->법신

 

위에서 법신, 반야,해탈 중 어느 하나 또는 둘에 치우치는 것을 논하였다면, 여기서부터는 이 세 가지가 원래 서로 분리될 수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가 갖추어지면 세 가지가 두루 구족하기 마련이라는 것, 따라서 이 세 가지를 분리하여 그중 어느 하나나 둘에 치우쳐서는 안되고 항상 세 가지를 두루 원만하게 구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① 세 가지를 두루 갖추는 첫 번째 방식은 법신에서 출발하여 그 법신의 성성한 밝음으로 반야를 얻고, 나아가 반야의 힘으로 집착을 끊음으로써 해탈을 얻는 것이다. 

② 두 번째는 반야 지혜에서 출발하여 그로 인한 무집착에서 해탈을 얻고 나아가 해탈을 통한 적멸에서 법신을 증득하는 것이다. 

③ 세 번째는 해탈에서 출발하여 그 적멸의 경지에서 법신을 증득하고 나아가 법신의 밝음 속에서 반야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원만구족하게 하나로 통하고 있음을 말한다. 

이는 곧 영가집이 2승이나 대승 권교(權敎)가 아니라 천태의 대승 원교(圓敎)에 이르러 비로소 법신, 반야, 해탈이 하나로 드러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행정은 천태의 관점에서 2승 및 대승권교의 치우침과 대승 천태의 원만함을 구분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원교와 돈교로 나아가 구분해야 한다. 무엇이 세 가지이고, 무엇이 덕(德)인가?

법신, 반야, 해탈의 세 가지가 네 가지 덕을 갖춤을 말한 것이다. 

수행의 궁극 지위인 불과에 이르면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두루 원만해지고, 거기에는 상락아정의 4덕(德)이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 가지 법신 : 법신 +반야 + 해탈

4덕(德) : 상 + 락 + 아 + 정

 

상락아정의 4덕은 범부가 자아와 법에 대해 갖고 있는 전도된 생각(상락아정의 생각)을 대치하기 위해 석가가 설한 

'무상,고, 무아,부정'을 다시 뒤집은 것이다. 

아공과 법공의 깨달음으로 '무상,고, 무아,부정'의 깨달음에 이르면, 그 공 또한 공하다는 공공의 깨달음을 통해 그것을 다시 대치하여 '상,락,아,정'의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행정은 ① 셋을 두루 갖추되 법신에서 출발한 첫 번째에 대해 "유경선사는 '지신(智身)은 법신(法身)으로부터 일어나고 행신(行身)은 다시 지신을 잡고 생기니, 지(智)와 행(行)의 두 몸이 융합하여 둘이 아니고 결국 하나의 본체로 돌아가 본래 평등하다'고 하였다. "라고 설명한다. 

법신으로부터 지신과 행신이 나오는데 지신이 곧 반야이고 행신이 곧 해탈이므로 결국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원만하게 함께 갖추어진다는 것이다. 

행정은 ② 반야에서 출발한 두 번째에 대해 "장사선사는 '마하반야가 비추고 해탈이 아주 깊고 깊으며 법신이 적멸한 본체이니, 셋이면서 하나인 이치가 원만하고 항상 되다'고 하였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③ 해탈에서 출발하는 세 번째에 대하여는 "천태지의는'해탈이 자재하고 법신과 반야 또한 자재하니, 비록 세개의 이름이 있지만 세 개의 본체는 없다. 비록 이것이 하나의 본체이지만 세 개의 이름을 세우니, 이 세 개가 곧 하나의 본체이어서 그 실(實)에는 차이가 없다.'고 하였다. 

비유하면 여의주에 대해 광채를 말하기도 하고 보배를 말하기도 하지만, 광채와 보배는 구슬과 하나도 아니고 구슬과 다른 것도 아니어서 종도 아니고 횡도 아닌 것과 같다. 3법도 이와 같다."고 설명한다. 

법신과 반야와 해탈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처럼 법신과 반야와 해탈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가 구비되면 다른 것들도 다 함께 구비된다. 

이에 대해 행정은 다시 거울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 이 셋과 하나는 거울과 같다. 거울의 질(質, 바탕)은 법신과 같아 자성의 본체이고, 거울의 밝음은 반야와 같아 '자성의 용(用)'이며, 밝음으로 인해 드러난 영상은 해탈과 같아 '수연(隨緣)의 용'이다. 

이런 까닭에 하나와 셋이 서로 갖추고 있으니, 앞의 두 가지는 실제로 치우친 것이다. 

법신은 거울 자체와 같고, 그 거울 자체의 밝음은 반야에 해당하고, 거울이 그 자체의 밝음에 의거해서 다른 사물들을 비춰내는 것은 해탈에 해당한다. 

결국 법신이 본체이며, 반야는 그 법신의 자성본용이고, 반야에 의지한 해탈은 그 법신의 수연응용이다. 

 

                     자성 ----體                             : 거울의 질(바탕) = 법신

                            └-用 --자성본용(自性本用)      : 거울의 명(明)   = 반야

                                    └수연응용(隨緣應用)     : 비쳐진 영(影)   = 해탈 

 

[본문]

이것은 인(因) 중에서의 3덕(德)이지 과(果)상에서의 3덕이 아니다. 

 

[해설]

지금까지 논한 법신과 반야와 해탈은 수행 과정에서 드러나는 덕, 즉 인위(因位)에서의 덕(德)이지, 

이미 수행을 완수하여 불과(佛果)에 이르렀을 때 얻게 되는 결과에서의 덕, 즉 과위(果位)에서의 덕은 아니다. 

수행에서 과위는 곧 불과위이다. 그렇다면 수행을 완수하였을 때 불과에서 얻게되는 덕은 과연 어떤 것인가?

이하에서는 인위의 덕인 법신, 반야, 해탈 각각에 상응하는 과위에서의 3덕을 설명한다. 

 

                                             - 한자경 지음 <선종영가집 강해> 불광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