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 22:44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우리에게 외부적이고 낯선 그런 껍질들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이 과정 자체를 경전에서는 '요가'라고 묘사하고 있다.다만 엄밀한 의미에서 '요가'라는 단어는 단순히 '결합'을 뜻할 뿐이며, 앞에서 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이 과정을 '분리'과정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가지(분리와 결함)는 똑같은 하나이다!
행복에 이르는 바가반 라마나의 길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 아닌 것으로부터의 분리'로 묘사한 것은, 지금까지 우리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져 온 모든 경전에서 '신과의 결합'이라고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모순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계의 큰 스승 스리 라마나가 '나'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에게 제시하는 기본적인 의미는 우리의 참된 본래적 의식, 곧 진아인 반면, 지금껏 경전들이 '나'라는 단어에 대해 부여해온 기본적인 의미는 '나는 몸이다'라는 의식(개아관념)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이 점을 분명히 해 보자.
어떤 사람이 "나는 띠루반나말라이에 왔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띠루반나말라이에 가 보았다."고 말한다면, 둘 다 띠루반나말라이에 당도했다는 똑같은 사실을 말하고 있다.
띠루반나말라이에 당도했다는 같은 사건을 '왔다'와 '가 보았다'는 상반되는 단어로 말하는 그들의 방식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론하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묻는 구도자에게 주어지는 방법은, '나'라는 단어의 기본적 의미로 무엇을 그에게 주느냐 혹은 무엇을 그가 취하느냐에 따라 '분리(viyoga)'나 '결합(yoga)' 중 어느 하나로 묘사될 것이다.
그래서 경전들이 가르쳐 온 요가와 스리 바가반이 가르친 자기 탐구간에는 하나의 차이점이 있다.
"나는 이 몸이다, 나는 별개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보통사람들의 그릇된 이해를 (가르침의) 토대로 받아들이는 경전들은 네 가지 요가, 즉 행위요가, 헌신요가, 라자요가, 지(知) 요가를 가르친다.
1. "그, 결과에 대한 집착없이 행위하라"고 행위 요가는 말한다.
2.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하지 말고 신만을 사랑하라"고 헌신 요가는 말한다.
3. "그대는 자신을 신과 분리함으로써 타락하여 하찮은 개아가 되었으니, 돌아가 다시 그와 결합하라"고 라자 요가는 말한다.
4. "신을 알라"고 지(知) 요가는 말한다.
이 네 가지 요가에는 각기 어떤 '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집착 없이 행위하는 '나', 신을 사랑하는 '나', 그 자신을 신과 분리했다가 이제 다시 돌아가서 그와 결합해야 하는 '나', 그리고 신을 너무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이제 그를 알려고 노력하는 '나'이다.
이처럼 이 네 가지 요가 모두에서 "나는 이것이다"나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형태의 어떤 '나'의 개별적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 '나' 없이는 어떤 요가도 수행할 수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먼저 "이 나는 누구인가?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그가 별개의 존재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실재하는가?" 를 알아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네 가지 요가를 통해 대망의 신 지위를 도달하려고 하면서 기력을 허비하기 보다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참된 성품 혹은 존재성은 과연 무엇인가? "를 면밀히 탐색하여 먼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더 쉽고, 더 중요하고, 또한 최선일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없는 지(知)를 얻기 전까지는, 우리가 아무리 신에 대해서 책을 읽거나, 남의 말을 듣거나, 혹은 신의 환영(幻影)을 보아 신에 대하여 알려고 하더라도, 의심과 불행이 거듭거듭 일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나'가 있기 때문이다.
네 가지 요가를 수행해야 하는 이 '나'가 하나의 별개의 개체라는 관념을 우리가 받아들인 뒤에야, 경전은 우리에게 그 요가들에 대한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그러나 바가반 스리 라마나는 우리가 이런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않는다!
"그대의 금고를 열어 그대의 자산을 발견하기 전에는 불필요하게 울면서 '나는 무일푼의 거지야'라고 선언하지 말라" 먼저 그대의 상자를 열어 보라. 그리고 그것을 살펴본 뒤에야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탐구하여 그대가 실제로 누구인지 알기 전에는, 자신이 하나의 유한하고 하찮은 개아라고 불필요하게 그대 자신을 그릇되게 평가하지 말라.
먼저 탐구를시작하여 그대 자신을 알고, 그대 자신을 안 다음에 만약 "여전히 무엇(신,해탈,행복 등)이 필요하다면, 그때 가서 그것을 살펴 봅시다."라고 스리 바가반은 조언한다.
'나는 몸이다'라는 의식이 개아(個我)이다.
바꾸어 말해서 개아의 성품은 '나는 몸이다'라는 그릇된 앎에 지나지 않는다.
지각이 없는 몸은 '나'라고 말할 수 없고, 존재-의식은 일어나거나 스러지지 않지만, 이 둘 사이에서 몸의 한도를 가진 어떤 '나'('나는 몸이다'의 동일시)가 일어난다네. 이것이야말로 의식과 지각력 없는 것 간의 매듭이고, 속박이며, 개아이고, 미세신이고, 에고이고, 이 윤회계이며, 마음임을 알라 ! -실재사십송 24연-
이 '나는 몸이다'라는 의식은 잠이 끝난 뒤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존재하면서 활동하다가 다시 잠 속에서 가라앉는다. 몸은 지각력이 없으므로 '나'라는 의식이 없고, 따라서 ('나는 몸이다'로서 일어나는) 이 의식은 몸이라고 할 수 없다 !
그러면 그것이 '나'라는 의식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진아라고 부를 수 있는가? 아니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일어나고 저무는 것은 진아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아의 성품은 일어남과 저묾이 없이 '내가 있다'로서 항상 빛나는 존재-의식이다.
그래서 일어남과 저묾이 있는 '나는 몸이다'라는 이 의식은 진아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의식인 진아도 아니고, 지각력 없는 몸도 아니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하나의 거짓된 겉모습으로서, 몸의 크기를 자신의 크기로 삼고, 시간과 공간에 의해 한정되며, 몸의 성질(일어나고 저묾)과 진아의 성질('나'의식으로서 빛남)의 혼합체이지만 그러면서도 그 둘에게 낯선 것이고, 진아와 지각력없는 몸 사이의 한 매듭으로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에고이며, 다른 말로는 속박, 영혼, 미세신, 윤회계(세간적 활동상태), 마음 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 형상 없고 유령 같은 에고(즉, 그것은 자신의 형상이 없다)는 하나의 몸-형상을 붙들면서 생겨난다네 !
형상을 붙들어 머무르고, 형상을 붙들고 먹으면서 더 커진다네.
한 형상을 떠나 다른 형상을 붙들지만, 찾아보면 달아나 버리네.
얼마나 놀라운가! 니와 같이 알아야 하네. -실재사십송 제25연-
-스리 라마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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