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탐구 실제 수행방법 및 이론 정리 (21)

2020. 11. 19. 22:4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마음의 찌꺼기를 비워버리기

우리가 개인성을 다 비워내었다고 느끼게 되어도 한동안 마음의 잔여물이 안에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찌꺼기를 마지막 한점까지 완전히 닦아내어 깨끗해지고 싶지만, 이것은 여간 끈끈한 게 아니에요.

그것의 끈끈함은 우리가 정체성에 집착하는 정도와 비례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마음의 찌꺼기도 우리가 개인이라는 그 정체성이 약해질수록 차차 떨어져 나가기 마련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참자아 속으로 더욱 깊히 나아가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둔다면,

이 정체성은 예전처럼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 우리가 자신의 조건화 상태를 분석하고 내 안에서 무엇을 더 씻어내야 하는지 묻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면 기울일 수록, 사실상 그것은 더욱더 이런 마음의 찌꺼기들이 되살아나 곰팡이처럼 자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는 이 불순물을 완전히 닦아내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위해 생각들을 하나씩 애써 떼어내려 하지 마세요. 

이런 방식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큰 보리수나무를 다듬는답시고 잎사귀를 하나씩 하나씩 떼어내는 겪입니다. 

마지막 잎을 떼어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새로운 잎들이 이미 등 뒤에서 자라나고 있을 거예요. 

그것은 아주 느리고 피곤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이지요.

 

더욱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그저 우리 참자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러 가서 오직 바이오린 소리에만 집중하는 것과 약간 비슷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오케스트라의 다른 단원에게 바이오린 소리만 들리게 조용히 연주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되지요. 

우리는 그냥 바이오린 소리에만 주의를 집중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참자아는 주의를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 고요, 즉 참자아 그 자체인 지고한 상태 '상태 아닌 상태'를 알아차릴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하여 삶의 모든 움직임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음'으로 머물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참자아란 어떤 대상도, 실체도, 사건도 아닙니다. 

참자아는 그 안에서 변화가 체험되면서도 정작 그 자체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허공과 같은 의식입니다. 

그러니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사소한 생각들에게 먹을 걸 던저주지 마세요. 

그러면 생각들은 또 하나의 이야기로 탈바꿈 할테니까요. 

 

기억하세요. 참자아에게는 어떠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자아탐구에 비추어 무언가를 분명히 보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그것을 확인하세요.

굳이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보고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냥 보세요!

진정으로 뭔가 봤다면 이미 본 것을 계속 점검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지요. 

만약 누군가가 내 물건을 훔쳐가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면 그 도둑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가질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개인성이 실체가 아님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개인성이 또다시 나타나거든,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평화를 훔치러 온 도둑임을 곧바로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켜봄은 점점 더 예민해지고 정확해질 것입니다. 

분별력 또한 점점 더 예리해질 것이고요. 

그러다가 '나'라는 개인이 존재한다는 환상이 충분히 약화되면, 여러분은 마침내 그 환상을 뛰어넘게 되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이곳에 있으며, 시간을 초월한 참자아 안에서 참자아로서 머물고 있을 뿐이지요. 

참자아와 하나가 되면 모든 것이 저절로 조화를 이루게 된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개인으로 남아 있다면 계속 이걸 고치고 저걸 또 바꾸고 하는 일만을 거듭하게 되겠지요. 

왜냐하면 개인의 일은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이예요 !

 

이 모든 것이 의식임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이리저리 물건을 옮기거나 나무를 베거나 불을 끄러 돌아다니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의 근원의 자리에서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생각들이란 의식의 스크린 위에 투영되어 춤추고 있는 이미지일 뿐임을 이해하게 될 거예요. 

생각들을 본래 모습 그대로 보게 될 것이며, 그렇게 보이는 것이 단지 그렇다고 믿어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생각들이 얼마나 순간적인지 보세요. 잠시 여기에 있다가 곧 사라질 뿐이예요. 그런 왜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과 사랑에 빠지나요? 그런 결혼이 얼마나 오래 가겠어요?

모든 현상은 떠다니는 구름과 같습니다. 

 

개인이라는 독(毒)에 빠지지 말라.

종종 삿상에서 사람들이 제게 하는 질문을 듣고 있노라면, 

저는 그들이 아직 자기 자신을 개인으로 강하게 믿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 예로 어떤 분은 과거에 자기가 잘못했던 일들이 머리 속에서 영화처럼 계속 재생되는데 이게 어찌나 심한지 꿈에서도 계속 보인다고 하더군요. 그는 죄책감을 느꼈고 자신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후회에서 벗어나길 원했지요. 

그렇게 바라는 것은 이분만이 아닐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똑같이 느끼지요. 하지만 "나는 삶에 붙잡혀 있고, 이제 이렇게 사는 것은 그만두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개인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 정체성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이 정체성을 의식하고 스스로에게 물으세요. "무엇이 이 정체성을 의식하는 걸까? '내 이야기'를 의식하고 있는 그것도 뭔가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개인의 이야기는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다만 우리가 그 이야기에 엄청난 이야기를 부여하는 바람에 그것이 우리 삶의 질을 크게 저하시켰음을 인정하세요. 아마 지금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차렸을지는 모르지만, 여러분 안의 무언가가 그저 '의식하고 있음'의 중요성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가리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의식함'이 아니라 '의식 그 자체'입니다.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자마자 여러분은 그 주의가 의식의 자리에서, 또 의식 속에서 관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 존재의 근원인데도, 의식을 가치 있게 여기는 사람들은 극히 드믄 듯 합니다. 

 

우리 안에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바라 볼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공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굳이 그 측면들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된답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눈 앞에 떠오르게 때문이지요.

보는 법을 배우세요. 그러나 사건들을 해석하려는 경향은 경계하세요.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그저 그날그날 일어나는 일들에 불과합니다. 

진짜 독은 이를 해석하려는 경향이지요. 

즉, 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석은 언제나 개인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넌 이 일을 충분히 잘해내지 못했어"

"그 사람들이 너를 비웃었어."

"그 사람들이 너만 또 쏙 빼놓았어."

"그 사람들이 올해에도 또 같은 연하장에 이름만 바꿔 써서 보냈어 !"

 

이렇게 모든 일을 개인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은 우리가 스스로 상처를 받도록 만듭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독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그것은 근거없는 불평불만을 만들어내는 데 탁월하답니다. 

그러나 단지 바라보세요. 

바라보는 동안에 '이야기'가 흘러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의식할 뿐 그 속으로 끌려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서서 바라보고 있는 더 큰 공간에는 어떤 이야기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앎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당면했던 문제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 도리 것입니다. 

 

                    -무지 저,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참된 나를 찾아서(정신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