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선사 경책(13)

2020. 11. 9. 22:41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ㅇ. 

"제방의 학인들이 나를 찾아 오면 

산승은 그들의 물음에 세 가지의 근기로 판단한다.

중하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만 빼앗고 그 법을 없애지 않는다.

혹 중상근기가 오면 나는 곧 경계와 법을 함께 빼앗는다. 

만약 상상근기가 오면 나는 경계와 법과 사람을 다 빼앗지 않는다. 

만약 격을 뛰어넘는 견해를 지닌 사람이 오면 

나는 여기서 곧 본체를 통째로 나타내어 근기를 따지지 않는다."

 

"큰스님들이여,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 수행자가 전력을 다하는 곳에선

바람도 통하지 않고 전광석화도 오히려 느려 벌써 찰나 간에 지나쳐버린다. 

학인이 만약 눈을 깜박인다 하여도 요점과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마음으로 헤아리려 하면 곧 틀리며

생각을 움직였다하면 곧 어긋나 버린다. 

그러나 이 뜻을 깨닫고 아는 사람이 있다면 

목전(目前)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 큰스님들이여! 

그대들은 바랑과 똥자루 몸뚱이를 짊어지고 

옆집으로 내달리며 부처와 법을 구하는 구나.

지금 그렇게 구하는 바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대들은 아는가?

홯발발하게 작용하지만 그 뿌리가 없으니

움켜잡아도 모이지 않고 흐트려트려도 흩어지지 않는다. 

구할수록 더욱 멀어지고 구하지 않으면 도리어 눈앞에 역력히 있어

신령스러운 소리가 귀에 속삭인다.

이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면 백 년 세월을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ㅇ.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한 찰나 사이에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들어가고

비로자나불 국토에 들어간다. 

해탈 국토에도 들어가고 신통국토에도 들어가고 청정국토에도 들어간다. 

법계에도 들어가며 정토(淨土)에도 들어가고 예토(穢土)에도 들어간다.

범부의 세계에도 들어가고 성인의 세계에도 들어간다. 

아귀축생의 세계에도 들어간다. 

그러나 곳곳마다 찾고 찾아보아도 

어느 곳에도 생사가 있지 아니하고 공명(空名)만 있음을 볼 뿐이다. 

허깨비 꽃이며 헛꽃인 것을 애써서 붙잡으려 하지 말고

이득과 손실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모두 다 놓아버려라."

 

ㅇ.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산승의 불법은 확실하고 분명한 선문(禪門)의 흐름을 계승한다.

위로부터 내려온 마곡(痲谷), 단하(丹霞), 마조도일(馬祖道一), 여산(廬山)

석공(石鞏)화상은 한 길로 조사선의 기풍을 천하에 두루 폈는데

아무도 믿지 않고 비방만 하였다. 

예컨대 마조화상이 법을 쓴 것은 매우 순수무잡(純粹無雜)하였다. 

그분께 도를 배우던 삼백에서 오백이나 되는 학인들은

모두 다 화상의 뜻을 보지 못했다.

여산 화상은 자재하고 참되고 바른 분이었다. 

역순으로 법을 쓰는 것은 학인들이 그 경계를 측량하지 못하고 

모두 다 갈팡질팡하였다. 

단하화상은 구슬을 굴리는 솜씨가 자유자재하여, 보였다 안보였다 하였다.

찾아오는 학인들마다 모두 꾸지람을 들었다.

마곡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소태나무 씹는 것같이 쓴맛이라

모두들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또 석공화상이 법을 쓰는 것은

화살을 쏘듯이 사람을 시험해 보는 방식이었으니,

오는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ㅇ.

"산승이 오늘날 법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만들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며 가지고 놀며 신통변화를 부려 일체 경계에 들어 가지만

가는 곳마다 아무 일이 없어서 경계가 나를 빼앗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곧 몇가지 옷을 입어 보이면 학인들은 알음알이를 내어

모두 나의 말과 글귀 속으로 끌려 들어오고 마니, 애처로운 일이로다."

 

"눈멀고 머리 깍은 중이나 안목없는 사람들이

내가 입은 옷에 집착하여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희다고 말한다. 

내가 옷을 벗어버리고 청정한 모습으로 들어가면

학인은 한 번 보고 기쁜 생각을 지어낸다.

또 내가 다시 옷을 벗어버리면 학인은 마음을 잃어버리고 

조급한 생각으로 바쁘게 달아나면서 '내가 옷을 입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내가 그때 바로 그들에게 '그대는 내가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한

바로 그 사람인 줄 아는가?'라고 물으면 

그는 홀연히 머리를 돌려 나를 알아본다."

 

ㅇ. 

"큰스님들이여 !

그대들은 형상을 가릴 뿐인 옷을 잘못 알지 말라.

옷은 제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사람만이 능히 옷을 입을 수 있다. 

청정한 옷이 있고, 생사가 없는 옷이 있으며,

보리의 옷과 열반의 옷이 있으며, 조사의 옷과 부처의 옷이 있다. 

큰스님들이여!

다만 소리와 명칭과 문구 따위는

모두 옷들의 형상과 색깔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과 같다. 

배꼽 아래 단전으로부터 울려 나와서

이가 서로 부딪쳐 글귀와 의미를 이루는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아지랑이(幻化)임을 알아야 한다."

 

"큰스님네 들이여!

밖으로 표출된 소리인 말은 내부의 여러 가지 마음작용이 드러난 것이며

헤아림이라는 의지작용(思)으로 생각(念)으로 떠오르는 것인바, 

이들은 모두가 옷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이 다른 사람이 입고 있는 옷만 보고 그것을 진짜라고 생각하면 

한량없는 세월을 보내더라도 다만 옷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삼계에 돌고 돌며 생사에 윤회하게 되니

차라리 아무 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서로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도 상대의 이름을 알지 못하도다. "

 

                                             -임제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