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보는 자리는 모두 자심 위에 망상이 나타난 것이다.

2020. 10. 14. 23:06성인들 가르침/과거선사들 가르침

[본문]

양(亮)선사가 말하였다. 

"제법(諸法)의 도리를 밝히건대 실은 같음과 다름이 없다. 

감추고 드러내는 뜻에 입각하여 말하건대 거두어들임(卷)과 폄(舒)의 두 뜻이 있다. 

거두어 들인다는 뜻에서는, 마음 일어남을 봄이 없고, 관해(觀解)하는 행이 없으며,

심정(心情)따라 행하되 성품은 불법(佛法)에 머문다. 

펴는 뜻(舒義)에 입각하여 말하면 마음이 퍼져서 다른 것에 속하게 되니 명이(名利)에 부려지고,

인과(因果)에 종속되며 , 시비(是非)에 스스로 묶여 자재(自在)하지 못하게 된다. 

이를 이름하여 펴는 뜻(舒義)이라 한다.

[해설]

거두어들임은 일체법 내지 일체상이 일심 내지 성(性)에 융입(融入)됨이니 오직 일상(一相)일 뿐이다. 

편다면(마음이 일어나면) 만상(萬相)의 일체법으로 현현한다. 

동시에 마음이 그 만상의 경계를 향하고 지각하며 분별집착한다. 

즉 물속의 달(水中月)과 같고 객진(客塵)인데, 이러함을 모르고 미망하여 그에 오히려 종속되는 것이다. 

거두어드림에서는 마음 일어남이 멸해지고, 편다 함은 곧 마음 일으킴이 된다. 

일체의 상념이 거두어들여져 일상이 된 가운데서는 견문각지에 따른 심정이 현현되어도 항상 일상(一相)의 뜻이 구현된다. 일상은 곧 견분(能)과 상분(所)이 따로 없음이니 지각함이 없이 지각한다. 

그래서 일체의 상념이 지각되는 그대로 일상일 뿐이고, 무심이며, 마음을 잊는 자리가 된다. 

그래서 '심정(心情)따라 행하되 성품은 불법(佛法)에 머문다'라고 하였다. 

 

[본문]

지(志)선사가 말하였다.

"일체 모든 것을 불법(佛法)으로 보는 것을 이름하여 법안이 청정함이라 한다. 

행동거지가 모두 보리(覺)이다. 

마음 따라 바로 불도(佛道)에 이른다. 

슬퍼하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곳곳이 모두 올바르다. 

간택(揀擇)하는 마음이 있으면 바로 삿됨에 빠진다. 

만약 안심의 자리에서 삿됨이 퍼득 튀어 오를 때 한 자리에서 부동하면 또한 바로 도(道)이다. 

[해설]

어떠한 상념 하의 마음 상태이든 그 당념 당처에서 마음을 옮기려 해서는 안된다.

현전의 그 마음에 본래 불성(佛性), 일심(一心), 여래지(如來地)가 다 갖추어져 있다.

당념 당처의 마음이 잘못된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그 마음을 버리거나 바꾸려 함은 오히려 본 마음을 동하게 한다. 막 일어난 그 생각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마음을 어떠게 하려는 행을 꼭 버리고, 그 자리에 흔들림없이 참고 있어야 한다. 천태법문 등에서 수행의 단계를 몇단계의 인(忍)으로 표시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좌선에 들어간다 하여 마음을 새로 가다듬거나 조정하려 해서는 안된다. 

항상 그 자리의 그 마음 그대로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수행한다고 해서 자꾸 마음을 어떻게 바꾸고 가다듬으려 하면 이것이 습관이 되어 근본의 수행, 즉심(即心)의 행에 이르지 못한다. 방금 일어난 마음이 아무리 형편없는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무심하게 그 자리에서 움직임 없이 참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큰 공부이고 즉심에서 성불하는 달마선의 길이다.  

 

[본문]

정(淨)선사가 이른다.

"미혹한 사람은 죄가 없는 곳에서 죄를 보고, 깨달은 사람은 죄가 있는 곳에서 바로 죄가 없다."

[해설]

깨닫는다고 함은 현전하는 경계의 그 상(相)이 그 상 아님을 보는 것이니 

<금강경>에 "모든 상이 그 상이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봄이다."고 하였다. 

모든 것은 단지 물속의 달(水中月)과 같다. 

물 속의 달을 잡으려 물 속에 들어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려면 그것이 물속의 달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그 뜻을 알았으면 당념 당처에서 다른 자리를 구하려 함을 떠나니 부동심(不動心)이 된다. 

부동한 가운데 경계가 수중월이 된다. 

그래서 물속의 모든 것들이 다 그 모든 것들이 아니다. 

단지 물 속의 그림자요, 영상인 까닭이다.

 

[본문]

연법사(緣法師)가 말한다.

"일체의 경론은 모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도심(道心)을 일으킨다면 마음에 바로 교위(巧僞:기교를 부려 꾸미고 거짓되게 함)함을 생하는데 하물며 그밖의 일(생각)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 

만약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좌선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 ! 

교위의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정념(正念)을 얻기 위해 힘써 애쓸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보리심을 말하지 않고, 지혜와 깨달음을 구하지 않는다면 사(事)와 이(理)가 모두 남김없이 다 갖추어진다. "

[해설]

마음으로 어떤 특별한 자리를 구하려 하거나 어떠한 법상에 향하게 되면 본래 갖추어진 부동(不動) 무생(無生)의 본심을 놓쳐버리고 당념 당처에 안주하지 못하게 하며, 항상 무엇을 쫓아다니느라 애쓰게 만들어 심신을 피폐하게 한다. 이것은 수행자가 자칫 범하기 쉬운 병폐이다. 어디에 향하거나 구함을 떠나면 그대로가 항상 본심이다. 

실은 누구나 항상 본래 그 본심에 즉해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무엇을 구하여 얻고자하거나 이루고자 하면 오히려 마음을 기교(技巧)부려 꾸미고 거짓되게 하는 것이 된다. 본래의 순수한 본심을 괜히 휘젓고 그 가상(假想) 속에 자신을 묶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념 당처에서 무엇을 구함과 향함이 없으면 저절로 공부가 되어 사(事, 證) 와 이(理)의 통달이 원만히 저절로 이루어진다. 

 

[본문]

랑선사(郞禪師)가 말한다.

"마음이 일어난 때에 바로 (일어난 마음이) 멸한 것으로 보고, 

색법(色法)을 간(看)하되 견(見)함이 없다. 

색에 미혹하여 마음이 일어나면 색을 보아 색이라는 해(解)를 짓는다. 

마음이 색(色)에서 법(理法)을 지어 그 법 따라 진실을 간하니 볼 것이 없다."

내지 또 이른다. 

"일체 모든 것은 모두 망상으로 분별한 것이어서 실처(實處)가 없다. 

모든 보는 자리는 다 자심에 망상이 나타난 것이다. 

도가 어떤 물건이건대 이를 닦으려 하는가 !

번뇌가 어떤 물건이건대 이를 끊으려 하는가 ! "

 

                                   -박건주 역주, 담림 편집 <보리 달마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