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가 말한다(16)

2020. 10. 9. 21:53성인들 가르침/라메쉬 발세카

- 우리가 이미 집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 

 

질문자: 누가 계속해서 자기가 집에 있다는 기억해야 한다면, 집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무슨 말씀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라메쉬: 그러죠. 지금 당신이 자기 집에 있다고 하면, 자신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까요? 이미 집에 있는 걸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질문자: 알겠습니다. 

 

라메쉬: 그래서 기억해야만 한다면 이것은 자신이 집에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질문자: 글쎄, 이미 집에 있어도 마음이 생각에 휘말려서 그 사실을 있어버렸는지도 모르죠. 

 

라메쉬: 그러나 자신이 기억해야 한다면 이것은 마음이 당신을 집에서 쫓아냈다는 뜻이지요. 사실 당신을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언제나 이 마음이예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절대 집을 터난 적이 없어요. 

 

질문자: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집에서 떠나있다고 느끼는 걸요. 

 

라메쉬: 물론 그래요. 그렇기에 자신이 늘 집에 있다는 느낌이 일어나거나 이같은 확신이 생기면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자신은 집을 떠난 적이 절대 없다는 확신이 생길 겁니다. 이러면 집에 있다고 기억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래서 "그냥 있으라."라고 하는 말은 의미가 제한적입니다. 그래서 "그냥 있으라."라는 말을 계속 생각해야한다면 "누구 보고 있으라고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늘 들 겁니다. 

 

질문자: 아니면, "어떻게 하라는 거지?"라는 의문이 생기겠죠. 

 

라메쉬: 그렇죠. "어떻게 하라는 거지?"가 정확히 마음이 계속해서 묻는 질문이예요.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죠. 

 

4장. 마음

-- 생각하는 마음과 일하는 마음 -- 

질문자: 선생님께서 예전에 즈나니(깨달음이 일어난 현자를 가르키는 산스크리트어로, 자신의 본성을 아는 지식을 일컽는 즈나나를 깨우친 사람이란 뜻이다-옮긴이)에게 조차도 몸-마음 구조체와 동일시하는 제한적이기는 하나 정체성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런 정체성에 우리가 "의지"라고 부르는 의식이 조금이라도 있나요? 

 

라메쉬: 전혀 없어요. 사실, 바로 이런 개인적인 의지가 즈나니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질문자: 그러면 몸-마음의 구조체가 기능하는데 필요한 기능적인, 비개별적인 의지는 있나요? 

 

라메쉬: 바로 이런 점을 설명하는데 편리한 개념을 찾은 것이 있는데, 마음을 관념적으로 일하는 마음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예요. 생각하는 마음은 개념화하는 마음인데, 바로 그 "나"를 말합니다. 깨달음이 일어난 후에는 자신과 그이외의 모든 것을 구분짓는 "나", 즉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요. 개념화하는 생각하는 마음, 즉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두려움과 희망, 야망을 떠올리는 마음, 바로 이것이 없어요. 일하는 마음만 남아요. 

 

질문자: 그러면 일하는 마음에게는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일련의 "윤리" 따위가 없겠군요? 마땅히 좋은 말이 없으니 "윤리"라고 하겠습니다. 

 

라메쉬: 없지요. 일하는 마음은 당장 일어나는 일과 하고 있는 일만 신경씁니다. 

 

질문자: 일하는 마음은 차별도 하지 않고 좋거나 싫다고 판단하지도 않는군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질문자: 참의식이 선생님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군요.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실 때 생각하는 과정을 거치십니까? 

 

라메쉬: 아니요. 

 

질문자: 말이 그냥 술술 나온다고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질문자: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일하는 마음이 말을 하는 거지요? 

 

라메쉬: 바로 그렇습니다. 

 

질문자: 지금 제가 말할 때는 사전에 무슨 말을 할지 어느정도 그려봅니다. 여러 기억을 떠올리면서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해요. 선생님은 전혀 이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씀이네요? 

 

라메쉬: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침묵하는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군요? 침묵하는 마음이 저절로 말하고 있는 겁니까? 

 

라메쉬: 그래요. 일하는 마음이라고 하지요. 침묵하는 마음은 생각하는 마음이 없을 때 있습니다. 이것이 침묵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일하는 마음은 계속 일을 해야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몸-마음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문제를 만드는 것은 생각하는 마음이예요. 일하는 마음이 자기 일을 하고 있으면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와서 간섭하고 방해해요. 생각하는 마음은 "이거 제대로 하고 있는 거야? 좀 더 좋은 방법이 없나? 실패하면 어쩌지? 이러다 직장을 잃을 거야." 등등의 말을 해댑니다. 그래서 이런 온갖 생각하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간섭하고 걱정하게 만들면서 일하는 마음이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없게 만들어요. 나는 그냥 일만 열심히 할 수 있을 뿐이고 결과는 내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확신이 있으면 생각하는 마음은 서서히 쫓겨나게 되고 일하는 마음이 온전히 자리를 잡으면서 생각하는 마음의 방해 없이 멋지게 자신의 일을 해나갑니다. 그리고 일하는 마음이 이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긴장이 거의 없고 일이 얼마나 빨리 끝났는지를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것은 오로지 생각하는 마음이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이런 사실을 이해하면 생각하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방해하지 못하게 됩니다. 

 

질문자: 그런데 생각하는 마음은 참 끈질깁니다. 저를 계속 괴롭힙니다. 비록 제가 생각하는 마음과 일하는 마음을 구별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방해가 돼서 생각하는 마음을 멈추고 싶지만, 멈추지를 않아요. 

 

라메쉬: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질문자: 생각하는 마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라메쉬: 아, 보세요. '어떻게'라? (웃음) '어떻게' 생각하는 마음을 멈출수 있냐고요? '어떻게' 깨달음을 얻냐고요? 

 

질문자: 둘 중에 뭐라도 좋습니다. (웃음) 

 

라메쉬: 궁극적으로, 참의식이 궁극적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기로 되어있는 이런 영적 여정이 어느정도에 이르렀는지는 한 특정한 몸-마음 유기체를 통해서 일어나는 과정이 어느정도까지 진행되었는지에 달려있어요. 한 발자국도 뒤처지는 일이 없고 한 발자국도 앞서는 일이 없습니다. 

 

질문자: 선생님께서도 생각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수학 문제를 풀어야한다면 어떨까요? 

 

라메쉬: 그것은 일하는 마음이지요. 제가 비행기를 타야한다면 일하는 마음이 "비행기가 몇시에 출발하니까 공항에 몇시까지 가야겠다. 그럴려면 집에서 몇시에 나가야겠다."라고 계획을 해요. 이렇게 계획을 해야하지요. 이것은 일하는 마음이 하는 일이예요. 

 

질문자: 그럼 생각하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라메쉬: 생각하는 마음은 걱정을 만들어내는 마음입니다. 생각하는 마음은 불안하게 만드는 마음이예요. 생각하는 마음은 일하고 있을 때 "잘 되어 가고 있나? 나는 괜찮겠지? 이렇게하면 진급할 수 있을까? 이렇게 해서 이익일까? 손해일까?"라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간섭하는 마음이지요. 

 

질문자: 온통 반복해서 재잘되는 것이군요. 

 

라메쉬: 생각하는 마음이 재잘거리죠. 하지만 꼭 일을 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정말 뭔가에 집중하고 있다면, 음악을 집중해서 들을 수도 있는데, 이때는 생각하는 마음이 없어요. 이때는 일하는 마음이 장악하고 있지요. 이렇게 두시간이 지나고 나서 시계를 보고 두 시간 동안이나 일했다는데 놀랄 겁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긴장도 없지요. 육체적으로는 좀 있을지 몰라도 일하는 마음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을 때는 압박도 거의 없고 긴장도 거의 없을 겁니다. 

 

질문자: 그럼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은 참의식이군요. 안 그렇습니까? 

 

라메쉬: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질문자: 일하는 마음이 일하는 동안, 생각하는 마음과 일하는 마음 사이의 관계는 어떻나요? 

 

라메쉬: 일하는 마음이 일하는 동안에는 "나"는 전혀 있지 않아요. 그래서 "나"와 일하는 마음 사이에 관계가 일어나지 않아요. "나"도 없고, 관계도 없어요.

 

질문자: 침묵하는 목격같은 건가요? 

 

라메쉬: 아니죠. 침묵하는 목격이란 없습니다. 목격할 것이 있어야지 목격이 일어나지요. 제가 당신과 대화할 때는 말하는 일도, 듣는 일도 모두 일하는 마음이 하고 있을 뿐이예요. "내"가 "당신"에게 말한다든지, "내"가 "당신" 말을 듣는다든지, 하는 생각이 없어요. 오직 듣고 말하는 일하는 마음만 있을 뿐이지요. 

 

질문자: 이 마음 아니면 저 마음, 둘 중에 하나만 일어나는 현상인가요? 생각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일하는 마음도 어느정도 기능을 하나요? 운전할 때처럼요. 비록 제가 생각하는 마음으로 저 혼자 중얼거린다고 해도 일하는 마음이 여전히 운전을 하고 있지 않나요? 

 

라메쉬: 그렇죠. 

 

질문자: 그럼 완전히 둘 중에 오직하나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군요. 

 

라메쉬: 그럼요. 

 

질문자: 그럼 두 마음 다 똑 같이 참전체성의 기능이군요. 

 

라메쉬: 그렇지요. 영적으로 진화해가면서 생각하는 마음은 점점 줄어들고 일하는 마음이 더 주목받습니다. 생각하는 마음, 즉 "나"는 더욱 더 뒤로 물러나게 되고 일하는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해요. 이 모두가 일어나는 영정 진화 과정의 일부지요. 

 

질문자: 하지만 일하는 마음도 저것은 토마토라서 먹을 수 있고 저것은 돌이라서 못 먹는다고 결정하면서 기능적 판단은 하지요. 

 

라메쉬: 맞는 말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일하는 마음도 생각하는 마음이 하는 일을 똑 같이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하는 마음은 과거나 미래를 생각하면서 일합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살며 미래를 그려봅니다. 일하는 마음은 현재의 순간만을 신경써요. 이것은 큰 차이예요. 일하는 마음은 현재하는 일과 관련이 없으면 과거나 미래를 신경쓰지 않아요. 

 

질문자: 알겠습니다만, 일하는 마음도 기억을 이용하는군요. 

 

라메쉬: 물론이죠. 일하는 마음도 일하면서 "저번에 이렇게 해서 잘못됐으니 이번에는 실수를 바로 잡아야겠군."하고 생각하지요. 이것도 여전히 일하는 마음입니다. 일하는 마음도 기억을 이용하지만 어떤 것도 미래에 비추어보지는 않아요. 일하는 마음은 오직 당장 하고 있는 일을 위해서만 기억을 이용합니다.

 

질문자: 그럼 어떤 면에서 보면 동물의 마음이군요. 

 

라메쉬: 그렇게 말해도 되지요. 그럼요. 

 

질문자: 왜냐하면 동물이 그렇게 하지요. 저희가 아는 한 동물은 그런 식으로만 생각해요. 

 

라메쉬: 그래요. 동물은 위험이 있으면 바로 위험을 감지하고 반응해요. 일단 위험이 사라지면 동물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난 어떻게 해야 위험을 피할 수 있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위험이 사라지면 그 일도 끝나지요. 

 

질문자: 몸과 동일시하는 정체성은 생각하는 마음인가요? 

 

라메쉬: 좋은 질문입니다. 정체성과 생각하는 마음을 구별하는 것은 아주 의미있고 중요합니다. 단순히 "나는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구속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예요. 만일 몸과 동일시하면서 주체 행동 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경험자이고 자신이 행위자라고 생각한다면, 이때에 구속되는 겁니다. 몸과 동일시하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되지 않아요. 일하는 마음으로 몸과 동일시하는 것은 꼭 필요해요. 미묘한 관념적인 차이지만, 아주 중요한 차이예요. 

 

질문자: 자아상을 떠올리는 일은 어떻나요? 생각하는 마음에서 오나요? 

 

라메쉬: 물론이지요. 생각하는 마음이 맞아요. 

 

질문자: 일하는 마음은 전혀 아닌가요? 

 

라메쉬: 자아상을 떠올리는 일은 일하는 마음에는 있을 수가 없어요. 

 

질문자: 그럼 제가 누가 불러서 대답하면 이것은 일하는 마음이겠군요? 하지만 제가 제 자신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나서 대답하면 이것은 생각하는 마음이겠군요? 

 

라메쉬: 그래요. 그리고 만일 당신이 뭔가에 정말로 집중하고 있으면 누가 당신을 멍청한 바보라고 불러도 듣지도 못할 겁니다. 

 

질문자: 기독교 서적 중에 '신의 섭리에 따른 자기포기'(Self-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Fr. Jean-Pierre de Caussade 저서 - 옮긴이)와 같은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말도 같은 뜻인가요? 

 

라메쉬: 아주 멋진 표현이군요!! 신의 섭리에 따른 자기포기라! 정확히 그 표현대로 일이 일어납니다. 자기포기는 오직 신의 섭리에 따라서만 일어날 수가 있어요. 누가 한 말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누가 말했는지는 상관 없어요. 멋진 표현입니다. (10jungi)

 

                             - 리쿼만 편집, 김영진 번역<라메쉬 발세카와의 대담, 참의식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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