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15. 22:44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본문]
안선사(安禪師)가 말하였다.
"직심(直心)이 도(道)이다. 왜 그러한가?
직문(直聞), 직념(直念), 직용(直用) 하니 다시는 공(空)을 관하지 아니하고,
또한 방편을 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이가 행도인(行道人)이다.
경에서 이른다.
'직시(直視)함에 견(見)함이 없고, 직문(直聞)함에 들음이 없으며, 직설(直說)함에 번거로움(다툼)이 없다.
[해설]
직심(直心), 직문(直聞), 직념(直念), 직용(直用)은 생각하고, 보고, 듣고, 용(用)하되 마음이 머무름이 없고, 한다고 함이 없으며, 자취가 없고, 동(動)함이 없는 것이다.
이러함은 당념당처의 지각함에서 지각함을 인지할 다른 어떤 것도 없다는 뜻을 알 때 이루어진다.
[본문]
인선사(璘禪師)가 말하였다.
"법성(法性)은 체(體)가 없는 채로 단지 직용(直用)함을 의심치 말라!
경에서 이른다. '일체 모든 것은 본래 무심(無心)하다.
경에서 이른다. '본래 무심(無心)한 까닭에, 심(心)이 여(如 : 평등함, 變異함이 없음, 사량분별을 넘어서 있음,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까닭에 본래 없다.'
경에 이른다. '모든 것이 만약 본래 있었다가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없게 된 것이라면 모든 부처님이 잘못을 범한 것이 된다.' "
[해설]
법성은 체(體)가 없어 무엇을 한다고 함이 없다. 단지 무심하여 걸림없고 머무름 없이 일체처에 두루 용(用)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함을 뚜렷이 알아 의심치 말아야 한다. 그래야 법성에 임운(任運)할 수 있게 되고 억지 수행을 떠난다. 당념 당처 그 자리에 이미 법성, 본심, 진여, 본각, 해탈, 열반이 다 구현되어 있음을 뚜렷이 알아야 하되, 그것이 아직 되지 않으면 우선 믿기라도 해야 한다.
또한 일체 모든 것이 무심하며 무엇을 한다고 함이 없이 한다. 언제부터 있게 되고 나중에 없게 된 것이 아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었던 뜻과 그 자리는 항상하여 결손되거나 증장됨이 없이 당념당처에 여여(如如)하다.
[본문]
홍선사(洪禪師)가 말하였다.
"무릇 여러 거동에 모두 여(如)하다.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들음도 또한 여(如)하다. 내지 일체 모든 것이 또한 여(如)하다.
왜 그러한가? 변이(變異)함이 없는 까닭이다.
눈으로 사물을 보는 때에 눈이 바꾸어진 곳이 없으니 바로 눈이 여(如)하다.
귀로 소리를 듣는 때에 귀 바꾸어진 곳이 없으니 바로 귀가 여(如)하다.
의(意)로 법진(法塵 : 마음에 떠오른 모든 상념)을 인지할 때에 의(意)가 바꾸어진 곳이 없으니 바로 의(意)가 여여하다. 만약 일체 모든 것이 여(如)함을 알았다면 바로 여래(如來)이다.
경에서 이른다. ' 중생이 여(如)하고, 현성(賢聖) 또한 여(如)하며, 일체 모든 것도 또한 여(如)하다.
[본문]
각선사(覺禪師)가 말하였다.
" 만약 마음이 속한 곳 없음을 깨달으면 바로 도의 자취를 얻은 것이다. 왜 그러한가?
눈으로 모든 사물을 보되 눈이 모든 색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성해탈이다.
귀로 모든 소리를 듣는데 귀가 모든 소리에 속하지 않는다.
(내지 의(意)가 모든 것을 두루 인식하는데 의(意)가 모든 것이 속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자성해탈이다."
경에 이른다. '일체 모든 것은 서로 속하지 않는 까닭이다. 마음과 일체 모든 것이 각기 서로 알지 못하는 까닭이다.'
[본문]
범선사(梵禪師)가 말하였다.
"만약 일체법이 모두 하나의 법임을 알았다면 바로 해탈한 것이다. 안(眼)이 법(法)이고, 색(色)도 또한 법(法)이며, 법(法)이 법(法)과 더불어 묶지 않는다. 이(耳)가 법(法)이고, 소리 또한 법이며, 법이 법과 더불어 벗어나지 않는다. 의(意)가 법이고, 경계 또한 법이며, 법이 법과 더불어 죄를 짓지 아니하고, 법이 법고 더불어 복을 짓지 아니하여 자연히 해탈되어 있다.
경에서 이른다. '법을 보지 아니하면서 다시 법과 더불어 묶는다. 또한 법을 보지 아니하면서 다시 법과 더불어 벗어난다."
[해설]
일체 모든 것이 지(知)함이 없고, 견(見)함이 없으며, 분별함이 없다.
그래서 서로 묶는 것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 법을 견(見)함에 묶이었다가, 견(見)하지 않음에 벗어난다. 그래서 해탈은 법의 성품대로 일체법에서 견(見)함이 없으면 바로 이루어진다. 또한 본래 서로 봄이 없어 항상 해탈이 구현되어 있다.
[본문]
도지(道志)법사가 말하였다.
"일체 모든 것이 걸림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일체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바로 걸림이 없는 것이다."
[본문]
원적니(圓寂尼)가 말하였다.
"일체 모든 것이 대(對)함이 없음이 바로 자성해탈(自性解脫)이다. 왜 그러한가?
눈이 사물을 보는 때에 보지 않음이 없고, 내지 의식이 인지함에 인지하지 않음이 없다. 인지하지 않을 때에는 인지함이 없다. 내지 미혹한 때에는 알지 못하고, 아는 때에는 미혹이 없다.
꿈꾸는 때에는 깨어있음이 없고, 깨어 있을 때에는 꿈이 없다.
까닭에 경에서 이른다. '대중이 아촉불을 본 후에 다시는 불(佛)을 보지 못하였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일체 모든 것이 눈과 귀와 더불어 대(對)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법이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이 법을 지(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에 이른다. '색(色)으로 인하여 식(識)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를 이름하여 <色을 보지 않음>이라 한다.
[해설]
모든 것이 대(對)함이 없다는 것은 상대되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깨어있을 때는 꿈이 없는 것과 같이 영향을 줄 상대가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본래 다른 것에 영향을 받을 바 없어 해탈되어 있다.
아촉불을 보았다고 깨닫고 나서는 이제 견(見)하는 바가 없게 되었다.
무엇을 견(見)하는 바가 없는 자리가 된 것이다.
깨닫지 못하였을 때는 견(見)함이 있으나 깨닫고 나면 견(見)함이 없이 견(見)한다.
견(見)함이 없는 본성을 떠나지 아니하고 견(見)하는 까닭이다.
견(見) 함이 없이 견(見)하고, 분별함 없이 분별함은 식(識)이 아니라 각(覺)이다.
각(覺)은 능(能;주관)과 소(所; 객관)로 된 식(識)을 벗어나 몸으로 각(覺)되는 자리이다.
이 자리는 심행(心行)이 멸하였으며, 말의 길이 끊어졌다.
그래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한다.
-담림 편집,박건주 역주 <보리달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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