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탐구 실제 수행 방법 및 이론 종합 정리(15)

2020. 9. 9. 22:29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스리 라마나의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현상계의 토대가 되는 유일한 실재에 관한 것으로, 

그 실재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이자 본체이고 본질이며, 누구나 그 실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리 라마나는 유일한 실재를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그렇게 한 이유는 실재가 여럿이거나 실재를 여럿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동일한 하나의 실재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가 유일한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한 용어와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1. 참자아(The Self, 아트만,眞我) : 스리 라마나가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그는 개체로서의 인간이 감각적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나'라는 생각은 에고일 뿐 참나가 아니며, 

개체를 넘어선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각성(覺醒)이 '참나'이며 주인공이라고 한다. 

주인공과 개체적인 자아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스리 라마나의 가르침에 따르면 개체적 자아란 마음이 만들어 낸 환상으로, 본질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만들어 낸 이 개체적 자아라는 환상, 즉 에고가 참자아를 체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참자아는 항상 현존하며 언제나 경험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참자아의 실재를 의식적으로 자각하기 위해서는 에고의 울타리에 자기를 한정짓는 마음의 경향성(傾向性)이 소멸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스리 라마나는 지속적이고 영원한 참자아를 각성하는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했다. 

 

2. 사트 치트 아난다(Sat-chit-annanda) : 존재(存在)-의식(意識)-지복(至福)으로 번역되는 이 산스크리트어는 참자아의 세 측면이다. 스리 라마나는 이렇게 가르쳤다.

참자아만이 실재한다. '이게 나다', 또는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다'라는 느낌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궁극적인 실재인 '참나'에 대한 순수한 각성만 남는다. 이 상태에서는 보는 자(주체)와 보이는 대상(객체)의 구별이 사라지고, 오직 '참나'를 각성하고 있는 순수한 의식만 존재한다. 그래서 참자아는 궁극적인 존재(sat)이자 순수의식(chit)이다. 

또 참자아를 직접 체험하는 상태는 지극한 행복 속에 잠기는 상태이기 때문에 지복(ananda)이기도 하다. 

존재,의식,지복이라는 참자아의 세 측면은 따로따로 분리된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통합된 전체로 체험된다. 

이는 마치, 축축함과 투명성과 유동성이라는 물의 세 가지 특성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3. 신(God) : 스리 라마나는, 이 우주는 참자아의 힘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한다. 유신론자들은 보통 우주를 유지하는 힘을 신의 힘으로 보기 때문에, 스리 라마나는 그들의 이해에 맞추기 위해 참자아와 동의어로 신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는 힌두교에서 궁극적인 존재를 일컫는 브라흐만이나 지고한 신을 가리키는 시바라는 이름도 가끔 같은 맥락에서 사용했다. 그가 말하는 신은 인간이 규정한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우주를 유지하고 있는 형태 없는 존재를 가리킨다. 스리 라마나가 말하는 신은, 인간이 도구를 만들듯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그런 식의 창조자가 아니다. 우주란 신의 본래적인 힘이 나타난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이 우주에서 신을 분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주가 나타나든 사라지든 신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4. 가슴(The Heart) : 스리 라마나는 참자아에 대해 얘기할 때 '흐리다얌(hridayam)' 이라는 산스크리트어 낱말을 자주 사용했다. 이 말은 보통 '가슴'이라고 번역되지만, 문자적으로는 '이것이 중심' 이라는 뜻에 가깝다. 그는 참자아가 깃들어 있는 특정한 자리나 참자아의 중심이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참자아야말로 삼라만상이 현현(顯現)하는 원천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5. 즈나나(Jnana) : 스리 라마나는 참자아의 각성상태를 때로는 '즈냐나(냐나), 즉 '앎'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참자아를 아는 주체가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참자아의 각성상태에서는 아는 주체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알려지는 대상으로서의 참자아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한 앎, 곧 즈나나 상태는 경험의 대상이 아니요,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즈나나란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는 상태  속에서 유일한 실재를 직접적으로 선연하게 각성하는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 뿌린 내린 사람을 즈나니(Jnani,실제 발음은 '냐니') 라고 한다. 

 

6. 뚜리야(Turiya)와 뚜리아티타(Turiyatita) : 힌두 철학은, 인간의 의식은 깨어있는 상태, 꿈꾸는 상태, 깊히 잠든 사이를 번갈아 오간다고 말한다. 스리 라마나는 이런 일시적인 세 가지 의식상태가 나타나도록 하는 근본적인 실재가 곧 참자아라고 한다. 참자아라는 토대 위에서 이런 저런 의식수준이 전개된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스리 라마나는 참자아를 뚜리아 아바스타(turiya avastha), 또는 '네 번째 상태'라고 했다. 그는 또 이 네 가지 의식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식상태를 포괄하는 오직 하나의 초월적인 의식상태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네번재를 넘어선 상태'라는 뜻의 '뚜리아티타(turiyatita)라는 용어도 빈번하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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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 무엇이 실재(實在)입니까?

 

답 : 항상 존재하는 것이 실재이다.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지만, 모든 형태와 이름의 토대가 되는 것이 실재이다. 그것은 제한되어 있는 것들의 뿌리이지만, 실제로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의 배후에 스스로 있다. 실재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다. 그것은 언어를 초월해 있다. '존재'니 '비존재'니 하는 등의 표현조차도 실재를 설명하는 말로는 적합하지 않다. 

실재란 주객이 분리된 상태로 대상을 인식하는 행위와 무지(無知)가 소멸된 뒤에 남아 있는 순수한 의식이며, 그것이 참자아(아트만)이다. 참자아의 각성 상태 속에는 무지(無知)의 흔적조차 없다. 

충만한 실재 속에서는 불행도 없고, 몸도 없다. 그러한 세계를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실재야말로 그대의 진정한 형태요 본성이다. 참자아의 각성상태에서 발산하는 의식의 빛은 내면 세계와 현상계를 두루 비춘다. 지복감으로 충만한 이 빛이 그대의 근원적인 실재이다. 근원적인 실재가 외적으로 나타난 모습이 침묵인데, 깨달은 사람들은 침묵을 진정한 앎(즈나나)의 최종적인 형태라고 말한다. 이런 침묵은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다. 

즈나나만이 집착에서 자유롭고, 즈나나만이 순수하며, 즈나나만이 신의 상태에 머문다. 참자아의 각성상태에서 한 순간도 벗어나지 않고, 즈나나만이 영원하며, 즈나나만이 실재하는 모든 것이다. 

 

문 :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또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합니까? 

 

답 : 그대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그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 자신이 깨달음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거나 키워 나갈 필요가 없다. 그대는 단지 그대의 참자아가 아닌 것들을 그대라고 생각하는 오해만 버리면 된다. 그러면 순수한 깨달음만이 남으며, 그것이 바로 그대의 참자아이다. 

 

                                                      - 데이비드 갓맨 편집, 정창영 옮김 <있는 그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