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19. 23:40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 [본 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 관련 게시물은 전에도 언젠가 몇번이고 중복적으로 게재한 내용일수도 있지만, 자아탐구를 공부하는 구도자들에게는 반복해서 숙지해야 할 중요한 내용들이므로, 이미 전에 게재했다는 사실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몇번이고 중복해서 게재해서 자아탐구를 공부를 하는 구도자들에게 저절로 머리 속에 숙지가 되도록,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이미 뻔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지만, 앞으로도 여러번 반복 게재할 수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무한진인-]
이 '나'는 무엇인가? 바꾸어 말해서,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모두 보편적으로 '나 --, 나 ---'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게 말할 때 우리가 가리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 왜인가?
'나'라고 말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몸에 붙혀진 하나의 이름 아닌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이름을 그 특정인의 이름으로 여긴다.
만일 그 사람에게 "당신은 누구요?" 라고 물으면,그는 "나는 라마요"라고 대답한다.
어떤 사람이 "라마야 "라고 부르면 그 사람만 돌아다 볼 것이다.
다른 몸들은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몸만 라마로 여길 것이다.
따라서 그 이름은 그 몸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이 그 몸이라고 믿기 때문에, 자신은 라마이지 다른 누구도 아니라고 느낀다.
우리가 마치 자신이 이 몸일 뿐인 양 행동하는 경우가 그 밖에도 많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이 몸이 '나'라고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의 손을 가리키며 "이것은 무엇이요"라고 물으면
"이것은 내 손이오"라는 대답이 금방 나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의 몸의 각 부분에 대해 물어보면,
그는 "이것은 내 다리요, 이것은 내 배요, 이것은 내 가슴이요, 이것은 내 등이요, 이것은 내 머리요"라는 식으로 말한다. 그래서 그는 궁극적으로 "이 전체 몸은 내 것이오"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가 그것을 자기 몸이라고 말할 때, 이제 그 몸은 그의 한 소유물에 불과하다는 것,
즉 그는 몸이라는 한 소유물의 소유자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그가 자신의 소유물인 그 몸일 수 있겠는가?
그는 그것의 소유자 아닌가?
만일 그에게 다시 "만일 이 몸이 당신의 소유물일 뿐이라면, 그 소유자인 당신은 누구요? 당신이 이 몸일 수 있소?
어떻게 소유물이 바로 그것의 소유자일 수 있소?" 라고 물으면,
그는 이제 자신이 그 몸은 아니고, 몸은 자신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불과 조금 전에 그 몸이 가진 이름으로 불렀을 때 "나는 실로 이 몸이오."라고 선언했던 바로 그 사람이,
이제 스스로 "나는 이 몸이 아니고, 그것은 내 소유물이오"라고 시인한다.
같은 방식으로 그는 자신의 마음을 가리켜 "내 생각들은 이와 같소. 내 마음은 그와 같소."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가 어떻게 자신의 소유물에 불과한 그 마음이나 몸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누구도 아직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자신이 그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있고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도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여전히 의심을 품고 있는 인간이, 세계 안의 멀리 있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려고 열심히 애를 쓰고 있다.
이보다 더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
그 자신에 대한 앎조차 미혹과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으니, 다른 온갖 것들(세계와 신)에 대해 자신이 마음을 가지고 공부하거나, 듣거나, 경험하여 습득한 그의 앎 또한 의문 투성이라고 해서 놀랄 것이 있겠는가?
자신이 끼고 있는 안경의 색깔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색안경을 통해서 보는 다른 것들의 올바른 색깔을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이 배우고, 부유하고, 권력이 있다 하더라도,
만일 그 사람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앎이 없다면,
그의 모든 학식, 위대함, 권력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
그래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제1과는 우리 자신의 자아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하는 탐구를 추구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위에서 한 조사를 통해 자신이 이 지각력 없는 몸일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나'의 참된 성품을 올바르게 알지는 못하므로 여전히 '나'가 몸, 오관, 마음, 생각의 총합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나'가 무엇인지를 , 조금의 의문이나 그릇된 동일시 없이 -- 즉, 어느 하나를 다른 것으로 착각함이 없이 --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자신이 살덩어리에 불과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충분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몸이 조용히 누워있을 때도 계속되는 호흡과 혈액 순환의 과정을 관찰해 보고 나서, 생기가 '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것을 '나가 아닌'것으로 판정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시험 기준이 있는가? 그렇다, 있다 !
그 시험기준이란, '그 특정한 것이 없을 때도 우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
우리는 이 시험 기준을 사용하여, 바로 우리의 탐구가 끝나는 곳까지 성공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몸이다'라는 그릇된 동일시 자체가 마음, 지성, 원습의 저장고, 에고, 무지, 공(空), 마야 등 모든 것이다.
생기(生氣)는 이 마음의 거친 형상이고, 그래서 그것이 곧 육신이다 !
마음도 하나의 몸이지만, 그것은 미세한 몸이다.
생기는 마음보다 조금 더 거친 것이다.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은 생기보다도 더 거친 것이다.
더 미세한 형상인 그 미세한 마음은 그 자체 원습, 혹은 무지의 어둠이다.
마음의 이 모든 형상들을 세 가지 범주, 즉 조대신(粗大身,거친 몸), 미세신(微細身, 미세한 몸), 원인신(原因身, 원인적인 몸)으로 분류해 보자.
마음이 오관을 통해 인식하는 모든 거친 형상들 - 몸, 혈액순환, 호흡 - 이 조대신을 구성한다.
이는 이 모든 것을 마음, 곧 우리의 분류에서 두 번째 범주인 미세신이 분명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경전에서는 보통 생기의 껍질을 미세신의 범주에 넣지만,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조대신의 범주에 넣었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것을 마음 아닌 하나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시험기준을 적용하는데 있어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다섯껍질 전부는 결국 '나 아닌 것'(비진아)으로서 버려질 터이므로, 조금이나마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도 그것이 그 두 몸 중의 여느 하나와 함께 포함되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위에서 말한 간단한 시험기준을 사용하여 우리가 이 조대신인지를 살펴 보자.
깊은 잠 속에서는 우리가 이 조대신을 의식하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추론하는가?
우리는 이 살덩어리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음이 명백하지 않은가?
어떤 사람들은 스리 바가반과 이렇게 논쟁하곤 했다.
"몸은 깊은 잠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깊은 잠이 든 사람은 그 몸의 존재나 호흡과 혈액순환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깨어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지각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분인 스리 바가반의 판정은 이와 사뭇 반대된다.
당신에 따르면 " 깊은 잠 속에서는 몸과 세계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 자신의 존재인 '내가 있다'는 모든 사람이 경험한다." 화면, 즉 몸과 세계는 마음이 일어날 때만 일어나고, 마음이 존재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마음이 저물면 사라진다. 그러니 마음과 별개의 어떤 세계가 있는가?
소우주가 곧 대우주이므로 몸이 곧 세계이다. 몸이 없으면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몸에서 투사된다.
그래서 스리 바가반은 <실재40송 제5연에서> "몸이 없이 세계를 본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요컨대 세간 범부들의 논변은 "몸과 세계는 잠속에서도 존재하는 반면, '내가 있다'는 의식은 모두가 경험한다. "
그런데, 몸이 깊은 잠 속에서도 존재한다면 세계도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몸이 존재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깊은 잠 속에서는 몸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세계가 깊은 잠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따라서 깊은 잠 속에서는 몸과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스리 바가반의 판정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자.
우리가 어떤 사물이 존재한다고 말하면, 그 존재성은 의식과 결부되어야 한다.
즉, 그 사물 자체가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존재성을 알거나 자신의 존재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른 어떤 사물의 증거나 도움을 필요로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존재와 존재함에 대한 앎(즉, 존재와 의식)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sat)를 아는, 존재 그 자체 아닌 어떤 의식(chit)도 없다네.
따라서 존재가 곧 의식이라네 (---) ----우빠데사 운디야르 제 23연-
그래서 존재가 없는 의식은 전혀 의식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의식이 없는 존재는 전혀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을 잤다는 앎은 잠을 잘 때 우리가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잠을 잤는지 안 잤는지를 알기 위해 남들에게 물어봐야 하는가?
우리가 잠을 잤다는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 뿐이니,
바로 이 앎이 우리가 깊은 잠 속에서도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깊은 잠 속에서의 우리의 존재와 의식은 이처럼 부인할 수 없는데,
만일 몸과 세계도 그러한 부인할 수 없는 존재성과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왜 그것들(몸과 세계)이 깊은 잠 속에서 존재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남들의 증언을 필요로 하는가?
깊은 잠을 자는 동안 몸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남들이 증언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존재는 자명하지 않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는 의식이 없는 존재는 전혀 존재가 아님을 증명했으므로,
그리고 깊은 잠 속에서 몸과 세계가 존재한다는 앎은 자명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그것들의 존재가 거짓이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깊은 잠 속에서는 몸과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자.
이와 같이 누구도 잠 속에서 자신이 존재한 것을 부인하지 못하므로,
잠 속에서 우리 자신은 존재하고,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
-스리 사두 옴 지음, 대성 옮김 <스리 라마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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