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神)임을 확신하면, 실제로 나는 하나님이 된다.

2020. 7. 16. 23:25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진아 깨달음이란 자신의 진아가 곧 브라만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브라만은 이 우주의 창조주이며, "내가 브라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우주의 창조주,유지주,파괴주 이다 "라는 깨달음이 있다. 

이제 웃다바는 크리슈나가 되었다. 

목동이 왕이 되면 목동으로서의 역활이 끝난다. 

 

웃다바가 크리슈나가 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쇠가 금이 된 것이다. 구도자가 브라만이 되었다. 

브라만의 힘 전부를 이제 그가 가지게 되었다. 

구도자가 브람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전 우주가 그 자신이다. 

그는 전 세계에 퍼져있는 물이 되었다.

그는 우주 안의 빛이 되었다. 

그는 전 우주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바람이다. 

그는 그 안에 너무나 많은 광대한 우주들을 지닌 만물에 편재하는 허공이 되었다. 

그는 지각의 의식, 곧 깨달음의 힘, 앎의 성질, 생명 기운 그 자체가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는 만물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내적 유희에 지쳐버린 5대 원소의 세계가 사라진 뒤에, 

평화로운 존재로써 남아 있는 '홀로 있음' 이다

그는 브라만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하여 구도자가 브라만이 된 것이다. 

 

그는 우주의 모든 활동을 한군데 섞고 결합함으로써 혼자서 우주의 모든 작용을 떠맡아 왔는데, 

이제는 홀로인 채 자기 자신에 대한 헌가 찬송을 하고 있다. 

헌신의 증거를 알게 되었고, 영적인 공부의 이익을 알게 되었고, 

그것의 열매들도 모두 알게 되었다. 

 

사람이 참으로 자유로울 때는, 

해탈 후의 헌신이 그런 해탈자의 행동이다. 

헌신자로서 산다는 것은 신과의 단일성 속에서 사는 것이다. 

웃다바는 이런 사실을 이해했다. 

그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개아가 시바가 된 지복은 한량이 없다. 

브라만과 하나가 된 가장 높은 환희가 있었다. 

그는 브라만이 되어 있었고, 브라만의 힘을 발휘했다. 

그는 전능한 빠라마트만이 된 것이다. 

 

주 크리슈나는 웃다바에게 신의 화현이 되는 능력을 하나의 장식품으로 주었다.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온갖 장신구로 장식하듯이, 

혹은 왕이 즉위하면 권력 뿐 아니라 왕실의 장식품까지 받는 것처럼 말이다. 

이 은택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믿음에 달려있다. 

 

자신이 브라만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마치 모두의 지배자나 전 세계의 창조주인 것 같은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개념에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만일 그가 특정방향을 동쪽이라고 결정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 

자유를 얻고 나서도 속박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잘못된 개념이다. 

 

주 크리슈나는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브라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상태의 창조자이자 향유자이다. 

그럴 때 비로소 그는 그 힘을 휘두를 수 있고, 

그럴 때 비로소 화현력을 줄 수가 있다. 

 

웃다바가 얻은 싯디는 실은 가장 불가사의한 형태이며,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지성으로도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개념에 따라 그 의미를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설사 어떤 사람이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을 성취한다 해도, 

그리고 스승이 그 가르침을 주었다 해도, 원래의 결함은 남아 있다. 

 

브라만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원래의 결함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는가? 

다들 이것이나 저것을 하고 싶어하고, 그러다가 혼란에 빠지고 손해를 본다. 

그들은 브라만의 상태와 힘 속에 있기 보다는 자신이 한정된 개아라는 느낌에 사로잡혀있다. 

여러분이 본래부터 거기에 존재하는 그 상태로 머물러라. 

브라만의 상태를 성취하면 그 상태에 머물러야 한다. 

개아라는 느낌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체험을 갖지만, 

모두가 자신의 개념에 따라서 체험한다. 

그러나 화현의 상태는 모두가 아는 것이 아니다. 

베다에 통달한 학자들은 그것을 몰랐다. 

주 크리슈나는 그 가르침을 웃다바에게 주었다. 

그대들도 그것을 알아서 그 이익을 얻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브라만을 깨달으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즐겨야 합니까?"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해탈 후의 헌신이 신의 화현력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브라만이다. 이 세상의 모든 행위는 브라만일 뿐이다. 

이전에는 한 사람, '나'라는 상상된 존재가 있었다. 

이제 베단타의 가르침을 듣고서 그 상상의 한 사람이 사라졌다. 

그는 상상에서 나온 것에 불과않지만, 그 동안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왔다. 

자신을 '나'라고 부르던 그 개아가 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사라졋다. 

이 모든 것, 일체가 아무 의심할 바 없이 브라만일 뿐이다. 

 

백만에서 하나를 없애면 얼마가 남는가?

하나도 남지 않고, 세는 것이 그친다. 無(제로)만 남는다. 

(註 : '하나(1)'은 모든 수의 출발점이고 다른 수들이 그 위에 집적되는 토대이므로, 이 '하나'가 없어지면 모든 수가 근거를 잃고 사라진다는 뜻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세어야 하나?

하나를 세면 많은 것을 세어야 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해 누가 자부심을 갖게는가?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이 시바이다. 

그는 일어나고, 걸어 다니고, 무엇을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가 시바다. 

내적인 깨달음에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다. 

본래 그것은 아무 이름도 없었으나, 

내적인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 우리가 거기에 어떤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것을 표현하려면 수십만 가지 이름을 붙여줄 필요가 있지만, 

그 내적 환희는 있는 그대로이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 즐김, 즐김의 대상, 즐기는 자는 모두가 오직 시바(신)일 뿐이다. 

이것이 환희의 상태이다. 이것이 어떻게 있는지 이해해야 한다. 

 

보통의 수행 방식과 의식을 받아들여 매일 사원에 가서 사원 안에 있는 시바의 상(像,시바링감)에 제물을 올리던 한 헌신자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신에게 올렸던 신성한 음식을 사원 근처의 사람들과 여러 애완 동물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일부는 가져가서 가족 친척에게 나눠주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조금 먹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매일 마하데바(시바)를 숭배하고 음식을 올렸다. 

한번은 그가 사원에 갔더니 낯선 사람이 시바의 링감 옆에 앉아 있었다. 

황색 승복을 입고, 긴 수염과 길게 자란 머리를 하고 있었으며,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 사람 앞에 오체투지하고, 자신이 아는 대로 무슨 기도를 했다. 

이 헌신자는 그 사람이 그 찬사에 흡족해 했으리라고 확신했고, 

더 나아가 그 기도에 그토록 흡족해 하는 그 사람이 바로 마하데바 자신임에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자신이 신께 바쳤던 음식을 받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 사람은 허락하고 헌신자가 청하는대로 음식을 먹었다. 

헌신자는 그 사람이 시바 신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링감에 그렇게 가까운 데서 음식을 먹고 있고, 음식 부스러기가 접시 밖으로 떨어지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식사를 끝내자 헌신자에게 나머지는 모아서 달라고 했다. 

그는 그 사람이 이미 맛본 음식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은 음식을 모아 주었다. 

그 사람은 헌신자에게 축복을 주면서 말했다. 

"당신의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오. 이제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이곳을 떠나 가시오." 

그 말에 따라 헌신자는 집으로 가면서 도중에 그 얼마 안되는 음식을 남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중에 사원에 있던 그 사람도 다른 데로 가 버렸다. 

이제 이 헌신자와 신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 신은 한 인간이었고, 그 헌신자도 한 인간이었으며, 둘 다 남자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내적인 차이는 하늘과 지하 세계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더 벌어져 있다. 

평범하게 보면 둘 다 인간이다. 

그러나 사원 안에 있던 사람의 진아 확신은 완전하고 전체적이지만, 

그 헌신자의 진아 획신은 불완전하다. 

저 사람의 진아확신은 이 사람의 진아 확신이 불완전한 만큼이나 완전하다. 

그러나 그 헌신자는 진아 확신이 부족한 탓에 자신의 몸과 살갛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반면, 

사원 안에 있던 그  수연이 긴 사람은 영성, 지성, 진아 깨달음이라는 큰 재산이 그에게 완전히 배어 있었다. 

동일시 혹은 자부심은 사람이 신체적 의식, 곧 육체의식을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참된 성품은 동일한데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일시적인 경험을 갖는 사멸할 개아이고, 

또 한 사람은 늘 완전하고 파괴 불가능한 전체적인 지복이다. 

이것이 참스승의 가르침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의 효과이다. 

 

사람들은 '그것'의 상태를 성취해도 "내가 신이다"라고 말하기를 쑥스러워한다. 

역시 완전히 깨달았지만 자신이 구도자일 뿐이라는 관념에 머물러 있던 많은 헌신자들이 있었다. 

주 크리슈나 만이 "나는 신들의 신이다." 라고 말했다. 

그 현자들과 주 크리슈나의 실질적 차이점은 무엇인가? 

 

주 라마가 자기 아내 시따를 무릎에 앉힌 채 앉아 있었는데, 아무도 그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주 라마도 구도자의 상태를 넘어서 있었고, 싯다도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는 의식이 그 분리성을 상실한 상태, 

즉, 전 세계에 신이 편재해 있고 일체가 진아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있는 상태에 도달했다. 

그래서 그가 모든 행위를 더없이 자연스럽게, 쉽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구도자일 뿐이라는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행위의 온전한 수행은 물론이고, 

행위의 포기를 성취하지 못하는 것은 왜인가? 

전체적 지복감이 없고, 실재에 대한 완전한 진아확신이 없는 것이 원인이다. 

그들은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물리칠지 결정할 수 없고, 

그래서 행위에 대한 자부심이 남아 있는 것이다. 

 

스리 라마가 행위와 자신을 동일시한 것은 브라만의 성품을 지녔고,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시따를 무릎에 앉히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그릇이 못 된다. 스리 라마는 환(幻,마야)을 이겼다. 

그가 말했다. " 나는 신이다. 일체가 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난다. 그러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겠는가? "  

환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그 환을 스리 라마가 통제했다. 

그는 그녀(마야)를 자신의 머리에서 무릎으로 옮겨두고 있었다 

(註:마야는 신의 창조력 샥띠와 같다. 따라서 비슈누의 배우자인 략슈미나 시바의 배우자 빠르바띠와도 (마야와) 동일시 된다.) 

그는 "이 마야는 내 하인이다. 모두가 나의 헌신자다. 모두가 나를 숭배한다. 나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나는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다. 나는 늘 완전하여 불멸이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힘을 가진 진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 

 

                                               - Master of Self- Realiz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