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명 스님의 <중도 이야기>

2020. 3. 27. 10:15성인들 가르침/현대선지식들법문

저는 스물 한 살에 출가해 스물여덟 살 때 해인사에 머물렀습니다. 

그해 가을 성철스님께서 해인사에 계셔서 백연암에 올라가 인사드리고 물었습니다. 

"스님, 대승비설불(大乘非說佛)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출가하여 부처님의 모습을 그리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대승경전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읽었던 대승경전이 부처님 경전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승경전은 사후에 사람들이 만든 가짜라고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때가 스물다섯 살 때입니다.

너무 충격이었습니다. 사기당한 느낌이었습니다. 

중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되나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삼 년이 흘러 나 자신을 설득하고 마음이 가라앉아 정리되었지만, 

그 의혹의 뿌리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성철 스님이 와 계신다고 해서 물으려 간 것입니다. 


성철스님은 연세가 나보다 스물일곱 살 많았으니, 그 당시 쉰다섯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이미 유명했습니다. 박학다식했습니다. 

따라서 내가 던진 질문은 제격이었습니다. 

나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준비한 듯 말했습니다. 

그 분은 누가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성철스님은 "그게 말이제 - - -, 맞기는 맞는데 말이제 - - "하시면서 답해 주셨습니다. 

핵심을 간추려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승 경전이 부처님 친설(親說)이 아닌 것은 맞지만, 부처님 사상이 아니라는 것은 틀렸다. 

부처님 친설이라는 초기 경전의 가르침의 핵심은 중도(中道)이다."


부처님 최초 법문이라고 하는 소위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의 법문이 가장 먼저 설해졌다고 하는데, 그걸 설하시기기 전에 부처님이 천명하신 게 있습니다. 

'나는 고(苦)와 낙(樂)의 양변(兩邊)을 여의고 중도로써 정각을 성취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첫마디 부터 중도를 강조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사제 법문에 일관되는 것도 그 의미는 중도사상입니다. 

대승경전 가운데서도 백미라고 하는 <법화경> <화엄경> 같은 경전의 중심사상도 바로 중도입니다. 

대승 경전이 비록 부처님 친설이 아니지만 설하시는 바 그 중심 내용이 초기 경전에서 말하는 중도를 벗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도를 부연하고 더 깊히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불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중도를 처음 논한 것은 용수 보살의 <중론>입니다. 

중도란 양변을 여읜 것입니다. 양변이란 영쪽 가(가장자리,극단)를 말합니다. 

동쪽도 변(邊)이요, 서쪽도 변입니다. 옳다도 변이요, 틀리다도 변입니다. 

그러면 중간은 변이 아닌가? 그건 아닙니다. 

중간도 변이고, 차별하는 것도 변입니다. 중도는 양변을 떠난 것입니다. 

차별없는 것이 중도입니다. 


양변에 관한 대표적인 설명으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거론합니다.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유(不有), 불무(不無), 불거(不去), 불래(不來), 불고(不苦), 불락(不樂)을 말합니다. 

고(苦)도 하나의 변이고, 낙(樂)도 하나의 변입니다. 

변이라는 것은 중심이 아니고, 양쪽 변두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중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양쪽 변두리를 여읜 곳,

가장 '중심적인 곳'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이 양변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고락(苦樂), 유무(有無), 중생과 부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상대입니다. 

상대 아닌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컨대 돌맹이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무엇하고 상대할까요? 

돌맹이 아닌 것과 상대합니다 

돌맹이가 한 편이고 돌맹이 아닌 것이 한편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 변이 아닌 것이 없어요.

그래서 변이라는 것은 상대성을 말하고,

상대성이란 차별성을 말하고,

차별성이라는 것은 존재를 뜻합니다. 


차별은 존재입니다. 

존재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뜻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존재의 세계입니다. 

모든 게 있는 것으로 이뤄진 세계입니다. 

차별이 어떻게 존재할까요? 

내 등 뒤에 칠판이 있습니다. 

찰판 위에 흰 종이를 붙였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종이와 칠판이 구분돼야 종이가 있고 칠판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 아닌 존재가 협조해 주기에 나의 존재가 가능합니다.

이것은 연기법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차별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따라서 차별을 떠나면 존재도 사라지게 됩니다. 


양변을 여의었다는 말은 양변이 상대성의 뜻이고,

또 상대성이 존재라면 양변을 여의었다는 말은 존재를 여의었다는 뜻입니다. 

중도의 세계, 양변의 여읜 세계가 무슨 말이냐 하면,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비존재의 세계도 아닙니다.

존재와 비존재가 서로 대치되는 거니까요,

둘 다 양변에 속하니까요.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면모를 가지고 얘기한다면 

어떤 것을 중도의 뜻이며 중도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첫째 중도라는 것은 무아(無我)입니다. 


전주에 가면 덕진공원이 있습니다. 그곳에 연꽃이 장관입니다.

연꽃을 가로질러 건너는 다리도 있고, 다리 중간에는 차 마시는 정자도 있어서 제법 운치가 있습니다. 

다리엔 내온등이 설치되어 있어 밤에 보면 이쪽에서 켜져 가지고 쪼르르 저 끝까지 달려 가곤해요.

그런데 정말 이쪽에서부터 저쪽에 달려가는 등불이 있을까 하고 가서 확인해 보면 움직일 수 있는 놈은 아무 것도 없어요. 전등이 모두 붙박이 나사로 고정되어 있어서 여기서 부터 저쪽까지 옮겨갈 전등은 실제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 눈에는 움직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그것은 우리 착각입니다. 그렇지 않은데도 그런 거 같이 보입니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거기에 실체적인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교의 무아사상입니다. 


둘째, 중도는 불이(不二)입니다. 


불이법문(不二法門)은 말 그대로 '둘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동전의 앞면만을 보이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동전이라고 답합니다. 

뒷면을 보이고 물어도 동전이라고 답합니다.

앞면이건 뒷면이건 다 동전입니다. 

이것을 불이법(不二法)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불이요, 중생과 부처가 불이요, 너와 내가 불이요, 

고와 낙이 둘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의 삶에 부처의 광명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 나타나지 않을까요? 

'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부처 아님이 없지만 부처가 꼭꼭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셋째, 중도는 사랑입니다.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너는 절대로 내가 될 수 없지만, 

깨달은 뒤에는 너와 내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몸입니다. 

이 세상에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일까요?

가족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누구인가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가족 가운데 누가 아프면 내가 행복할 수 있습니까? 

중생이 불행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중도의 깨달음은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입니다. 


넷째, 중도는 무한한 행복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이 깨닫고 고향인 카필라성을 방문했을 때 온 성 사람들이 나와 환영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만 안 나왔습니다. 아소다라 부인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린 아들에게 라훌라(방해물이라는 뜻)라는 이름을 붙이고 야반도주 해버렸는데, 

기분이 좋을리 있습니까? 아소다라 부인은 라훌라에게 "저기 저 분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가서 이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선물을 달라고 해라"라고 말하며 부처님께 보냈습니다. 

라훌라는 부처님께 나아가 말했습니다. 

"부처님, 제가 라훌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비싼 보배를 선물해 주세요." 

그러자 부처님은 "좋다, 보배를 선물하마."라고 대답하고 발우를 주고 따르라 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부귀영화라는 것은 결코 우리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출가 후 고통을 겪었지만 깨달음을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중도의 깨달음이야말로 모든 불행을 해소 할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불암사 수좌 적명 스님 유고집 <수좌 적명> 불광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