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의 성품

2020. 2. 28. 10:52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화신에게는 어떤 힘이 어떻게 부여되는가?

화신(Avatar)이란 지상에 '내려옴' 또는 내려온 '신의 화현'으로 불리는 것은 누구인가?

이미 존재하는 신만이 화현을 취할 것이다.

다른 누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부라만을 완전히 깨달은 이는 비록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다 해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초월적 상태에서 삶을 살아간다.

왜 그를 '화현'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하는가? 그는 확실히 화현이다.

"나는 진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다.

여러분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있는 그대로의 그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성품을 이해한 자는,

그 상태에 있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음에도 스스로 분명한 브라만이다.

먹든, 마시든, 대상을 즐기든, 모두가 브라만이다.

이 분명한 확실성 그 자체가 화현력이다.

화현, 곧 신의 '내려옴'은 마음이 생각해 낸 하나의 관념이다.

이 모든 것은 정서적 개념의 문제이다.


뭔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있는 동안은, 혹은 의심이 여전히 마음을 동요시킬 때는,

뭔가가 여전히 잘못되어 있다는 생각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음이 전혀 동요되지 않는 사람은, 미세신에서도 벗어나 있는 사람이다.

설사 어떤 재앙이 닥쳐도 동요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 진정 브라만이다.

그는 브라만을 깨달은 사람이다.

행위자가 있는 한 그는 분명히 뭔가를 할 것이다.

만일 행위자가 없다면 누가 행위하겠는가?

무슨 일을 하게 되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여 점검해야 한다.

"그것을 언제 했는가? 그것은 언제 일어났는가? 그것이 알려지기 전의 상태에서 그것은 어떻게 생겨났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가? 그 행위가 나타난 그곳에서 '나'는 무엇이었나? 거기서 내 이름은 무엇이었나? 거기서 내 형상은 무엇이었나?"  여러분이 그 안에 있었는가, 아니면 그것이 여러분 안에서 일어났는가?


행위자가 과연 행위를 한다면, 행위의 느낌이 일어나는 단계에서의 그 행위자의 형태, 형상 등을 알아야 한다.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형상이 없고 성질이 없는 것이 어떻게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는 기쁨과 슬픔을 넘어서 있다.

그는 특정한 수단이 필요한지. 아니면 아무 수단도 필요하지 않은지에 대해 괸심이 없다.

여러분은 어느 때나 그다. 그가 언제나 왕이다.

우리는 시바가 되어야 하고, 그런 다음 시바의 헌신자가 되어야 한다.

시바로서 산다는 것은 '해탈을 성취한 뒤의 헌신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으로서 사는 것을 신의 화현이라고 한다.

헌신은 단일성을 뜻한다. 헌신자의 이름은 어떤 이름이어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신성한 진아가 되었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그가 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진아라는 개념적 상태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어떤 종류의 개념도 없어야 한다.

브라만을 성취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상태 안에 산다는 것도 그릇된 관념이다.

브라만이 된다는 것은 없다. 여러분이 이미 브라만이다.

된다거나 되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 어떤 진술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 말 없이 그와 같이 존재하는 것, 실제로 그와 같이 살고 행동하는 것을 해탈 후의 헌신이라고 한다.


밧줄 위에 나타난 뱀의 모습이 사라지면 뱀에 대한 생각과 뱀이라는 환(幻)도 사라진다.

금은 금이 '될' 수 없다. 샴부(시바)는 있는 그대로이다. 그는 되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는 샴부이다.

먹을 때, 잠잘 때, 걸을 때, 그는 샴부일 뿐이고, 더도 덜도 아니다.

사두(해탈한 유랑 고행자)가 국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사두에게는 어떤 법도 규칙도 없다. 그가 자신에 대해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있는 그대로 그이다.

그는 모든 옷을 벗어 버렸고, 심리적으로도 자기 몸이라는 거죽을 내던졌다.

겉에 걸친 의복은 물론, 개념적 동일시라는 내면의 의복, 모든 옷, 모든 거죽을 치워 버렸다.

그가 삶 속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그런 것이 없다.

그는 브라만이고, 샴부이고, 비슈누이고, 모든 것이다.

신에게는 인간들이 생각하는 법률, 규칙, 죄 또는 공덕이라는 것이 없다.

왕은 자신이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지킨다.

브라만은 정지해 있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사두는 곧 브라만이며, 브라만은 사두와 다르지 않다.

어떻게 그것에게 어떤 상태, 움직임 또는 속박이 있겠는가?

여러분이 소를 팔아 버리면 어떻게 그 소에게 멍애를 얹어 쓸 수 있겠는가?

팔린 것은 팔린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돌아 오겠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에고가 사라지면 남는 자는 신 뿐이다.

그는 모든 규칙의 바깥에 있다. 그에게는 무엇이 규칙인가?

그는 해야 할 어떤 의무도 없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사두들은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엇인가? 인간들을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두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이다 !

신인 자는 신처럼 행동하며, 어디 있든 늘 그 자신의 찬연함 속에 있다.

신인 그는 그 자신의 힘 속에 있다.


사마르타(Samartha)라는 단어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 자신의 중요성을 아는 자'라는 뜻이다.

사람은 자신의 진아에 대한 이해 정도에 따라서 행동한다.

사두는 자신의 가치, 자기 자신의 삶의 중요성을 올바르고 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성품의 존재이고, 실은 '그것'이며, 언제나 그럴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세계가 종말을 맞아도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최종적인 그것이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완성되었다. 그의 상태는 고정되었다.

그것은 변하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그의 상태가 부서질 수 없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그의 확신은 고정되어 있다.

사두는 부서지지 않는다. 올바른 이해가 있기에, 그는 그 자신의 힘 속에서 산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노인이 치아가 없어 힘 들게 밥을 먹으면 사람들이 웃지만,

그는 늙었고 그냥 그런 것이지 어떻게 젊어질 수가 있겠는가?

노인은 자기 나름대로 행동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두가 브라만일 때는 브라만으로서 행동할 것이다.

그는 브라만의 힘 모두를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세간의 규칙은 그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사두이면서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를 생각하는 자는 깨달은 사두가 아니다.

그는 브라만이 아니다. '자유로운 자'가 브라만이며, 그 브라만인 자는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그런 사두와 브라만은 하나인 것이다.

                                                                   -Master of Self- Real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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