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24. 09:39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머릿말]
[자기탐구]는 마하리쉬가 직접 쓴 최초의 저작이다. 이것은 1901년경, 그러니까 그가 스물 두 살 가량의 청년일 때 지어졌다. 그는 이미 진아를 완전히 깨달은 진인(jnani)으로서, 신성한 지(知)의 지복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그는 아루나찰라 산위의 비루팍사 산굴(山窟)에 살고 있었고, 주위에는 제자들이 여러명 생겨나 있었다. 그는 실제로 묵언(默言)의 맹세를 한 적은 없었지만 거의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헌신자 중 한 사람인 감비람 세샤이야 가 그에게 한 질문들에 대해서도 글을 써서 답변했다. 감비람 세샤이야는 그것을 일기장에 옮겨 써 두었고, 그가 죽은 뒤 그의 형이 이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다가 내놓았다. 그 질문과 답변들을 사두 나따나단다가 편집했다.
이것은 바가반의 승인 하에 <비짜라 상그라함> 즉 "탐구 요지"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데, 나중에 연문형으로 바뀌었다. 이 책에서는 원래의 문답형을 채택하였다.
이 작품에는 청년 기질이나 미숙함이 전혀 없다. 이 스승은 그의 후년과 똑같은 완전한 영적인 지식의 권위를 가지고 쓰고 있다. 말로 하거나 글로 쓴 그의 다른 모든 설명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진아 깨달음의 길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들과 관련되는 것이며, 건조한 이론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그 이후의 설명들과 다른 점이 있다. 즉 이것은 자기탐구의 글 뿐만 아니라 다른 길, 예컨대 자신의 진아와 동일하다는데 관한 명상이라든가 호흡제어에 기초한 요가의 길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다만 그 자신은 자기탐구 혹은 스승에 대한 순복(順服,내맡김) 만을 권장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자문하거나 아니면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왜 최초의 가르침에서 덜 직접적이면서 더 정교한 그런 방법들까지 포함해서 이야기했을까? 십중팔구 그가 이 답변을 써준 제자가 이러한 방법들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었고, 그에 관해 질문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어쩌면 더 넓은 의미에서, 그가 평생동안 제시할 가르침을 내놓기 전에 여러 가지 방법들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을 먼저 해두는 것도 적절하다 하겠다, 확실히,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는 설명은 하지만 거의 권장하지는 않고 있다.
여기서 설명하는 호흡제어는 물론 단순히 신체적 수련이 아니다. 그것이 정교한 학(學)이 되는 것은 그 수련의 영적인 의미 때문이다. '학(學)'이라 하는 것이 그에 대해 적절한 단어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인도의 정통적인 '자기정화(自己淨化)의 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수련법은 그에 대해 사전 기초지식이 없는 서양 독자들에게는 난해한 것이 되는데, 특히 여기에는 - 모든 학문이 그렇기는 하지만- 긴 설명없이는 적절히 번역하기 어려운 전문용어들이 들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마하리쉬가 이것을 설명할 때, 그의 가르침을 받는 당사자가 관련 학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서양 독자들에게 위안이 되는 점은, 그가 이 길을 권장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후년의 저작에서는 거의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전문 사항들을 굳이 배울 필요는 없다.
[기원문 ]
모든 것인 지고자를 앙모(仰慕)함에 있어서, '그것'으로 확고히 안주하는 것 외에 어떤 길이 있단 말인가.
[1]
제자 : 스승님 ! 불행이라고는 없는 영원한 지복의 상태를 얻는 수단은 무엇입니까?
스승 : 몸이 있는 곳에는 늘 불행이 있다는 베다의 말씀을 논외로 하면, 이 지복의 상태는 모든 사람들이 직접 체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몸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참된 성품을 탐구해야 하고, 그 성품으로서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이 그 상태를 얻는 수단입니다.
[2]
제자 : 우리가 자신의 성품을 탐구하여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스승 : '내가 갔다, 내가 왔다, 내가 있었다, 내가 했다'와 같은 경험들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옵니다. 이러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나'라는 의식이 그러한 여러 가지 행위들의 주체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 의식의 참된 성품을 탐구하고 자기 자신으로서 머무르는 것이, 탐구를 통해서 자신의 참된 성품을 이해하는 길입니다.
[3]
제자 : '나는 누구인가?'는 어떻게 탐구해야 합니까?
스승 : '가기', '오기'와 같은 행위들은 육신에만 속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갔다, 나는 왔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육신을 '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그것이 태어나기 전에는 없었고, 다섯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깊은 잠의 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죽으면 시체가 되는데, 그것을 '나'라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치 나무토막같이 지각력 없는 이 몸이 '나-나'로서 빛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육신에 관하여 맨 처음 일어나는 '나-의식'은 아만(我慢), 에고성, 무지(無知), 마야, 때(垢), 개아(個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립니다. 우리가 이것을 탐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모든 경전에서 '아만'의 소멸이 해탈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탐구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도록 하려는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시체-몸은 시체인 채로 두고, '나'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내지 말고, 예리하게 이와 같이 탐구해야 합니다. "자, 이제 '나'로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그러면 심장(心藏) 안에서 '나-나'형상의 일종의 말없는 광명이 빛날 것입니다. 즉, 한계있는 것과 많은 생각들이 사라지고 나서, 무한한 하나인 순수의식이 저절로 빛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체험)을 내버리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에고성, 곧 '나는 몸이다' 하는 형태의 개인적인 느낌이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최후의 생각, 즉 '나-형상' 또한 장뇌를 태우는 불처럼 꺼져 버릴 것입니다. 위대한 진인들과 경전들은 이것이야 말로 해탈이라고 선언합니다.
[4]
제자 : '나'라는 형상인 '아만'의 뿌리를 탐구해 들어가면 온갖 다른 생각들이 무수히 일어나는 것 같고, 어떤 별개의 '나'라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습니다.
스승 : 제1격인 주격이 나타나든 나타나지 않든, 다른 격이 나타나는 문장들은 제1격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심장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생각은 최초의 마음의 상(相)인 '나', 즉 '나는 몸이다' 라는 형태의 지각인 에고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처럼 에고성이 일어나는 것이 다른 모든 생각이 일어나는 원인이자 근원입니다. 따라서 만약 윤회계라는 환상의 나무의 뿌리인, 에고성의 형상을 한 아만이 소멸되면, 다른 모든 생각들도 마치 뿌리 뽑힌 나무처럼 완전히 죽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의 수행에 장애물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마음이 그 생각들 쪽으로 쏠리게 해서는 안되며, 아트만인 자신의 진아 안에서 휴식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슨 이상한 일이든 일어날 테면 일어나라. 하는 자세를 취한 채 주시자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는 자신을 겉모습(이름과 형상들)들과 동일시해서는 안되며, 결코 자신의 진아를 놓아 버리면 안됩니다. 이것이, 육신을 자기로 보는 성질을 지니고 있고 앞에서 말한 모든 장애들의 원인인 마음의 소멸을 얻기 위한 적합한 수단입니다. 에고성을 쉽게 소멸하는 이 방법을 헌신, 명상, 집중, 그리고 지(知)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신(神)은 심장 안에서 '나'로서 빛나는 진아의 성품으로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수단으로든 '나라는 생각'의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음을 그(神,진아)의 안에서 녹여 버린 뒤에, 항상 그를 잊지 않고 고요히 머무르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 이것이 경전들의 결론적인 가르침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저작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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