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9. 09:44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神見에서) '견(見)'이란 말은 보편적(우주적) 에너지를 접해서 아는 것, '신(神)'은 그것을 아주 명료하게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신과 헌신자는 이름은 둘이지만 정신에서 하나이다.
헌신자는 바로 그의 성품에서 신과 동일하다.
우리가 신을 깨닫지 못하는 한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그 헌신자에게 베풀어지는 정의(정당한 대가)이다.
그럴 때 정의와 불의,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영원한 것과 찰나적인 것의 구분을 알게 되며, 이것이 그의 해탈을 가져온다.
신견은 개인성을 제거한다.
나타난 현상계가 그냥 느껴지며 나타나지 않은 실재(實在)와 분명하게 구분된다.
개인성이 상실되면서 이기적인(자아중심적인) 관심도 사라진다.
우리가 이기적인 한, 사려분별력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의의 의미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개인성의 느낌이 현상계의 느낌(전체성)으로 대체되면,
그 헌신자는 자신이 언제 어느 때나 순수한 의식이라는 것을 안다.
현상계의 느낌(전체성)은 자신이 지고한 존재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자각이다.
하지만 세간적 삶은 복잡한 상호작용과 더불어 계속되어야 한다.
영적으로 깨달은 성자들은 그것이 보편적 의식의 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재미 삼아 거기에 참여한다.
성자들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교류 할 때 자신을 개인으로 정한다는 사실은, 이따금 그들도 범부와 같은 정도로 자신들의 세간적 삶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성자들은, 오직 순수의식이 다양한 이름과 형상으로 자신을 표현하면서 늘 새로운 형태로 그 과정을 계속한다는 것을 항상 자각하고 있다.
성자도 삶의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 그것을 아프게 느끼지는 않는다.
그는 세간의 쾌락과 고통, 이익과 손해에 영향을 받지 않고 그에 동요되지도 않는다.
세상의 견디기 어려운 사건들도 그에게는 그저 유순하고 무해한 일일 뿐이다.
범부로서는 하찮은 일조차도 때로는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그 헌신자는 세상을 흔드는 사건들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 그는 남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위치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찮은 자존심이 발동하여 그를 그냥 무시한다.
그러나 그 후 뭔가를 경험하면 그에게 이끌린다.
그의 행동은 전적으로 정의감에 의해 인도된다.
정의의 화신인 신은 그 자신의 어떤 친척도, 소유물도 없다.
세간의 평화와 행복이, 말하자면 그의 유일한 보물이다.
그 무형상의 신적 의식은 그 자신의 이익이 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그 헌신자에 대한 잠정적 개요이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진아지와 진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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