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3. 10:20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여기는, 특정한 이름과 형상이 있는 분리된 개인을 '거짓된 나'라고 한다. 그것에 관해 거짓된 점은 한정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이와 달리 충만한 의식의 자각은 '나'-나'라고 하는데, 그것은 참된 '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생각에 묶이지 않고 어떤 한계에도 묶이지 않은 의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짓된 나'와 '참된 나'라는 두 개의 자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까닭은 탐구의 필요에 관한,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본성을 발견할 때 일어나는 일에 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라마나는 우리가 오로지 마음의 핵심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그 마음은 내면을 향한다고 말했다.
그 뒤 영적인 심장 속에 있는 의식의 흐름은 마음을 안으로 끌어 당긴다.
거짓된 '나'가 참된 '나'에게 자리를 내어 준다고 말할 수도 있다.
거짓된 '나'와는 달리 참된 '나'의 느낌에는 끊어짐이 없다.
거짓된 자아는 깨어있는 상태의 현상일 뿐, 잠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느낌을 나타내기 위해 라마나가 사용한 표현은 '나-나'이다.
영적 심장은 늘 현존한다.
그래서 그것은 또한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의미인 스와루파(Swarroopa)라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나'로 느껴지는 것을 아는 지식이다.
그것은 영적 심장 속에 있는 순수한 마음에 의해 경험된다.
이 느낌은 늘 현존하지만 그것을 반사하는, 생각이 없는 순수한 마음 안에서만 오직 느껴질 수 있다.
수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 때때로 경험하게 된다.
이 경험이 변함없이 꾸준히 지속될 때, 그것을 갸나(jnana)라고 한다.
이러한 심장의 고동을 요가 용어로는 스푸라나(sphurana)라고 한다.
* * *
문 : 스승님께서는 매우 높은 수준의 지식을 말씀하십니다. 저는 몸에서 시작하려 합니다. 육체적 경험 면에서 갸냐(jnani)와 아갸니(ajani) 사에에 차이점이 잇습니까?
답 : 차이가 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점에 대해 이미 여러 차례 설먕을 했다.
문 : 그렇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얘기되고 논의되는 베단타 갸냐(Vedanta jnana)는 실제로 깨닫고 경험되는 그것과는 다를 것 같습니다. 스승님께서는 '나'의 진정한 의미가 영적인 심장 속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십니다.
답 : 그렇다. 그대가 점점 깊이 들어가 깊은 심연에서, 흔히 얘기 하듯이, 자기 자신을 잃게 되면, 줄곧 그대 뒤에 있던 아뜨만 즉 실재가 그대를 붙잡는다. 그것은 나-의식의 끊임없는 섬광이다. 그대는 말하자면 그것을 인식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들을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아함 스푸르티(Aham sphoorti)이다.
문 ; 스승님께서는 아트만이 변하지 않으며 스스로 빛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의식의 끊임없는 섬광, 이 아함 스푸리티를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움직임이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답 : 그대가 말하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력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돌덩어리가 된다는 뜻인가? 아함 브리티는 아함 스프리티와 다르다. 전자는 자아의 활동이며, 스스로 소멸하고 참나의 영원한 표현인 후자에게 자리를 내어 주게 되어 있다. 베다에서는 아함 스푸르티를 브리티 갸나(Vritti Jnana)라고 한다.
갸나의 깨달음은 항상 브리티다. 브리티 갸나 즉 깨달음과 스와루파(Awaroopa) 즉 실재사이에는 구별이 있다. 스와루파는 갸나 그 자체이며 의식이다. 스와루파는 전능한 삿트-칫트(Sat-Chit,존재-의식)이다. 그것은 늘 자기 실현되어 있다. 그대가 그것을 깨달을 때, 그 깨달음을 브리티 가나라고 한다. 그대가 깨달음, 가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오직 그대의 존재에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얘기하는 가나는 언제나 브리티 갸나를 가리키는 것일 뿐, 스와루파 갸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스와루파는 자체로 늘 가나(의식)이다.
문 : 여기까지는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몸에 관해서는 어떤가요? 이 브리티 가나를 어떻게 몸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까?
답 : 그대는 실재하는 '하나'와 자신이 하나임을 느낄 수 있다. 온몸은 순전한 힘, 힘의 흐름이 된다. 그대의 삶은 거대한 자석에 이끌리는 바늘이 된다. 그대가 점점 깊히 들어갈수록 그대는 순전한 중심이 되며, 그 뒤에는 그 조차도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그대는 순전한 의식이 되며, 어떤 생각이나 염려도 더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문간을 넘으면 부서져 버린다. 그것은 충만함이다. 한낱 지푸라기 같은 그대는 산 채로 삼켜지지만, 그것은 더없이 기쁜 경험이다. 그대는 그대를 삼키는 바로 그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브라만과 지바의 합일이며, 진실한 참나 속에서 자아를 잃은 것이며, 거짓의 파괴이며, 진리에 이르는 것이다.
문 : 비베카츄다마는 '나-나'의식을 영적인 심장 속에서 영원히 빛나지만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답 : 그렇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외 없이 '나-나'의식이 있다. 그들이 어떤 -깨어있는, 꿈꾸고 있는, 꿈없는 잠을 자고 있는 - 상태에 있건,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고 있건 안 하고 있건 상관없이 그러하다.
문 : <삿 다르샤나 바시아>의 대화 편에는 '나-나'가 절대 의식이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가반께서는 예전에 사하자 니르바칼파 이전의 깨달음은 무엇이든 지적인 것이라고 제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답 : 그렇다. '나-나' 의식은 절대자다. 비록 그것이 사하자 이전에 온다 해도, 사하지 자체에 미묘한 지성이 있듯이 그 안에도 그 지성이 있다. 다만 사하자 상태에서는 형상의 감각이 사라지는 반면 그 이전의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둘 사이의 차이점이다.
* * *
문 :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는 몸의 어느 지점으로 인도합니까?
답 : 분명히, 참나 의식은 개인 자신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경험의 중심으로서의 몸 안의 중심을 통해 자기 존재 안에서 경험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모든 전기적인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발전기와 닮았다. 그것은 몸의 생명 그리고 모든 신체 부위와 의식적으로 움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기관들의 활동을 유지시킬 뿐 아니라, 각 개인이 기능하는 물리적인 혹은 더 미묘한 상태 사이의 관계를 유지시킨다. 또한 그것은 발전기처럼 진동하기 때문에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고요한 마음이 감지할 수 있다. 요기들과 수행자들이 사마디상태에서 그것을 의식과 함께 빛나는 것으로 경험하고는 스푸라나(sphurana)라 부르고 있다.
문 : 스승님께서 궁극의 의식이라 부르는 '나-나'가 일어나는 그 중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습니까? 그저 '나는 누구인가?'하고 생각하면 됩니까?
답 : 그렇다, 그것은 그대를 그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그렇게 해야 하며 마음의 고요가 필수적이다.
문 : 그래서 심장인 그 중심에 도달하면 그 의식이 어떻게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까? 제가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요?
답 : 물론이다. 모든 생각에서 자유로운 순수의식으로서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해서라기보다는 그대의 참나에 대한 순수하고 끊어지지 않는 자각이다. 순수할 때는 그것을 착각하지 않는다.
문 : 중심의 진동운동은 순수 의식의 경험과 동시에 느끼게 됩니까? 아니면 그 이전 혹은 그 이후에 느끼게 됩니까?
답 : 그 둘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스푸라나는 명상이 충분히 안정되고 깊어졌을 때에도 미묘한 방식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대단한 공포 또는 충격이 일어나 마음이 멈출 때, 궁극의 의식은 매우 가깝다. 그것은 자신(참나)에게로 주의를 끌어들이며, 그래서 고요해져 민감해진 명상자의 마음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이끌릴 수 있으며, 마침내 그것 속으로, 참나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 나타라잔 편집, 김병채 옮김< 그대 자신을 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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