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28. 20:00ㆍ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여러분은 빠라마트만이다.
이것이 여러분의 참된 성품이다.
여러분에게는 탄생도 죽음도 없고, 오고 감도 없다.
형상을 가진 것들은 여러분의 실체가 아니다.
물은 형상이 없고, 바람과 불도 형상이 없다.
우리도 아무 형상이 없는 것입니다.
'니루구나'는 성질이 없다는 뜻이다.
'아난따(Ananta)'라는 단어는 '결코 끝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빠라마트만은 영원히 존재하며 중단도 없다.
우리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빠라마트만(진아)이다.
어떤 사람이 빠라마뜨만의 진정한 성품을 알 때, 그는 자신 안에 그런 성품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그의 내면에 흡수되며, 그 자신 안에 의식저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빠라마뜨만은 만물에 편재하므로 그를 비야빠끄(Vyapak, 만물에 편재하는 자)라고 한다.
다양한 사물들 모두 안에, 존재하는 오직 하나가 있다.
마치 모든 장신구에 금만 있듯이 말이다.
그 이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이름들이 사용되지만, 빠라마트만은 묘사를 넘어서 있다.
그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성질들은 그냥 그의 재산이다.
이 모든 세계의 겉모습은 빠라마드만의 재물이고, 그의 부동산이다.
이런 성질들을 장식으로 가지고 있는 일자(一者)가 빠라마뜨만이다.
헌신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상태'를 성취한다.
아홉가지 헌신은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정화된 헌신이다.
이 아홉 가지 헌신 중 아홉 번째인 '자기 순복(자기 내맡김)'은 아따마 -니베다나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적 체험을 통해서 이 아홉 번째 유형의 헌신에 대해 명상해야 한다.
이것을 힘의 상태, 곧 주시자인 상태, 그리고 파이따니아의 상태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에 따라 우리 자신의 체험을 점검해 봐야 한다.
우리는 숭배(예공)를 마친 뒤 신이나 스승에게 (절을 하면서) 우리의 머리를 드린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헌신자들 가운데, 진아의 성품을 명상하고 자신의 실재 존재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사람은 아주 적다.
이런 식의 헌신의 본질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때는 누가 있겠는가?
누군가 있다 ! 그 누군가가 빠라마뜨만이다.
결함이 없고 성질이 없는 것이 그 지고아이다.
그는 모든 대상이고, 모든 성질이며, 에고이고, 일체이다.
'여러분'만 없다.
일체가 브라만이지만 여러분이 왜소한 작은 나가 될 때는 하나의 개아이다.
걱정과 슬픔의 삶 속에서 사는 것이 여러분의 운명이 된다.
여러분은 힘을 잃어버렸다.
개아의 상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여러분은 죄수가 되었다.
개아의 상태가 해소되면 남는 것은 (지고아로서의) 시바이다.
이 위대한 존재성의 하인들도 모두 위대하다.
비슈누가 그의 마음이다. 해와 달이 그의 눈이다.
시바는 그의 에고이다. 브라마가 그의 지성이다.
지구는 그의 피부요 털이다.
이 모든 것이 주(主)의 찬연한 힘이다.
여기서는 하찮은 것이 하나도 없다.
개아라는 느낌이 사라지면 시바만 남으며, 그가 곧 빠라마뜨만이다.
그럴 때 모든 감각기관은 그 찬연함 속으로 들어 올려지고, 여러 천신들의 이름이 붙는다.
주인이 집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자연히 문과 창문들도 그의 소유이다.
헌신자와 신을 발견하는 것이 자기 순복, 곧 자기 자신의 실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헌신자 자신이 태고의 신이다.
그 헌신자 자신이 원초적 신이며 본래적 신이다.
그를 헌신자라고 부르는 것은 거짓이다. 여러분 자신이 신이다.
헌신자는 신을 알아내려고 애쓰다가 그 자신 신이 되었다.
신과 헌신지는 별개가 아니다. 헌신자가 곧 신이다.
그는 속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유롭고, 그 자유가 본래적 하나인 것이다.
경전에서 제시한 기준으로 보나, 그 자신의 설득력 있는 체험으로 보나, 그는 신일 뿐이다.
이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그들은 둘이었다.
인식이 일어나면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뚜쁘(Toop)와 그루따(Ghruta)로 불릴 때는 이름이 둘이지만,
그것은 기이(ghee : 기이를 마라티어로 '뚜뿌'라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그루따'라고 한다.)일 뿐이다.
그 물건, 곧 존재는 오직 하나이며, 차이가 있다면 이름과 형태만 다르다.
신이 헌신자로 불리고, 헌신자가 신으로 불리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의 체험으로 이것을 점검해 보기만 하면 납득할 것이다.
의심이 사라지면 두 이름 간의 차이도 사라진다.
그러면 오직 하나인 빠라마뜨만에 대한 참된 체험이 있다.
자신이 몸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헌신자가 신을 숭배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자신의 참된 자아를 인식하자마자 별개의 개체로서의 그는 사라져버렸다.
존재, 의식,지복의 세 현상이 모두 하나가 되었다.
진인들은 최종적 끝, 곧 세계의 해체를 일순간에 체험하며,
비록 그들이 몸을 가지고 살아있다 해도 그들은 무형상이 되고, 브라만의 성품을 지니게 된다.
아홉 번째 유형의 헌신인 자기 순복을 이루면 신과의 단일성이 있고,
전적인 자유인 사유자(Sayujya-합일) 상태가 있다.
한편 자유의 살로까따(Salokata) 상태란 자유로운 사람들과 친교하고,
해탈 후에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의 사미빠따 상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유의 네 번째 상태는 사유짜따인데, 이
것은 자아를 내맡겨 그것이 참된 진아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여러분이 정말 따랐다면, 그것이 진아이다.
여러분의 존재를 이해한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아무 편견없이 보게된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전체성이 우리의 온전하고 완전한 존재이다.
이에 대한 이해가 있다.
자아를 내맡기는 자는 무조건 자유로워진다.
영원한 집이란 만물 일자성(All- oneness),곧 홀로됨을 의미한다.
이 나뉘지 않는 헌신은 파괴불가능이다.
헌신자가 그 자신을 성자들에게 내맡기고 진아지를 얻어냈다.
그는 하나가 된다. 이제 그는 분리할 수가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지 않았다면, 죽음의 신이 또 한번의 탄생을 줄 것이고,
그는 다시 환(幻)에 종속될 것이다.
스승에 대한 헌신을 내팽개치면 다시 환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성자들의 발아래 귀의해야 한다.
한 부자가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망상에 빠졌고, 사람들은 그가 미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말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거지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성자의 축복으로 그의 환상이 사라졌다.
그는 다시 부를 즐겼고, 망상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한다.
우리의 아버지(스승)가 우리에게 재산을 주었는데,
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재산을 즐기면 안되는가?
그를 비난하면서 우리의 음식을 먹으면 좋을게 뭐가 있나?
여러분이 그 음식을 받았고 그것을 즐겨야 하지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나서 즐겨라.
만일 여러분이 빠라마드만의 자유와 찬연함을 즐기고 싶다면, 스승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그의 영광을 즐겨라.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진아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知)에 의심을 가진 사람은 늘 어디서나 의심에 시달릴 것이다.
성자와 현자들은 우리에게 작은 개미와 곤충도 신으로 취급하라고 조언했다.
성자들을 비난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큰 슬픔을 겪게 될 것이다.
지성이 혼란에 빠지고 지(知)가 그를 떠나갈 것이다.
여러분은 브라만이니, 남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자부심이 사라진 사람이 진정한 현자이다.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브라만이 될 수 없다.
지(知)는 망고와 같아서, 그것이 익었을 때 여러분은 그 겉모습 등의 표지로 그것이 익었다고 판단하고 바로 따고 싶어진다. 그때 그것을 따면 분명히 맛이 들었다. 단맛이 난다.
지(知)의 표지는 우리가 성자와 현자들 모두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일자성의 느낌을 가지고 있고, 모두에게 자애롭다.
진아지를 가진 사람은 성자와 현자들 모두를 존경하며,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자부심이 없다.
그는 동문 사형제들을 스승과 동등하게 본다.
그리고 전 세계가 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따기 좋은 상태의 망고와 같으며, 진정한 만족을 얻을 만한 그릇이다.
그래서 진아지를 가진 헌신자는 어떤 것에도 자부심을 가지면 안된다.
비천한 일을 싫어하는 사람은 성자가 아니다.
만일 스승의 헌신자가 신일 뿐이라면,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보살피는 것은 그의 임무이다.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신은 만물에 편재하는 모두의 진아이며, 스승의 헌신자는 신과 같다.
성자들을 진지하게 존경하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사람을 존경한다.
따라서 성자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은 사유자(Sayujya) 상태, 곧 영원한 상태를 얻게 된다.
-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쉬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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