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我)'와 '나라는 생각(我相)'

2019. 8. 7. 10:01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문(헌신자) : 에고를 가지고 시작하는 탐구를 통해 어떻게 에고 자신이 실재하지 않음을 밝혀 낼 수 있습니까?

답(라마나 마하리쉬) : 아상(我相;나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으로 뛰어들면, 에고의 현상적인 존재는 초월됩니다.

: 그러나 아상은 에고의 모습을 드러내는 세 가지 형태 중의 하나 아닙니까? <요가 바쉬슈타>나 다른 고서(古書)들에서는 에고가 세 겹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 그렇습니다. 에고는 세 가지 몸, 즉 조악체(粗惡體), 미묘체(微妙體), 그리고 근원체(根源體)를 가진다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분석적으로 살명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만약 탐구의 방법이 에고의 형태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면, 단언하건대 탐구가 아예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고가 취할 수 있는 형태는 무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지(眞知) 탐구의 목적을 위해서는 단 하나의 형태, 즉 아상의 형태만을 가지고 있다는 기초 위에서 진행해 가야 합니다.

: 그러나 그것은 진지(眞知)를 깨닫는 데는 적합한 방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 아상(我相)을 단서로 해서 추적해 들어가는 자기탐구는, 마치 개가 냄새로써 자기 주인을 찾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설사 주인이 멀리 낯선 곳에 가 있다 해도 개가 주인을 ​찾아내는 데는 별 문제가 안됩니다. 개한테는 주인의 냄새야 말로 확실한 단서이며, 그밖에 주인이 입고 있는 옷이라든가 주인의 체격, 키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을 찾아가는 동안 한눈 팔지 않고 그 냄새를 착파(着把)하는 한, 개는 결국 주인을 찾아내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진아에 대한 탐구에 있어서 단 하나 확실한 단서는 아상, 즉 그대의 경험의 제1차적 소여인 '나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다른 단서는 그대를 진아 깨달음으로 직접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 마음의 다른 상(相)들은 젖혀두고, 아상(我相)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 왜 진아 깨달음에 이르는 직접적인 방법이라고 하시는지 아직 의문이 가시지 않습니다.

답 : ​'아함'(Aham,나)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대단히 암시적입니다. 이 단어의 두 문자, 즉 '아'(A)와 '하'(HA)는 산스크리트 알파벳의 첫자와 끝자입니다. 이 단어가 전달하고자하는 의미는 그것이 일체를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아함은 존재 그 자체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나' 또는 '나는 존재한다'하는 관념은 언어 상으로는 아상(我相,Aham-vritti)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마음의 다른 상들과 같은 하나의 상(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서로간에 본질적인 연관관계가 없는 마음의 다른 상들과는 달리 아상은 마음의 각 상들과, 똑같이 그리고 본질저으로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아상 없이는 다른 상도 존재할 수 없지만, 아상은 다른 어떤 마음의 상에도 의존함이 없이 스스로 존속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상은 근본적으로 다른 상들과 다릅니다. 그러므로 아상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은 단순히 에고의 여러 형태들 중 어느 한 가지만의 뿌리를 찾는 것이 아니고,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일어나는 근원 그 자체를 찾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아상의 형태를 갖는 에고의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깨닫는 것은,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에고를 다 초월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아상이 모든 형태의 에고들은 본질적으로 다 포함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왜 아상만을 자기탐구의 수단으로 선택해야 합니까?

: 왜냐하면 아상은 그대의 더 이상 환원(還元)할 수 없는 단 하나의 경험 소여(오염되지 않은 직접의식)이기 때문이며(註; 경험적 인식에서는 인식의 성립근거-즉 대상, 감각기관, 감각인상 따위- 를 분석할 때, 인식주체인 '나'까지 밖에는 소급할 수 없다) 또한 그 근원을 찾는 것이 그대가 진아를 깨닫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실행 가능한 방도이기 때문입니다. 에고가 근원체(原因體, 잠 들어 있을 때의 '나'의 상태)를 가진다고는 하지만, 그대가 어떻게 그것을 탐구의 주제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에고가 그 형태를 취할 때, 그대는 잠의 어두운 무지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미묘체와 근원체일 때의 에고는, 마음이 깨어 있을 때 하는 아상의 근원탐구를 통해서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접근하기 어려운 것 아닙니까?

: 그렇지 않습니다. 아상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면 바로 에고의 존재 자체를 건드리게 됩니다. 따라서 에고의 형태가 미묘한 정도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 우리의 목표는 조건지워지지 않은 순수 존재로서의 진아를 깨닫는 것인데, 이 진아는 결코 에고에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상의 형태를 가진 에고에 대한 탐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기능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 형태나 활동, 혹은 그것을 뭐라 하든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덧없는 것이니까). 에고는 한 가지, 그것도 단 한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에고는 순수의식인 진아와 수동적이며 지각능력 없는 육체 사이에서 매듭과 같은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에고는 식신연계(識身連繫, 의식과 육체간의 매듭, 또는 심장매듭,이라고 불림) 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그대가 아상의 근원을 탐색해 들어갈 때, 그대는 의식이라고 하는 에고의 본질적인 측면을 파고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탐구는 진아의 순수의식의 깨달음으로 향하게 되어 잇는 것입니다.

 : 진인이 깨달은 순수의식과, 경험의 제1차적 소여(所與)로 간주되는 '나는 존재한다'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 순수 존재의 무차별한 의식이 심장, 즉 흐리다얌(Hritayam)이며, 그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대로 (Hrit + ayam=나는 심장이다) 실로 그대 자신입니다. 이 심장으로부터 우리의 경험의 제1차적 소여인 '나는 존재한다(내가 있다)'는 것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성격상 그 자체로 청정순수성(淸淨純粹性)입니다. 진인에게 있어서 '나'가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러한 원초적인, 청정순수성의 형상(形狀), 즉 라자스(활동성)과 타마스(나태성)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것입니다.

: 진인에게 있어서는 에고가 순수한 형태로 유지되며 따라서 그것은 실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 말씀입니까?

: 아닙니다. 진인이든 범인이든, 어떤 형태로건 에고의 존재란 그 자체 하나의 겉모습입니다. 그러나 생시의 상태와 이 현상계를 실재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범인에게는 에고 역시 실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진인도 다른 개인과 마찬가지로 행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인과 관련해서도 개인성의 관념을 상정(想定)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진인에게 있어서는 아상이 어떻게 작용합니까?

: 진인에게는 그것이 전혀 작용하지 않습니다. 진인의 주처(住處)는 심장 그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빠니샤뜨에서 완전의식(Prajnana)이라고 부르는, 차별없는 순수의식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완전의식이 진정 절대자 브라만이며, 완전의식 아닌 브라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그렇다면 범인의 경우에는 불행하게도 왜 이러한 유일무이한 실재에 대하여 무지가 일어납니까?

: 범인은 심장으로부터 일어나는 순수의식의 빛이 반사된 것에 불과한 마음만을 볼 뿐, 심장자체는 모릅니다.

왜냐? 마음이 밖으로만 향해 있어서 그 근원을 전혀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심장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무한하고 무차별한 그 빛이 범인에게 드러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 항아리 속에 담긴 물이 무한정한 햇빛을 항아리의 좁은 한계 안에서만 반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마음의 원습, 즉 잠재적 습성이 반사매체로 작용하여, 심장으로부터 일어나는, 일체에 두루하며 무한한 의식의 빛을 붙잡아서, 그것의 반사형태로 마음이라고 하는 현상을 만들어 냅니다. 범인은 이 반사된 빛만을 보고 자신이 유한한 존재인 개아(個我)라는 그릇된 믿음에 빠져듭니다.

아상의 근원을 파고드는 탐구를 통해서 마음이 내면으로 향해지면, 원습들은 소멸됩니다. 그리고 반사매체가 없어지면 반사의 현상인 마음 또한, 단 하나의 실재인 심장의 빛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집니다.

이것이 모든 수행인이 알아야 할 핵심사항입니다. 수행인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진지하게 그리고 일념(一念)으로 아상의 근원을 탐구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어떤 노력도 생시의 상태에서의 그의 마음에 한정됩니다. 마음의 세 가지 상태 중의 하나 안에서만 행하는 그러한 탐구가 어떻게 마음 자체를 소멸할 수 있습니까?

: 아상의 근원에 대한 탐구는 물론 수행자가 마음의 (세 가지 상태 중) 생시의 상태에서 착수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마음이 소멸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마음의 세 가지 상태 자체는 물론이고 그 세 가지 상태의 교체나 변환이 현상세계에 속한다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하튼 이 현상세계는 수행자의 강렬한 내면적 탐구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자기탐구는 실로 마음의 강렬한 내향(內向)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한 아상의 근원에 대한 탐구의 결과로 마침내 깨닫는 것은, 진실로 순수 의식의 무차별한 빛으로서의 심장인데, 마음이라는 반사된 빛은 그 안으로 완전히 흡수되어 버립니다.

: 그러면 진인에게 있어서는 마음의 세 가지 상태 간에 아무런 구별도 없습니까?

: 마음 자체가 의식의 빛 속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는데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진인에게 있어서는 세 가지 상태 다 똑같이 실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범인에게 있어서 실재(Reality)의 기준은 실재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순수 의식인 이 실재는 본질상 영원하며, 따라서 이른바 생시, 꿈 그리고 잠의 세 가지 상태에서 똑같이 지속됩니다. 그 실재와 하나가 된 사람에게는 마음도 없고 마음의 세 가지 상태도 없으며, 따라서 내향(내면으로의 몰입)도 없고 외향(外向, 현상계에 집착함)도 없습니다.

그는 항상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는 영원한 진아에 대해서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항상 꿈꾸는 상태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되풀이 되며 나타나는 꿈 현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는 잠자는 상태입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육체가 나'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슈리 바가반께서 하나의 생시-꿈-잠의 상태에서 저에게 말씀하고 계시다고 보아야 합니까?

: 그대의 의식 있는 체험이 지금 마음의 외향이 지속되는 동안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대는 현재의 순간을 생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반면에 그대의 마음은 내내 진아에 대해서는 잠들어 있고, 따라서 그대는 지금 정말로 깊히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 저에게 잠은 단순히 공백상태일 뿐입니다.

: 그것이 그런 까닭은, 그대의 생시의 상태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마음'이 들끓고 있는 상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 제가 공백상태라는 것은 제가 잠들었을 때에는 아무 것도 거의 자각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그러나 그대는 잠을 자고 있을 때에도 존재합니다.  

: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 그대는 설마 그대가 잠자는 중에는 존재하기를 그쳐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 (웃으며) 그대가 갑이라는 사람으로 잠자러 갔는데, 을이라는 사람으로 깨어났습니까?

: 제가 저의 동일성(자기가 자기인 것)을 아는 것은 아마도 기억 행위 때문이겠지요.

: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각의 연속성이 없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 그러나 저는 그 자각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답 : 아닙니다. 잠자는 동안 그대가 자각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그대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대가 잠들었을 때에는 아무 마음이 없었습니다. 잠자는 동안의 그대의 존재 혹은 체험에 대한 마음의 증언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잠자는 동안 그대의 존재 혹은 자각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음의 증언을 구하는 것은 그대의 출생사실을 부인하기 위하여 그대의 아들의 증언을 요청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제가 전에 한 번 그대에게 존재와 자각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하나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어째든, 어떤 이유에서건 그대가 잠 속에서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거북하다 하더라도, 그대 또한 그 존재를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그대가 잠 속에서 정말 자각하지 못한 것은 그대의 육체적 존재입니다. 그대는 이 육체적 자각을 영원한 진아의 진정한 자각과 혼동하고 있습니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의 근원인 완전의식은 마음의 세 가지 일시적인 상태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지속되며, 그럼으로써 그대가 동일성을 손상없이 보유할 수 있게 해줍니다.

완전의식은 또한 세 가지 상태를 넘어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상태들이 없어도 지속되고, 그것들이 있다 해도 그에 상관없이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소위 생시의 상태에서 아상을 그 근원까지 추적함으로써 추구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실재입니다. 이 탐구를 강렬하게 수행하면, 마음과 그것의 세 가지 상태가 실재하지 않으며, 그대가 곧 순수 존재의 영원하고 무한한 의식, 즉 진아 혹은 심장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슈리 라마나스라맘 엮음, 대성 옮김 <마하르쉬의 복음>​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