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지고의 상태

2019. 5. 24. 09:51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해탈 후의 헌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브라만이 되는 것이 해탈이다.

브라만은 우리가 타고난 이름이며, 헌신은 신과 스승에 대한 헌가 찬송을 뜻한다.

우리가 " 아무개 씨" 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사람 자신이 이제는 브라만이며, 그의 배우자는 락슈미이다.

이제 호흡을 포함한 그의 모든 행위는 신의 행위이다.

행위는 그가 없이 일어날 수 없다.

자신이 브라만임을 알 때, 여러분의 모든 행위는 부라만의 성품을 지니게 된다.

어던 사람은 진아지를 얻은 뒤에는 활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적합하다고 공언하면서 사회를 돌아다니지만, 그들은 분명 뭔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무지한 바보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옳지 않다.

진아지를 가진 사람은 있는 그대로 행동해야 한다.

무지한 사람처럼 행동하면서 돌아 다닌다면, 그가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주 라마, 주 크리슈나, 자나까 왕과 같이 지혜를 가진 위대한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의 삶을 영위했고, 왜 그렇게 했겠는가? 다른 위대한 스승들은 어떻게 행동하였나? 누구의 행동이 참으로 적절하였고, 누구의 행동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진아지를 가진 사람은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신의 성질들을 가졌으면 신처럼 행동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남들에게 알리게 위해 자기 팔을 자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는 데는 '내가 내 팔을 잘랐다'는 자부심이 있다. 이것은 에고를 내맡기는 방식이 아니다.

에고를 내맡기는 방식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이해 자체이다. 여러분이 이것을 알면 에고는 사라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과 자신이 포기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자동차가 자기 몸 위를 지나가게 하지만, 그것도 에고일 뿐이다. 자신이 뭔가 특이한 일을 했다는 에고가 있다.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이 참된 지(知)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이 길은 참스승이 베푸는 가르침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에고는 무기로써 잘라낼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잘려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를 통해서만 사라진다.

에고는 하나의 신화(그릇된 관념)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그것의 성품을 알면 에고는 사라진다.

그것이 에고의 방식이다.

일체가 신의 것이다.

'내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어떤 '나'조차도 없다.

진아지를 얻은 뒤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공언하면서, 남들을 인도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니,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나이든 아이가 더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스스로 더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하는가?  왜 지혜를 버리고 무지해지는가? 신만이 일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신이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이 다르다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신을 숭배해야 하고, 그래서 신은 우리에게 연민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

실은 일체가 신일 뿐이다. 그는 그 스스로 행위하고, 행위를 자극한다.

모든 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그 이다.

신은 이원성의 느낌, 즉 우리가 그와 별개라는 느낌을 용납할 수 없다.

지혜로운 자만이 참된 종교를 안다.

사람들은 "우리가 신을 목욕시켰다. 우리가 신께 음식을 드렸다. 우리가 이것을 다 하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거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는 손을 대면 안된다"와 같은 말을 많이 한다.

신이 손을 대면 안되는 어떤 사물이나 품목이 있는가?

어떤 것에 손을 대면 불순함의 영향을 받는 것은 누구인가?

신 외에는 어떤 '타자'도 없다. 일체가 신 자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먹고 식사하는 것도 그 일 뿐이다. 달리 누가 먹겠는가?

어떤 사람이 성자의 발 앞에서 절을 하면 사람들이 성자에게 묻는다.

"왜 이런 절을 하게 허용하십니까?" 그 답변은 어렵다. "보세요, 저는 신일 뿐입니다. 이 사람들이 저에게 절을 하면 그들이 해탈할 것입니다. 절은 저에 대한 의무가 아닙니다.  그들의 죄가 씻겨 나가고, 그들이 해탈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절을 하게 하는 것은 누구인가? 신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누구도 이유없이 어떤 사람에게 절을 하지는 않는다. 여러분이 절을 하기 때문에 그가 신인 것은 아니다. 그는 신이고, 먹고 마시는 것도 그이다. 그에게 비다('빤'이라는 빈랑나무 잎)를 드리면,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에게 드린 것임을 아는 것이 해탈 후의 헌신이다.

여러분이 신이 되면 신으로서 행동한다. 여러분이 구신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신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신이다. 행위함이 현자같은 사람이 현자이다.

고대의 위대한 분들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그 특정인의 화현으로 불린다.

만일 신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신의 화현이다.

그가 과거의 어떤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그 사람의 화현이다.

투까람처럼 행동한다면 투가람의 화현이다.

어떤 사람이 해탈 한 후에 신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신이다.

스스로를 화현이라고 칭한 사람들은 나와 같이 행동했다.

진실한 사람은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한다.

크리슈나는 자신이 신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늘 자신이 신이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이 신이라고 말했다.

지금 여러분은 그렇다고 말해주어야 알지만, 여러분은 자신을 신이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한다.

사람은 자신의 실제모습대로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의 견지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행위자가 없을 것이 보장된다.

여러분은 어떤 행위의 행위자가 아니다.

나는 모든 쾌락을 향유했기에, 향유자라는 느낌에서 벗어나 있다.

나는 심지어 세계들의 창조, 유지,해체 이후에도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다.

이 요가(단일성, 합일)를 모르는 사람은 슬픔을 겪는다.  이것은 끝없는 요가(합일)이다.

이 요가(합일)는 결코 상실되지 않는다. 

이 요가(합일)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주 시바와 나 자신, 우리 둘만이 이 요가를 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요가를 이해했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요가는 이 요가가 아니다.

이 의식의 상태를 웃다바는 완전히 흡수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참스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 불가사의한 비밀의 길을 만났다"

그와 주 크리슈나는 한 심장, 한 마음이었다.

그는 헌신이라는 큰 선물, 큰 열쇄를 얻었다.


주 크리슈나가  심장 속엥서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웃다바도 알게 되었다.

그는 진아의 적합한 상태를 이해했다.

진아의 참된 성품, 진아의 존재자체가 순수함을 이해했다. 그것과 섞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바로 그가, 그 자신의 진아, 그의 원초적 존재에 대한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을 지고아 빠라마뜨만, 곧 아뜨마람이라고 한다.

웃다바는 그것을 성취했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쉬 어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