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貪),진(嗔),치(痴)가 곧 불법(佛法)이다

2019. 5. 16. 12:06성인들 가르침/기타 불교관련글


[원문]

<제법 무행경>에 말씀하시기를 " 어떤 한 청정한 위의(威儀)를 지닌 법사가 있었는데, 중생들을 불쌍히 여긴 까닭에 거주하던 곳으로부터 항상 마을로 들어가서 걸식을 마치고 돌아와서 다시 백 천만이나 되는 가정들을 교화해서 모두 불자를 만들었다. 그래서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마음인 보리심을 내게 하였다.

그리고 또 위의를 지닌 비구가 있었는데 항상 절에 있으면서도 깨달음의 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다. 청정한 위의 법사의 제자들이 항상 마을에 들어가거늘 그들을 옳지못하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서 곧 목탁을 쳐서 대중들을 뫃아놓고 다음의 법을 제정하였다. '그대들은 지금부터 이후로 절대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라고 하였다.


[해설]

<제행무상경>의 말씀을 이끌어 대승적인 삶을 사는 법사와 소승적인 삶을 사는 비구를 들어 서로 비교하는 내용이다. 법사는 언제나 중생들이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존엄성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불쌍하게 연민하는 마음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마을에 내려가서 설법하고 교화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제도하였다. 이것을 본 소승 비구는 법사와 법사의 제자들이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자주 마을에 내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목탁을 쳐서 대중들을 모으고 다시는 마을에 내려가지 말라는 법을 정하였다. 사람들에게 널리 부처님의 정법을 가르치기 위한 일인데도 그것을 봐주지 못하는 속 좁고 아량이라고는 전혀 없는 맹꽁이다. 사찰에서는 대중들이 회의(대중공사)를 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을 때 목탁을 친다. 한 번 내리면 공양을 알리는 것이고, 두 번 내리면 운력(運力)을 알리는 것이고, 세 번 내리면 회의를 알리는 것이다. 경전에서의 비구는 주로 소견이 꽉 막힌 소승적 삶의 사람으로 등장한다. 경전상의 대체적인 표현이 상당히 일리가 있다. 출가한 비구들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표현한 내용과 유사한 비구들을 많이 본다. 반대로 법사는 승속을 막론하고 대체적으로 소견이 툭 터지고 마음씀이 시원시원하다. 소소한 규칙으로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일은 없다. 사람이 소중하기에 사람을 위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 좁은 비구들은 사람보다 규칙과 법을 우선한다.

[원문]

"그 뒤 청정한 위의 법사가 우연히 그 비구를 만났다. 비구가 대승계법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고는 무리를 해서라도 게송을 설해서 대승법의 종자를 심어주고자 하였다. 그는 반드시 믿지 않고 비방하여 지옥에 떨어질 것이고 지옥의 죄업이 끝나고는 이 대승법을 들은 인연으로 도를 깨닫는 씨앗이 도리라고 여겼다."

[해설]

진리의 가르침인 대승법을 비방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꼭 지구상 어디에 유형의 지옥이 있고 그와 같은 지옥에 어떤 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그곳에 가서 무슨 특별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살면서 그리고 인생을 살면서 참다운 이치(眞理)를 등진 사람이란 모든 것이 불합리적이고 순리를 거스르면서 억지를 부리고 무리수를 두면서 욕심만을 채우고 목적만을 달성하려다가 폐가망신하고 가족이나 친척, 이웃에게 까지 슬픔과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가져오게 하는 그런 삶이다.

<지장경>에 근거하여 지장전에는 온갖 무서운 지옥의 광경들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받는 심리적인 현상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으로 받는 고통과 아픔이 지장전의 그 무서운 그림보다도 더할 때가 많다. 육신의 고통이야 심하면 기절하게 되어 있다. 고통 때문에 기절했다가 고통때문에 다시 깨어난다. 이러한 일이 하루 동안에 무수히 반복하는 것을 '일일일야 만사만생(一日一夜萬死萬生)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음으로 받는 고통은 정신을 병들게 하여 저 깊은 제8아리야식(藏識)에까지 깊히깊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가 다음 생, 또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그런 마음이 생을 거듭하면서 까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무몰식(無沒識)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이 자신의 분과 인연을 무시하고, 또한 자신의 역량을 돌보지도 않고 참다운 이치를 등지면서 순리를 거스르고 무리하게 목적만을 생각하거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온 교훈이 '수연무작(隨緣無作)'이다. 즉 인연과 자신의 분과 역량을 따르면서 억지 부리지 말고 순리대로 살라는 뜻이다. 이 글에서 대승법을 비방하여 지옥에 간다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하리라.


[본문]

그 게송은 이렇다.

"탐욕이 곧 도(道)다.

진심 내고 어리석음도 또한 도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법 안에

일체의 불법을 모두 갖췄다. "


頌曰(송왈) 貪欲卽是道(탐욕즉시도)요 嗔恚亦復然(진에역부연)이라

如是三法中(여시삼법중)에 具一切佛法(구일체불법)이라 하니라.


[해설]

독자들은 놀라지 말라. 이 말씀은 분명히 영명연수선사가 인용한 <제법무행경>이라는 경전의 글이다. 만약 이 말이 진리의 가르침이 아니고 불교가 아니라고 여겨지거든 경전 속의 비구처럼 비방을 하라. 비방을 하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을 것이며 비방을 한 인연으로 반드시 성불하리라. 비방만 하더라도 항하강의 모래수처럼 많은 부처님께 수 억조의 돈을 들여서 불공을 올리는 것보다 그 공덕이 천배 만배 수숭하리라.

<보살계를 받는 길>의 명문은 여기가 절정이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의 절정이다. 팔만장경과 조사어록이 여기에 이르러서는 천리 이상 물러설 수 밖에 없다. 어떤 대승경전과 선문어록이 이 도리를 능가하겠는가. 불법지견은 이제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다.

하지만 알고 보면 불교의 교과서인 <금강경>에도 이미 말한 바 있다.

"일체의 법(탐심,진심, 어리석음, 삿된 견해, 그리고 말만사천 번뇌 망상 모두) 이 모두가 불법이라( 一切法皆是佛法)" 고 하였다. 탐심, 진심, 어리석음, 삿된 견해 등을 부리고 작동하는 그 사람 그 당체야 말로 오롯이 진리요, 도요, 불법이기 때문이다.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은 일반 불교에서 누누히 말하는, 떠나보내야 하고 버려야 하고 제거해야 하고 없애야 하는 번뇌 중의 번뇌며 모든 번뇌무명의 원조다. 그런데 어떤가. 그것이 도며 진리며 불법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언제 알았던가. 그리고 그것을 버리고 없앤 사람은 과연 있는가? 없앨 필요는 과연 있는가? 그것이 없어지기는 없어지는 것인가?

실지로 있기는 있는 것인가? 아니다. 모두가 아니다. 탐진치 삼독이 우리들의 삶이며 도며 진리며 불법이다. 없애기는 왜 없앤단 말인가, 또한 없애야 할 정도로 확실하게 존재하는 것이 사실인가?

이와 같은 최상승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받아들일 사람이 과연 몇인가? 청정비구도 외도의 소리라고, 마구니의 말이라고, 미친 사람의 잠꼬대라고 비방을 하였다. 비방을 하고도 그 공덕이 한량없었다. 우리 독자들도 그냥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비방합시다. 비방하고 지옥에 잠깐 갔다가 그 후에는 한량없는 공덕을 누립시다. 그리고는 성불합시다. 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예전에 그랬듯이.


[본문]

"그 훌륭한 비구가 그 게송을 듣고 나서 비방하였다. 비방한 업 때문에 죽고 나서는 그 과보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지옥에서 구십 백 천겁 동안 온갖 고통을 받다가 다시 지옥에서 나와서 육십삼만세를 항상 남들로부터 비방을 받았다. 그리고는 죄업이 점점 가벼워져서 드디어 비구가 되어 삼십이만 세를 출가하여 지낸 뒤, 이 업의 인연으로 다시 세속에 돌아가서 한량없는 천만 세를 육근이 우둔하여 미련하게 살았느니라. 사자유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때의 그 비구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놀라지 말라. 내가 바로 그 비구였느니라."


[해설]

게송 하나 듣고 비방했다가 그 과보로 지옥생활을 어지간히도 오랫동안 하였다. 하지만 경전에 기록된 대로 실지로 그와 같은 긴 세월이었을까. '일일이 여삼추'라는 말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은 왜 그리도 빠르며, 미운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왜 그리도 더디던가.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사람이 상대성의 원리를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고 들었다. 객관적인 시간이란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아니 시간이란 것이 본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설사 구십백천겁을 지옥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객관적인 시간은 불과 몇칠인지 모른다. 구십 백 천겁이란 우리들이 사는 이 지구가 생기기 훨씬 이전의 시간이다.

그가 어떤 세월을 얼마동안 살아왔든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탐진치 삼독과 온갖 번뇌가 그대로 진리며 불법이라는 사실과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질곡의 세월을 살아 온 사람이 다름 아닌 삭가모니 자신이라고 밝힌 사실이다. 경전에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때의 그 비구가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놀라지 말라. 내가 그 비구였느니라" 라고 하였다. 비록 최상승의 큰 법을 듣고도 그 때 받아들일 수 없어서 비방도 많이 하였으나 최상승의 가르침을 비방한 그 인연으로 어느 날 어느 순간 다시 최상승의 가르침을 듣는 순간 마치 육조혜능대사 이상으로 빠르게 이해하고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술회하고 있다. 독자는 이 사실을 주목하고 또한 깊히 사유하여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하리라.


[본문]

"내가 그 때에 조그마한 나쁜 마음을 일으켜서 이러한 죄업을 받아서 지옥에 떨어졌으니 만약 누구라도 조그마한 죄업이라도 일으키지 않으려면 훌륭한 법을 설하는 그런 보살에 대해서 나쁜 마음을 내지 말라. 그리고 보살이 행하는 길을 모두 마땅히 믿고 이해하여 절대로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말라. 여래는 이러한 이익을 보아왔기에 항상 이 법을 설한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라, 이 대승법을 들은 인연으로 부처를 이루었다. 듣고 비방만 하더라도 오히려 부처를 이루었는데, 어찌 하물며 지극한 정성으로 들으려 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겠는가.


[해설]

길게 이어지던 <제행무상경>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났다. 이야기의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궁금해 하지 말라. 경전의 가르침은 언제나 의미전달에 그 목적이 있다. 세존이 대승법의 가치와 존귀함을, 즉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심어주기 위해서 얼마든지 이야기를 꾸밀 수도 있다.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야기꾼이 아니던가. 이야기가 끝나는 대목에서 언제나처럼 듣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누구라도 조그마한 죄업이라도 일으키지 않으려면 훌륭한 법을 설하는 보살에 대해서 나쁜 마음을 내지 말라. 그리고 보살이 행하는 길을 모두 마땅히 믿고 이해하여 절대로 원망하거나 분노하지 말라." 라고 결론지었다.

훌륭한 법, 즉 대승법이란 이 법을 통해서 부처가 되었으니 곧 부처가 되는 법이다. 부처가 되는 법은 다름 아닌 사람 사람이 본래로 부처라는 사실에 대해서 믿고 이해하는 가르침이다. 비방하다가 먼길로 돌아 오느니 이왕이면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믿고 이해하고 구할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보기 어렵고 듣기 어려운 귀하고 귀한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진리를 전해줘야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기울려 보살의 길을 가야하리라.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보람이 무엇인가. 참으로 의미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훌륭한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나눠주는 일이다. 부처님은 모든 공양 중에 언제나 법공양이 제일이라고 하였다. 식사 한 끼를 대접하는 것과 진리의 말씀을 한 끼 대접하는 것을 가만히 비교해서 생각해 보라. 그 무겁고 가벼운 것은 스스로 알리라.


           - 영명연수선사 원작, 여천무비스님이 풀어 쓴<보살계를 받는 길>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