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강선사의 <화두 드는 법>

2019. 4. 15. 10:56카테고리 없음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에게 묻되,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답하시되 [무(無)]하셨으니, 이것이 무자(無字)화두의 시초입니다.

종문중(宗門中)에서 이 <무>자를 제일 많이 칭찬을 해놓았으니

<무>자 화두에 대해서 말씀해 보면 부처님께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스님만은 왜 <무(無)>라고 하셨겠습니까?

이 <무>자에 대해서 있다 없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없다, 허무(虛無)다,

이와 같이 이리저리 두 갈래로 분별하지 말고 능소(能所)가 끊어지고 상대도 없이 다만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하고만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공(空)도 또한 거둘 수 없으며 유상(有相), 무상(無相)을 붙일 것도 없습니다.

필경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이 남으니 이것만 추켜들어야 합니다.

조주스님은 어째서 <무>라고 했을까요?

만약 조주스님의 <무>라고 하신 도리를 입껍데기만으로 따져서 알았다고 한다면

타일(他日)에 염라대왕의 철방망이를 맞을 것입니다.

한번 조주스님의 무(無)라고 하신 뜻을 바로 보아야 생사해탈을 하는 법입니다.

삼세제불의 골수요, 역대조사의 안목입니다

무(無)라고 말할 때 이미 그 의지가 확 드러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특한 사람이면 당장 언하에 대오할 것입니다.

이 무자화두에 대해서 별별 해석이 다 나와 있습니다.

혹자는 자물쇠통이다, 일체를 쓸어 버리는 쇠빗자루이다. 나귀를 매어 두는 말뚝이다 등등의 한량없는 말들이 나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여기에 삼십방을 주겠습니다.

무자화두하는 학자들이여 조주스님의 무라고 하신 그 의지가 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실 엉뚱한 곳에 있는 것이니 제발 조주스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쓸지언정 무자에 떨어져서 광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를 재삼 부탁합니다.

이 무자 화두 지어감에 좋은 비유설화가 있으니 옛날 중국의 당나라에 천하일색인 양귀비가 있었는데 당현종의 애첩으로 궁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이 양귀비와 정부 안록산은 서로가 보고 싶어 못견딜 지경이었습니다.

頻呼小玉無他事(빈호소옥무타사)라

只要檀郞認得聲(지요단랑인득성)이로다.

자주 소옥이를 부르는 것은 다른 일이 아니라

다못 낭군이게 소리를 알리고자 함이로다.

양귀비는 자기의 종인 소옥을 아무 할 일 없이 큰 소리로 몇번이고 되풀이해서 자꾸 부릅니다.

양귀비는 왜 소옥이를 그렇게 부를까요? 다만 낭군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양귀비의 뜻이 소옥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소옥을 통해서 자기의 음성을 안록산에게 알리는데 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자 화두는 무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에게 뜻이 있는 것이니 무라는 말을 천착(穿鑿)하지 말고 무(無)라 말씀하신 조주스님의 의지를 참구해야 합니다.

또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 어떤 것이 조사서래의 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 하니

답하시되 "판치생모(板齒生毛)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조주스님은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을까요?

이 화두도 무자 화두와 같이 판치생모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판치생모>라고 말씀하신 조주스님께 뜻이 있는 것이니 학자들은 꼭 조주스님의 뜻을 참구해야 합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하는 것과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하는 것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두를 지어감에 망념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살이 전체가 망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화두가 잘 된다 잘 안된다 망상이 생긴다 마음이 산란하다 등의 생각이 있으면 화두의 순일지묘(純一之妙)가 없게 되는 것이니, 일어나는 망념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상관도 말며 두려워도 맙시다.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저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간절히 간절히 일으킬 것이며, 없어지거든 또 일으키고 부지런히 거각하며 끊어지지 않게만 자꾸 이어주십시오. 이렇게 오래 오래 물러나지만 않고 해나간다면 견성 못할까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옛 선사의 말씀에

" 만약 능히 신심만 물러나지 않는다면 누가 견성성불을 못하리오(若能信心不退 誰不見性成佛)"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공부를 지어감에 속효심(速效心)을 내기가 쉬우나 이는 절대 금물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마음이 급해지고 생각이 쉬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화두는 점점 떨어지고 자리가 잡혀지지 않게 됩니다.

또 공부 지음에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망념은 할 수 없거니와 '크게 깨달아야겠다'라는 망념을 고의로 일으킬 필요는 없습니다.

좌선할 때 눈을 감고 하는 수가 많은데 눈을 감고 하면 혼침(昏沈)과 무기(無記)에 떨어지기가 일쑤며, 또한 흑산하귀굴(黑山下鬼窟)에 떨어진다고 고인이 밝게 말씀하셨으니, 두 눈을 평상으로 뜨고 허리를 쭉 펴고 맹렬하면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알 수 없는 의심 하나만 깨끗이 자꾸 일으켜 매하지 않게 하십시오.

흔히들 화두를 머리에 두고 참구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에 속효심이 가해지게 되면 상기(上氣)가 일어나게 됩니다.

모든 열기가 전부 머리로 치밀게 되어 머리 아픈 병이 생기게 됩니다.

이 상기병이 생기면 공부하기가 지극히 힘이 듭니다.

심하면 머리로 출혈이 되며 몸은 걷잡을 수 없이 쇠약해 집니다.

내가 소시에 이 상기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헤아릴 수 없는 해를 받아 왔으나 결국은 자치지방(自治之方)으로 완치시겼습니다. 그 자치지방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호흡법입니다.

이 호흡법은 참선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간곡히 말합니다.

정좌(正坐)하여 숨을 천천히 내어쉬되 단전부위를 허리 쪽으로 살며서 당기면서 천천히 내쉽니다.

그 다음 들어오는 숨은 팔부쯤 들어 마십니다. 그때 자기 신체기량에 따라 잠깐 멈추되 고통스럽지 않을만큼 하면 족합니다. 이때 화두는 단전(배꼽 밑 일촌 삼푼)에 두고 의심을 잘 관(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호흡법은 숨을 내쉴 때 묘가 있는 것이니 코에 부드러운 털을 대어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천천히 쉬되 이때도 화두를 잘 관해야 합니다.

들어가고 나오는 숨에는 상관하지 말고 오직 단전에 둔 의심만을 묘하게 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잘 되지 않으나 언제든지 생각이 나거든 서너번씩 하다가 차츰 길들여 가면 머리가 청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지며 눈이 깨끗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나중에 화두가 순일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흡이 자연히 잘 됩니다.

                                                                             -고승 법어집(전강선사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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