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 29. 20:45ㆍ성인들 가르침/화두선 산책
ㅇ. 설봉선사
한 스님이 스님께 묻기를
“스님께서 요점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하자
설봉스님이 “이것이 무엇인가?” 하니
그 스님은 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다.
-설봉록-
ㅇ. 화두의 기본, 시심마(是甚麽), 이 뭣고, 이것이 무엇인가?
시(是)는 언전대기(言前大機)인 반야지혜로서 일체만법을 들이고 내는 당처이며,
제불보살의 불모(佛母)로서 ‘이 뭣고’는 반야지혜를 살려 쓰는 대활구(大活口)이다.
호미 들고 밭메러 가는 것도 생사해탈 도리
생활 속 마음챙김이 모든 장애 벗어나게 해
시(是) 속에는 부처님 암호밀령(暗號密令)이 다 들어 있고,
부처님의 지혜와 복덕이 구족(具足)되어 있고,
과거 억겁으로 부터 지어온 업장과 습기와 번뇌망상을 모두 녹여 주는 자가 발전소이며,
지혜광명이 천남(千萬)의 태양보다 더 밝게 항상 비춰준다.
또한 아프면 약사여래불이, 소원을 이루고자 하면 관세음보살이 자동적으로 되어준다.
‘이 뭣고’ 시심마(是甚麽)는 내가 누구이며, 참나를 찾는 수행이며,
시는 인과를 벗어난 인과불낙(因果不落)의 자리이다.
남악 회양선사가 육조 스님을 찾아갔을 때 육조 스님이 “시심마물임마래(是甚麽物恁麽來)”하고 물었다.
즉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고 물으니, 회양선사는 입이 딱 막혀 대답을 못하고,
“이 물건이 무엇인고?” 즉 ‘이 뭣고’ 화두를 갖고 8년간 고행(苦行) 끝에 확철대오 하고
다시 찾아가 “설사일물즉부중(設似一物卽不中)”이라,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하니
육조 스님이 “도리어 수증할것이 있느냐?”하고 물었다.
회양선사가 “수증즉불무(修證卽不無) 오염즉불(汚染卽不)=닦고 증(證)하는 것이야 없지는 않습니다만 오염(汚染)될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즉 일여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갖고 자타(自他), 고하(高下), 시비(是非)하는 것은 없습니다고 하여 인가(認可)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이 뭣고’ 화두가 유래된 것이다.
이후 대혜종고 스님에 이르러 간화선이 체계화 됐으며, 서장서 화두의 역할은 분별(分別) 망상(妄想)을 확실하게 때려잡는 무기(武器) 즉 청룡보검으로 간화선을 정의하였고, 좌선 만을 강조하지 않고 언제 어디에서나 화두를 놓치지 않을 것을 주문하였다.
한암 스님의 서신 중에도 “꼭 부처님 앞에서 참선해야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무를 보거나 일을 하는 복잡한 가운데서 득력하는 것이 적정한 곳에서 좌선하는 것보다 10만배나 더 힘이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강 선사께서도 “참선은 농사지으며 왜 못혀? 생활 참선을 해야 하는 것이지. 다 끊고 여의고 돌아와서 가만히 혼자 앉아서 이 뭣고만 하는 건 그건 쪼가리 참선이요, 절름바리 참선이요, 소승참선 이지, 대승참선이 아녀. 농부가 쟁기를 지고 논 갈러 가는 것도 생사 해탈의 도리요, 여인네가 호미 들고 밭 메러 가는 것도 생사해탈의 도리요, 숟가락 들고 밥 먹는 것도 생사 없는 해탈의 도리인데 일체가 무엇이 아닌 것이 있으리오. 뭐 아무것도 힘든 것도 없고 내 찾는 법이 그려. 그저 ‘이 뭣고’ 알수 없는 놈 하나면 그만이여. 밥 먹고 옷 입고 오고가는 소소영영한 주인공, 이것이 도대체 무슨 물건이냐? 알수 없거늘 제가 무슨 이치를 붙여서 죽이지 말고, 대답하려고 애쓰지 말고 알 수 없는 그 놈 하나를 갖고 비비고 나가라”고 하셨다.
간화선 ‘이 뭣고’ 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불자에게도 정치나 사업, 직장, 학업등 에서 막히는게 없게 해주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장애서 벗어나게 한다. 이것을 등지면 무엇을 하든 엎어지고 넘어지고 만다.
그때마다 ‘아이고’라는 자조와 한탄 대신 ‘이 뭣고’가 자동적으로 나오도록 하여야 한다
-청운스님의 <이뭣고 수행법>-
ㅇ. 용성선사
1.시심마(是甚麽-이것이 무엇인가?) 화두(1)
대개 마음 닦는 사람들은 먼저 공부하는 길을 자세히 선택하여 바른 길을 걷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헛고생을 아니하고 탄탄대로로 걸림없이 간다.
수도인들은 자세히 들어보라.
사람 각자마다 한 물건이 있으니 천지와 허공을 온통 집어삼켜 있고, 또 가는 티끌 속에 들어가도 다 차지 않는다.
밝기는 태양으로도 견주어 말할 수 없고, 검기는 칠통보다 더 하다.
이 물건은 우리가 옷 입고 밥 먹고 잠자는데 있으되,
이름 지을 수 없고 얼굴을 그려 낼 수 없다.
이는 곧 마음도 아니요, 생각도 아니요, 생각 아님도 아니요,
불(佛)도 아니요, 불 아님도 아니요,
하늘도 아니며 아늘 아님도 아니며,
귀신도 아니요 귀신 아님도 아니며,
허공도 아니며 허공 아님도 아니요,
한 물건(一物)도 아니며 한 물건 아님도 아니다.
그것이 종종 여러가지가 아니로되
능히 종종 여러가지를 건립하나니
극히 밝으며, 극히 신령하며, 극히 비었으며, 극히 크며, 극히 가늘며, 극히 강(剛)하며, 극히 유(柔)하다.
이 물건은 명상(名相-이름과 모양)이 없으며, 명상 아님도 없다.
이 물건은 마음있는 것(有心)으로도 알 수 없고,
마음 없는 것(無心)으로도 알 수 없으며,
말로도 지을 수 없고,
고요하여 말없는 것으로도 알 수 없으니,
'이것이 무엇인가?'의심하고 또 다시 의심하되
어린 아이가 엄마 생각하듯 이 간절히 하며,
닭이 알을 품고 앉아 그 따듯함이 끊이지 아니한 것과 같이 하면
참나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연적인 본성)을 깨친다.
수도인들은 또 다시 나의 말을 들어보라.
우리가 공부하며 닦는 것은 삼장십이부경전(三藏十二部經典)에 상관이 없고,
오직 부처님께서 다자탑(多子塔: 인도의 왕사성에 사는 어떤 부호인 장자가 아들과 딸 등 30인이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벽지불을 증득하였을 적에 그 권속들이 그들을 위하여 세운 탑이므로 다자탑이라고 이름하였다) 앞에서 자리의 반을 나누어서 영산회상(靈山會上 : 부처님께서 마갈타국의 영취산에 계시면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설법하시던 모임)에서 꽃을 들으시고, 사라쌍수(沙羅雙樹 : 석가모니가 쿠시나가라성이 있는 니련선하강을 건너 사라수 나무 사이에서 일멸한 장소)에서 관으로부터 두 발을 내어 보이시니 이것을 전하여 오는 것이 우리가 믿으며 행하는 바다. 출격장부(出格丈夫)들은 알게 되면 곧 알것이어니와 모르거든 의심하여 보라.
사리불같이 지혜있는 사람이 모든 세상에 가득하고 티끌 수와 같은 많은 상사(上士)라도 조금도 알지 못하며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도 이 물건을 알지 못하나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모든 도인들은 알거든 내어 놓고, 모르거든 의심하여 보라.
부디 공부하는 도인들은 보는대로 듣는대로 모든 경계를 따라 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지말라.
또 소소영령(昭昭靈靈 : 소소는 밝은 모양이고 영령은 정신작용의 불가사의 함, 즉 심식(心識)이 미묘하여 또렷또렷한 양상을 형용하는 말)한 놈이 무엇인가 하지 말며, 또 생각으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들여다 보지 말라.
또 화두 할 때에 잘 되고 못되는데 대하여 이해(利害)를 취하지도 말며,
또 고요하고 안락함을 취하지도 말라.
또 공부하다가 마음이 텅 빈 것을 보고 견성(見性)하였다고 하지 말라.
이 물건은 모든 깨달음의 말로도 미치지 못하고
모든 팔만대장경에도 그려내지 못하였다.
'이 물건이 무슨 물건인가?' 이와같이 의심하라.
어떤 사람이 묻되,
어떠한 인유(因由)로 보고 듣는 놈이 무엇인가? 하지 말며,
소소영령한 놈이 무엇인가? 하지 말라 하며,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보지 말라 하는가요?
용성이 답하되,
육근(六根: 眼耳鼻舌身意根)이 경계를 대함에 그 아는 분별이 나타남이 한정이 없거늘 그 허다한 경계를 좇아가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찾으면 그 마음이 어지러울 뿐만 아니라 그 화두도 일정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다가 혹 육근문두(六根門頭)에 아는 놈을 가지고 자기의 본면목(本面目)으로 그릇되이 알기도 쉽다.
그렇지 않으면 고요한 것으로 자기의 본성(本性)을 삼기도 쉬우며,
그렇지 아니하면 공(空)한 것으로 본성을 그릇 알기도 쉽다.
그렇지 않으면 맑은 것으로 자성을 깨쳤다고 하기도 쉽다.
마음이 스스로 내가 소소영영하다고 하지 아니하거늘 무슨 일로 소소영령하다고 하는가?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찾아서 비추어 들여다 보지 말라.
혹 맑은 생각으로 밝고 맑은 것을 보아 그곳에 집을 짓고 들어 앉아 있기도 쉽다.
설사 일념당처(一念當處)가 곧 공함을 깨쳤다 할지라도 확철대오가 아니다.
육조대사께서 말씀하시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잇는데 위로 하늘을 받치고 아래로 땅을 괴었으며, 밝기는 일월같고, 검기는 칠통과 같아서, 항상 나의 동정(動靜)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 " 하시니 회양선사는 이를 알지 못하여 팔년동안 궁구하다가 확철대오 하였으니 이것이 화두하는 법이다.
이 물건은 육근(六根)으로 구조(構造)된 놈(육체)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이 없이 항상 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상관없이 항상 있으며, 공하고 공하지 아니한 것에 상관없이 항상 있다.
허공은 없어져도 이 물건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밝은 것은 무량한 일월로도 비교할 수 없고, 검은 것은 칠통과도 같다고 할 수 없다. 참으로 크도다. 천지세계와 허공을 다 삼켜도 삼킨 곳이 없다.
참으로 작은 것이다. 가는 티끌에 들어 갔으되 그 티끌 속에도 보이지 아니한다.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단지 의심하여 볼지어다.
추호(秋毫)라도 달리 아는 마음을 내지 말고 단지 의심이 큰 불덩어리같이 의심만 할지어다.
단지 은산철벽(銀山鐵壁)같이 하여 발붙이지 못할 곳을 향하여 뚫어 들어갈지어다.
묻기를,
천지와 허공을 온통 집어먹고 있다 하니, 이것이 나의 본원(本源) 각성(覺性)이 아닌 가요? 나의 참마음 아닌가요?
용성이 대답하되,
이것은 너의 지해(知解)가 아닌가?
네가 참으로 증득한 것인가?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이 서울을 보지 못하고 서울을 본 사람에게 서울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서울을 자세히 본 사람은 서울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니 그 서울을 아니 본 사람이 서울의 남대문이 어떻고, 종로가 어떻고, 대궐이 어떻다고 하는 말을 들어서 알았다. 그러면 그것이 서울을 친히 본 것이 되는가?
성인이 마음이니 성품이니 말씀하셨는데 그 말만 듣고 그 말만 옮기면 성인이 되는 것인가? 본성이 어느 때에 내가 본성(本性)이라고 말하던가?
이것은 사람이 명상(名相)을 지어 마음이다, 성품이다, 여러가지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명상을 짓기 전에는 무슨 물건인가?
네가 궁구(窮究)하여 진실히 깨치고 진실히 증득하여서 될 일이 아닌가?
이 일은 말로 지어 꾸며도 될 수 없고 말이 잠잠하여 고요한 것으로도 될 수 없으며, 있는 마음으로도 될 수 없고, 없는 마음으로도 될 수 없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궁구하여 볼지어다.
이것은 모든 성인도 알지 못한다 하거늘 네가 아는 것으로 알 수 있는가?
그 의미가 깊도다 !
모든 성인이 참으로 몰라서 모른다는 말도 아니며, 알아서 안다는 말도 아니니, 그대가 이 물건을 아는가? 이것은 물건도 아니므로 말로 그려 낼 수 없다.
이 물건을 아는가?
이것을 그려 낼 수 없다고 하나 깨친자는 분명하다.
비유를 들면 저기 철로(鐵路)가 있고, 철로 위에는 차(車)가 있고,
차에는 화통(火桶)이 있고, 화통 속에는 석탄과 물이 있어서 물이 점차 줄어간다.
그러나 차가 가지 않는다. 어찌하여 차가 가지 아니하는가?
사람이 기계를 부리지 아니하면 차가 가지 않는 것이다.
(客) 예 그렇습니다.
사람이 몸을 가지고 동작(動作)하여 앉고 눞고 다니니 몸이 능히 동작하는 겁니까?
(용성) 그렇지 않다. 저 차와 같다.
(客)그러면 동작이 무엇을 하는가요?
(용성) 그것은 나한테 물을 것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몸을 능히 운동시키는 것을 찾아 보고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 의심하여 보라.
어찌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가? 내가 열성으로 권하노니 부디 찾아 보라.
몸은 아침이슬과 같고 명은 서편에 넘어가는 햇빛과 같으니 어서 찾아 볼지어다.
어떤 사람이 묻되,
좋은 화두가 따로 있다지요?
용성이 말하되,
그런 말 하지 말라. 화두가 어디 좋은 화두가 따로 있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말하되,
나는 시심마(是甚麽)가 무자(無字) 보다 못한 줄 알았읍니다.
용성이 말하되,
다시는 그런 사견(邪見)을 내지 말라. 좋고 나쁜 것은 사람에게 있고 화두법에는 없는 것이다. 용성이 거금(距今) 사십년 전에 선지식(善知識)을 찾으러 사방에 다니니 그 행색(行色)은 떨어진 옷을 입고 걸식을 하였으나 나의 직분에 만족하였다. 청천에 날으는 학(鶴)과 같이 백운(白雲)으로 벗을 삼고, 사방팔방을 두루 다니니 청풍명월이 나의 집이었다.
한 선지식을 친견하고 법을 물으니 그 선지식이 이르기를 "시심마 화두는 사구(死句)요, 무자 화두는 활구(活句)다." 하거늘, 용성이 정색으로 대하여 이르기를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겟읍니다. 그럴 이치가 만무합니다. 시심마는 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 줄로 아옵니다.
시심마 화두가 사구로 확정될 것 같으면, 남양회악성인이 숭산(崇山)으로부터 왔거늘 육조성사(六祖聖師)가 물어 말하되 " 네가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하시니, 이에 회양께서 망지소조(罔知所措)하여 팔년동안 궁구하다가 확철대오하여 육조성사의 적자(嫡子)가 되시니 도(道)가 천하에 으뜸이라. 어찌 사구에서 깨치시고 활구문중(門中)에 동량(棟樑)이 되리오?
시심마가 활구로 확정될 것 같으면, 육조성사께서 하루는 이르되,
"나에게 한 물건이 있으되 천지의 주(柱)가 되며, 일월같이 밝으며, 칠통같이 검으며, 두미(頭尾)와 면목(面目)이 없으나 우리들(吾人)의 동용중(動用中)에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하시니, 하택신회사(荷澤神會師)는 나이가 칠세였는데 곧 나와서 정례하고 대답하되,
"삼세각(三世覺)의 본원(本源)이요, 신회의 각성(覺性)입니다."하였다.
육조성사께서 이르시되,
"네가 종사관을 머리에 쓰고 학자(學者)를 제접할지라도 지해 종사(知解宗師) 밖에는 되지 못하리라." 하시니 어찌 활구문중에서 깨치고 사구문중에서 지해 종도가 되겠읍니까? 사구이니 활구이니 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선지식이 말하되,
"시심마는 병통이 많다"하거늘,
용성이 이르되,
무슨 말씀입니까?
선지식이 말하되,
"요즈음 깨쳤다고 하는 것이 시심마 하는 사람에게 유독 많다."
용성이 말하되,
시심마를 어떻게 알기에 그렇단 말씀이옵니까?
선지식 대답하되,
"이것이 무엇인고?" 하셨다.
용성이 이르되,
무엇을 가지고 무엇이라 하나이까?
선지식이 말하되,
"혹 소소영령한 놈이 무엇인고? 혹 이 보고 듣는 놈이 무엇인고? 혹 이 생각하는 놈이 무엇인고?" 하셨다.
용성이 대답하되,
가탄(可歎) 가탄(可歎)할 일이올시다. 화두를 이와같이 궁구하거든 어찌하여 병통이 없겠읍니까? 육근문(六根門)의 머리에 아는 빛과 그림자의 식이 경계를 좇아 감각하는 대로 이것이 무엇인고? 하며, 또 뜻뿌리(意根)에 분별하는 그림자 식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인고? 하며, 또 생각으로 염(念)이 일어나는 뿌리(根)를 들여다 보며 이것이 무엇인고? 하며 찾으니 이것으로부터 병이 많이 납니다.
이런 사람은 공한 병이 아니면 맑은 병이며, 그렇지 아니 하면 소소영령한 것을 지키는 병이 허다합니다.
이와같은 것으로 어찌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증득(證得)하오리까?
천칠백화두(千七百話頭)에 그 참구(參究)하는 법은 통털어서 하나이니 어찌 다름이 있사오리까?
시심마(이것이 무엇인가?)는 한 물건을 알지 못하여 참구하는 것이니 위에서 이미 말하였기 때문에 그만 두리라.
2. 시심마 화두가 백천 화두의 근본이 된다함을 간택함.
어떤 사람이 묻되,
백천화두에 시심마가 아니 들어가면 화두가 되지 아니한 줄로 생각합니다.
용성이 대답하되,
내가 그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겟다.
그 사람이 말하되,
"이 무엇고?"하지 아니하면 무엇을 가지고 의심하리오?
가령 무자(無字)화두를 할지라도 '무'가 무엇인고 하든지,
'무'가 무슨 도리인고 하든지 그렇게 하여야 화두가 됩니다.
용성이 묻되,
누가 화두를 그 모양으로 가르치던가?
그 사람이 대답하되,
현금(현금)에 선지식으로 저명한 모모(某某)가 이와 같이 가르치나이다.
용성이 이르되,
화두하는 법도 자세히 모르고 학자(學者)들을 거느리고 앉아서 도를 가르치는 것은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한 장님이 여러 사람을 끌고 불 구덩이로 들어가는 격으로 화두에 시심마가 들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하니, 그러면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화두를 하는 사람은 잣나무가 이 뭐꼬? 하며, 마삼근(麻三斤) 화두하는 사람은 삼서근이 무엇인고? 하고, 건시궐(乾屎木厥) 화두하는 사람은 마른 똥막대기가 무엇인고? 하겠구나.
그래서 잣나무와 삼 서근과 마른 똥막대기를 알지 못해서 이것을 알자고 '뭐꼬?' 하는가? 참으로 알자면, 산이나 물이나 들이나 일체 만물을 다 할구로 알기는 어렵지만은 그렇게 화두를 하는 법은 아니다.
또 네가 '무'자를 알지 못하여 '뭐꼬?'하는가?
일체 화두에 시심마를 넣어서 의심하지 아니하여도 화두마다 제 화두에 의심이 있는 것이다.
-용성스님의<수심정로>-
ㅇ. 마조 선사
서산(西山) 양좌주(亮座主)가 42종의 경전을 강설하고 마조(馬祖)를 뵈러 갔더니, 마조가 물었다.
"듣건대, 대덕이 많은 경론을 강의했다는데 사실인가?"
좌주가 대답했다.
"변변치 못합니다"
마조가 묻되
"무엇으로 강의를 하는가?"
좌주가 대답하기를
"마음으로 강론합니다."
마조가 말했다.
"마음은 공교한 배우같고, 뜻은 장단치는 자 같거늘, 그것들이 어떻게 강론을 하는가?"
좌주가 말하되
" 마음이 강의하지 못하면 허공이 강의를 합니까?"
마조가 대꾸했다.
"허공이 강의한다"
이에 좌주가 화가 치밀어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거늘, 마조가 좌주를 불렀다.
좌주가 고개를 돌리니, 마조가 말하기를
"무엇인가?"
하였다. 이에 좌주가 크게 깨닫고 온 몸에 땀을 흘렸다.
양좌주는 절에 돌아 와서 대중에게 선언했다.
" 나의 평생 공부에 아무도 나를 따를 이 없으리라 여겼는데, 오늘 마조의 한 마디 질문을 받고 평생 공부가 얼음 풀리듯 하였다. " 하고, 이어 강의를 고만 두고는 곧장 서산으로 들어가 영원히 소식이 끊겼다.
-선문염송(禪門念誦)-
ㅇ. 성철스님- '이 뭣고? ' 화두의 바른 參究法.
스님2 : 저는 '이뭣고?'를 잡고 있읍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것이 무엇인고?'하면, 이것이 잘못된 데는 없읍니까?
큰스님 : 그런데, 내 '이뭣고?'하는 사람 참으로 많이 봤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 아니가? 니 이화두한지 몇 해나 됬노?
스님2 : 3년---
큰스님 : 3년 돼? 어떤 사람은 오래해도 안되는 사람 봤어.
그러니까 '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무엇인고,이것이 무엇인고? ' 이러는 것이,
아까 말한 그 처사라는 사람이 '이뭣고?'를 했어.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이고?'하고 가만히 들여다 보고 앉아 있는 식이 되버렸어, 그만.
이런 식이 되어 가지고는 그만 定에 들어가 버려.
그런 사람 많거든.
이러한 병마(病廢)가 따르는 수가 있고.
또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러면,
보고 듣고 하는데 따라서,경계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이냐?
(하게 되어) 산만해 지는 병폐도 붙게 되거든, 알겠어?
그래서 이병폐 저병폐를 없애기 위해,
예전 조사스님들은 어떻게 장 주장했냐 하면,
" 마음도 아니요,물건도 아니요,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이뭣고?'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하라 했어!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란 말이여, 그럼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면) 경계를 하나 잡아 갖고 (이뭣고--? 하면서) 들여다 볼 수도 없고, 경계에 따라서
이리저리 따라 갈 수도 없고,
그런데 한 20년 '이뭣고?'를 하다가 내버리는 사람 더러 봤어.
자꾸만 '보고 듣고 하는 이건 무엇인고?--' 하고 따라 다니다 보니까 자꾸 산만해 지고,
그만 안된다 이거라.
보고 듣고 하는 '이것'만 바로 알면 그만이야.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이나 물건이나 부처나 이런 걸 바로 알수가 있는데 말이여.
(화두하는)방법에 있어서는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자꾸 산만해 진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이뭣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뭣고를 아주 내버리지는 마라' 하는 소리는 잘 안하거든.
아까 그처사처럼 (오래도록 해서 病이 깊은) 그런 사람 한테는 아주 완전히 내버리라고 하고,
완전히 딴 화두를 가르쳐 줬는데,
(너는)아직 初學人이고 하니, (방법을 바꾸어서)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해보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하는 것과는 좀 달라.
그럼 내 말 알겠나?
-성철스님의 화두 드는 법-
ㅇ. 경봉선사
경봉스님은 1700화두 중에서 이 몸 끌고 다니는 주인공을 밝히는 "이 무엇인가?(是甚麽)" 화두와 부모 태중으로 들어가기 전의 본래 면목을 밝히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로 많은 후학들을 지도했다.
특히 '이것이 무엇인고?' 에 대해서는 많은 말씀이 있었다.
"나에게 찾아 오는 사람들에게 ' 이 몸 끌고 다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으면 '모르겠다'고하는 이가 태반이나 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마음이요'라고 답한다. 그래서 '마음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모르겠다'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정신' 또는 '혼'이하고 대답을 하지만. 정신이 어떤 것이고 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역시 모른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무엇이 이 몸을 끌고 다니는 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몸은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생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따져 봐야 부모의 물건이다. 결국 남의 물건을 받아 가지고 끌고 다니는 것일 뿐, 이 몸을 운전하는 운전수가 바로 참된 나인 것이다. 남의 차를 잠시 얻어 타도 운전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기 마련인데, 이 몸을 수십년이나 끌고 다니면서 주인공을 모르고 있으니 될 말인가."
스님은 '마음,정신, 혼' 등의 거짓 이름에 현혹되지 말고, 오로지 지극한 의심으로 이 화두를 타파하라고 하셨다.
"밥 먹고 옷 입고 대소변 보고 산 송장 길 위에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무엇인가?"
" 이 몸 끌고 다니는 주인공이 무엇인가?"
"이 무엇인고?"
"무엇고?"
"?"
이와 같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닭이 알을 품듯이, 배고픈 아기가 엄마 젖을 찾듯이 하면 반드시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나 생각으로 헤아리거나 관법(觀法)조차 용납하지 않는 이 화두를 참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꾸만 '이뭣고 이뭣고'하며 입으로만 외기도 한다. 스님은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셨다.
또 밥 먹을 때 '밥 먹는 이것이 무엇인고?' 옷 입을 때는 '옷 입는 이것이 무엇인고?' 길을 걸을 때는 '걷는 이 놈이 무엇인고?' 하면서 화두를 듣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해서도 안된다고 하셨다.
다만, 밥 먹고 옷 입고 앉고 서고 산 송장 길 위에 끌고 다니는 이것이 모두가 '이 무엇고?'라는 의문 속에 오로지 함께 들리게끔 하여야지, 요리조리 따지려 드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고 하셨다. -이하 생략-
-김현준 지음<경봉대선사 일대기, 바보가 되거라>-
ㅇ. 무여 선사-선 이야기(이뭣고 화두는 이렇게 들어라)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흔히 우리들의 '주인공'이다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말도 딱 맞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한 물건'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며
또한 부처도 아닙니다.
이름이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소위
'이뭣꼬?'라는 화두입니다.
유명한 육조 혜능대사와 그의 제자
남악 회양 선사의 문답 가운데
이런 화두가 나옵니다.
혜능대사가 묻습니다.
"무슨 물건이 왔는고?"
회양선사께서는 이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8년간이나 쩔쩔 매시다가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
해서 육조스님의 바른 제자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 질문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진정한 물음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참으로 대답을 해야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ㅇ. 이뭣꼬? 화두는 이렇게 들어라
1.
'이뭣꼬?'라는 말은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경상도식의 표현입니다.
'이뭣꼬?'화두는 앞에 무엇을 붙여서 들기도 하고
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이뭐꼬?'하며 의심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뭐꼬?
(이것이 무엇인가?)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이뭣꼬?(뭐꼬?)"
"관세음보살 염불하는 것이
이 뭣꼬?(뭐꼬?)" 하면서 공부를 해 나갑니다.
화두 공부 요령은 처음에는
진제를 다 들어서 의심을 일으키다가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뭣꼬?)
두번째, 세 번째는 앞의 것들은 생략하고
단제 즉'이뭣꼬?'만 하면서 공부해 나갑니다.
이렇게 '이뭣꼬?'하면서 공부하다가 의심이 약해지면
처음 했던 방법으로 다시 합니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뭣꼬?"
이렇게 다시 반복해서 '이뭣꼬?'해 나가는 것이
'이뭣꼬?'화두의 공부 방법입니다.
그외 '이뭣꼬?'화두 공부방법은 그대로 다 들어서 의심합니다.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이뭣꼬?
"염불하는 이놈이 뭣꼬?"
2.
'이뭣꼬?'앞에 무엇을 붙이는 경우는
항상 일정하게 붙이고
가급적 짧게 하는 것이
단순해서 망상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앞에 무엇을 붙이지 않고
'이뭣꼬?'만으로 공부하는 참선자는
'이~~~'를 약간 길게 하면서 마음 속으로
'이 ~~~'하는 놈이 '뭣꼬?'하며 의심을 일으킵니다.
조금은 막연하지만 그대로 '이뭣꼬~~~오?'하면서
길게 의심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뭣꼬?' 하면 '화(話)이고, '이뭣꼬?'하기 바로 이전
이뭣꼬?하는 그 놈은 '두(頭)'입니다.
화(話) 이전에 '이뭣꼬?'하는 그것
'두(頭)'가 무엇인지
그것을 참구하는 것이 바로 '화두 공부'입니다.
화두란 어떤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니
한 생각 일어나면 그것은 이미 화두가 아니라
꼬리(話尾)가 되고 맙니다.
"이뭣꼬?"화두로 참선하는 사람들 중에서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듣는 대로
가려우면 가려운 대로
그것들이 뭣꼬?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곳이나 느낌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이뭣꼬? 이뭣꼬? 하는 그런 분도 있어요.
아주 맑고 고요해진 상태에서도
그것이 '이뭣꼬?'하는 그런 경우도 있어요.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이뭣꼬?' 화두는 반드시
'이뭣꼬' 화두 위에서 의심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렇게 '이뭣꼬?' 화두를 꾸준히 여러 날 계속하다가 보면
잘 안되는 것 같아도 머지 않아 참의심이 생겨서
화두를 재미나고 신심있게 하게 됩니다.
반드시 '이뭣꼬?' 화두 위에서 의심을 일으켜야 됩니다.
- 무여선사의 선 이야기<쉬고, 쉬고, 또 쉬고> -
'성인들 가르침 > 화두선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안으로 들어 오는 것은 집안의 보배가 아니다(從門入者 不是家珍). (0) | 2021.05.26 |
---|---|
'이뭣고' 참선수행법 법문 발췌 (0) | 2019.04.15 |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 너는 무엇이었나? (父母未生前 如何是 本來面目?) (0) | 2019.03.26 |
구멍없는 퉁수로 한 곡조 뽑아보고 (0) | 2018.08.06 |
얼굴을 남쪽으로 향해서 북극성을 보라(南面北斗) (0) | 2018.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