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라브라만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2019. 2. 27. 10:04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빠라브라만은 감각기관으로는 지각할 수 없지만, 그것은 존재한다.

지각 불가능한 것이 빠라브라만이다.

그것은 존재하는 실재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 빠라브라만일 뿐이다.

어떤 형상이 있으면 그것의 몸이나 형체를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알수 있고, 지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진아의 형체나 형상은 지각할 수 없다.

진아는 어떤 형체나 형상도 없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 탐구를 그만두게 되지만, 그것은 언제나 여러분들과 하나이다.

비극은 여러분이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도,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진아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이해이다. 나는 시바다. 나는 시바다'라는 이해는 '이해라는 내적 시각' - 즉, 시바-의 눈에 의해 지각된다.

이해가 바로 지각이다. 지구는 모든 중생들을 지탱해 주고 있다. 그것을 '대지(大地)'라고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대지 위에 있고, 이 지구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일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빠라브라만 위에서 지각된다.

그것 때문에, 일체가 시작되고 끝이 난다. 우리는 그것의 밖으로는 어디로도 나갈 수가 없다.

그것을 떠난다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일체가 끝이 나고 모든 것이 소멸되지만, 그것은 끝나지 않고 남는다.

마지막 남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다. 이는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다.

묘사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고, 논리와 추측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만일 누군가가 "그것은 이와 같다"거나 " 그것은 저와 같다"고 말하려고 든다면,

그의 말은 거짓이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어떤식으로 그것에 대한 명확한 이론을 제시한다해도 그것은 그 이론 안에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무슨 말을 하든 - 설사 그가 지혜로 충만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 그것은 묘사할 수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는 매우 미묘하게, 결의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신체적 존재의 실재성, 그리고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주의 외관상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제거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 


브라만이 "만물에 편재한다"고 하지만, '만물'이 실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브라만이 거기에 편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보는 것들이 실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브라만이 거기에 편재할 수 있겠는가?

깊은 잠 속에서는 지각되거나 편재될 것이 전혀 없다. 깨어나면 여러분이 존재하고, 여러분이 보는 것은 보이는 대상, 즉 형상이다. 형상이 곧 보이는 대상이다. 그것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알려진다, 혹은 지각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 "내가 그것을 본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이는 모든 것은 실은 감각기괸에 의해서 보이며, 감각기관들은 지성에 의해, 또한 지(知)에 의해 알려진다.

자, 부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보자. 그 지(知)를 누가 보는가?

'아는' 상태, 지(知), 그 자체가 보이지만, 그것을 보는 그것은 우리가 묘사할 수가 없다.

'보는 자'는 묘사할 수 없으나 본다고 말을 한다.

그래서 '보는 것'은 곧 '아는 것'이고 '지각하는 것'인데, 그렇게 지각되는 것은 브라만에 의해 지각되고 브라만이 편재한다. 그렇게 브라만이 편재하는 것만이 알려지고 지각된다.

알려지는 것이 보이는 상태에 있는 한 브라만이 그것이 편재한다.

그러나 외관상의 사물이 사라지면, 편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브라만이 편재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이나 알려지는 것일 뿐이다.

'앎'이 끝날 때는 편재할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다.

우유와 크림은 함께 우유 안에 있다. 크림이 분리되면 우리의 감각기관에 별도로 다르게 보인다.

그것은 우유의 중요한 성분인데, 우리가 그것을 분리하면 별개의 물질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유와 하나이다.

빈 공간과 편재함의 성질은 다른 것이다. 상상(망상)이 사라진 뒤에 남아 있는  하나가 진아이다.

그것은 상상의 영역 안에는 없다. 개념, 상상, 움직이는 능력, 움직임, 이해 ,의식 등이 보일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남성 원리와 여성원리(뿌루사와 쁘라그리띠)를 지각한다.

여기에 내재되어 있는 것은 세 가지 구나, 5대 원소, 의식의 상태들, 그리고 다양한 환경과 물질은 수많은 속성들이다.


이 모든 것을 아는 그것을 '존재의 성품, 주된 목표, 저 넘어의 힘, 전체성의 일견(一見), 우주적 존재, 브라만의 광대무변함에 대한 일견, 원초적 신' 등으로 부른다.

이런 이름과 형상에서 나오는 이해는 단순하고 가장 본연적인 '있음'의 체험이며, 이는 뿌라쇼띠아(지고의 뿌루샤,지고의 존재), 즉 원초적 존재성 그 자체가 느끼지만, 그것은 상상이 파악할 수 없는 일종의 직접적 자각이다.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영적 노력은 청문(聽聞)이다.

그 다음에 성찰(省察)이 오는데 이것이 청문보다 더 수승(殊勝)하다.

하나의 존재로서든 아니면 이해의 성질로서든, '아는 자'가 아무도 없을 때는 마음이 그것의 더 높은 상태에 합일된다.

노력의 상태, 곧 수행이 끝나는 곳에 영적인 지(知), 즉 완전자가 있다.

우리의 삶은 영적인 노력이 최종적인 성취에서 정점을 이룰 때 완수된다. 

성질들(구나)를 넘어서 있는 그것은 영원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파괴될 수 없고, 뚫을 수 없이 가장 견고하며, 결코 끝이 없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여러분 자신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그것이 절대로 멸(滅)하지 않음을 확신한다. 그럴 때 환(幻)의 문제가 풀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환은 사라졌다.

예를 들어 꿈 속에서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결혼하여 처자식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깨어나면 그들이 어디 있는가? 어디서 그들을 찾겠는가? 그들이 어디서 그를 만나겠는가? 그 사람이 깨어나면 그 꿈은 거짓으로 드러난다.

다른 것들에 대한 지각은 무지 때문에 일어났고, 무지가 꿈이었다. 꿈이 그 무지였고, 그것이 곧 세간적 삶이었다.

광대한 하늘이 보였고 드넓은 지구가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지구 표면에 살면서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많은 가족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고, 나 자신의 가족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가족, 즉 하나의 작은 점은, 의식 혹은 지각의 관점에서는 없었다. 그 장면 모두는 무지에 의해 보였다.


그 실재 면에서의 가족은 일반적으로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실재는 아는 자는 매우 희귀하다. 왜냐하면  그 '아는 자'는 빠라마뜨만이기 때문이다.

실재를 '알면'여러분이 깨어난다. 꿈이 끝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깨어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제 실재에 대한 지(知)가 있다는 뜻이다.

깨어남이 지(知)이고, 지(知)는 여러분이 깨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세간적인 삶을 경험하는 자체가 무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주 행복하고 호화로운 삶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그는 무지에 합일되어 있다.

반대로 그가 문제로 가득 찬, 힘들게 일하는 삶을 영위할 수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그가 즐기는 것은 무지이다.

세간적 삶이 어떤 수준의 것이든, 우리가 즐기는 것은 무지일 뿐이다. 무지 자체가 나타난 것이다.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 무지이다.

그러다가 어떤 변화가 찾아 온다. 지(知)가 나타나고, 그와 함께 깨어남이 온다.

그 사람이 깨어나서 말하기를, "아, 정말 대단한 세간적 삶이었군. 이제 모든 것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사람이 깨어나도 그는 여전히 보지만, 일체가 묘사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것은 분별(실재와 비실재간의 분별)에 의해 부드럽게 그리고 미묘하게 느껴진다.

깨어남의 체험은 그 자체의 표지, 그 자체의 성품을 인식해야 한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