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5. 10:17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3.진실성의 측면
1) 무성성(無性性)
다음은 '진실성'에 의지하여 지관 자체의 모습을 설명하겠다.
이것도 우선 '관'을 닦아 '지' 수행으로 들어가는 단계를 거친다.
먼저 '관'수행에 대해 설명하겠다.
앞 단계의 의타성 가운데 '지'를 수행함으로써 일체의 만법은 있는 듯해도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일체의 만법은 본래 중생의 망상을 따라 생겨난 것이며, 나의 인식 밖에 실제로 존재하는 법이란 없다는 사실을 안다. 또 다시 우리의 인식 밖에 실재하는 법이 없고 오직 우리의 진여일심일 뿐이라면 이 마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생각한다.
앞에서 의타성과 분별성은 무법(無法)인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의타성, 분별성 이외에 따로 어떤 <실체로서> 청정한 마음이 존재하는가.
이와 같이 사유하는 순간이 바로 <진실성에 의지한> '관'수행이라고 한다.
이렇게 점점 깊이있게 사유하고 분석해 간다.
즉 앞의 분별성과 의타성은 무법(無法)이 아니며 어떤 상대적인 법(有法)을 의지하여 생겨난다. [주 : '있다', '없다'는 상대적인 대립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유(有)라는 개념이 떠오르면 동시에 '무(無)'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 두 개념은 동시에 떠오르고 동시에 사라진다. ]
'유법(有法)'도 오히려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무법(無法)'을 가지고 청정한 우리의 마음으로 삼을 수 있으랴.
다시 가상법(無法)은 인식의 체계[註; 四句 ; 불교의 인식논리로써, 사구(四句)란 유(有), 무(無), 비유비무(非有非無), 역유역무(亦有亦無)를 가리킨다.] 내에 포섭되나 우리 마음 자체는 인식의 범주(四句)를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거늘, 어찌 무법(無法)을 가지고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유해 나갈 때에 실체가 없는 모습(無法)을 집착하는 마음이 즉시 사라져 버리게 되는데, 이것을 '지'수행이라 한다.
2) 무진성(無眞性)
다시 '지' 수행으로부터 '관' 수행으로 들어가는데 우리의 청정한 마음을 관할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한다. '의타성과 분별성은 무법(無法)이므로 이미 그것이 우리의 청정한 마음이 아니라면, 다시 어떤 것(法)을 청정한 마음이라고 해야 하는가. 또한 이 마음이 < 상대적으로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인가, 혹은 <인식을 통해서> 분별이 가능한가, 도저히 사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인가, 이와 같이 분별해 나가는 것을 <무진성에 의거한> '관' 수행이라고 한다.
다시 나의 마음 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마음(法)이 없는데, 어떻게 이 마음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이 마음을 사념하고 분별할 수 있겠는가. 만약 마음 자체가 인식으로 사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즉시 하나의 대상(境界)가 되어 인식의 주체(能緣,見分)와 인식의 대상(所緣, 相分)이 <상대적으로 발생하여 대립관계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 이외에 분별하는 인식(智)의 주체가 따로 있어서 마음의 모습을 관찰하게 될 것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청정한 마음을> '진여'[註; 여(如)라는 것은 그 사물 자체의 모습에 딱 들어 맞는 것을 뜻하는데,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상대적으로 발생한다면 이것을 여(如)라 할 수 없다]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모든 중생들은> 망상 습기로 마음을 익혀 왔기 때문에 스스로 <사물을 상대적으로> 분별하는 작용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사실 분별하는 작용의 모습은 있다고 해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자체의 성품은 오직 청정한 마음 뿐이다. [註; 분별하는 마음과 청정한 마음은 마치 물과 파도의 관계처럼 서로 의지하여 발생할 뿐이다]
가령 분별심을 내더라도 그것은 청정한 마음에서 나온 분별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비유하자면 마치 눈으로 허공에 핀 꽃(空華)을 보고 '허공에 핀 꽃이라는 것은 바로 눈에 병이 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으로, 그것은 있는 듯해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눈으로부터 나타난 모습일 뿐이다'라고 아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를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나서 허공에 핀 꽃이라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 허공에 핀 꽃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않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눈을 부릅뜨고 자기 눈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끝내 자기의 눈을 찾지 못한다. 눈(眼根; 근(根)은 생장(生長)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 대상사물(色法)을 보는 대로 그 대상이 바로 자기 눈의 모습인데, 이는 눈을 찾고 있는 주체로서의 눈이 바로 자기가 찾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눈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허공에 핀 꽃이 본래 실체가 없으며 나의 눈 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눈이 없고 오직 자기의 눈만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는 눈을 찾지 말아야 한다. 즉 눈을 가지고 눈을 찾지 말아야 한다.
지관을 수행하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내 마음 이외에 따로 존재하는 마음이 없고 오직 하나의 마음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법문을 듣고 알아서 마음 밖에 존재하는 대상세계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단지 망상의 종자가 남아 있기 때문에 다시 분별심을 내서 따로 청정한 마음이 있지 않은가 하고 끊임없이 찾는다.
그러므로 청정한 마음을 찾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청정한 마음이며, 설사 분별하는 마음일지라도 그것은 청정한 마음<에서 일어난 작용>이다.
그래서 청정한 마음의 자체에는 항상 분별이 없다고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여에 수순(隨順) 한다고 말한다.
<이상의 설명과 같이 관찰하여 수행해 가는 순간에 망상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또한 이것을 '지'수행이라 한다.
3) 근본진여삼매(根本眞如三昧)
이와 같이 <지관수행을> 오래 오래 익히면 결국 무명,망상의 종자(習氣)가 모두 사라지게 되기 때문에 <분별하던> 망상은 스스로 쉬게 되는데, 이때 '진여(眞如)'를 증득했다고 이름한다.
<수행을 하여 진여를 체득했다고 하지만> 상대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어떤 법이 있어서 진여를 증득한 것은 아니다. 마치 파도가 잔잔해지면 파도는 물 자체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 우리의 마음도 망상이 쉬면> 바로 진여가 나타나는 것을 가리켜 '대적정지문(大寂靜止門)'이라 한다.
한편 보리심을 내어 '관'수행을 닥아 오면서 좋은 방편과 자비원력으로 <청정한 마음을> 익혀온 세력 때문에 <그 마음은> 항상 '대적정수능엄선정(大寂靜首能嚴禪定)'[註; 대적정수능엄선정이란 삼매의 일종으로서 그 배경은 능엄경에 바탕을 둔다. 일체의 번뇌와 의식작용이 지멸(止滅)된 지(止) 수행의 정점임] 가운데 있으면서 <현실적으로 인연을 따라>갖가지 대용(大用)을 일으킨다. 선정의 경지(定)에서 방편을 일으키고 혹은 생각하고(念), 혹은 보며(見) 혹은 마음을 내며 또는 대상 경계에 대하여 갖가지 차별상을 일으키지만, 이것은 또한 진여 자체가 현실로 작용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지'의 수행으로부터 '관'수행을 일으키는 것이라 한다.
4) 지관 쌍행(止觀 雙行)
마치 불꽃이 맹렬하게 타오르듯이 <불보살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청정한 분별작용을 일으킨다고 할지라도 마음의 자체는 항상 고요하며(卽觀之止), 비록 마음의 자체는 고요하다고 할지라도 인연을 따라 청정한 분별작용을 일으키는 것(卽止之觀), 이것을 가리켜 '지'와 '관'을 동시에 운행한다(止觀雙行)고 이름한다.
- 남악혜사 지음,원경 옮김<대승지관법문>(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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