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6. 23. 09:42ㆍ성인들 가르침/초기선종법문
사조 도신(四祖 道信)의 제자 우두법륭(牛頭法融,593 ~657)이 지은 <심명(心銘)>에서 설한다.
보리란 본래 있는 것이니, 힘써 지키려 할 필요가 없으며,
번뇌는 본래 없는 것이니 힘써 제거하려 할 필요가 없다
영지가 스스로 비추니 만법이 여여(眞如)에 돌아가되
돌아가는 바도 없고, 받게 되는 바도 없나니
절관하여 닦음을 지켜나감도 잊어버려라.
菩提本有(보리본유) 不須用守(불수용수)
煩惱本無(번뇌본무) 不須用除(불수용제)
靈知自照(영지자조) 萬法歸如(만법귀여)
無歸無受(무귀무수) 絶觀忘守(절관망수)
본래 지니고 있는 보리를 얻기 위해 애써 추구할 필요가 없다.
금(今)에 즉하여 바로 보리임을 요지(了知)함에 당처에 즉(卽)하게 되어 번뇌라 하든 보리라 하든 하등 문제될 바가 아예 없다. 본래 무생(無生)인 번뇌를 제거하고자 애쓰는 것은 이미 정견(正見)에 어긋나는 행이다.
영지(靈知)란 곧 각성(覺性:圓覺)이다. 또는 진지(眞知)라고도 한다.
중생의 분별하는 지해(知解)와 구별하여 지(知)하는 바 없이 지(知)함을 영지(靈知:眞知)라고 하였다.
영지는 중생이나 불(佛)이나 공통으로 갖추고 있다.
무수지수(無修之修)로 임운(任運)함에 따라 영지가 발현되어 만법이 신증(身證)되는지라 말로 드러낼 수 없어 여여(如如)라 하고, 평등일미(平等一味)의 영지(靈知;覺性)인지라 여여라고 한다.
만법이 여여에 돌아가되 본래 여여였던 까닭에 돌아간 바가 있겠는가.
여여(如如)에 무슨 처소가 따로 있어 받게되는 바가 있겠는가. 그러한즉 무엇을 향해 관행할 수도 없는 것이며, 닦는 행을 지켜나가려 함도 미망이니 잊어버려야 한다. 그러한 가운데 참다운 닦음과 여실한 진전이 있게 된다.
일심(一心)은 분별을 떠난 자리라 망(妄: 망령됨)이 없다. 일심을 요지(了知)한지라 수많은 경계에 연(緣)하여 끌리고 염착되는 습기를 조복(調伏)하게 되고 직심(直心)하게 된다. 직심이란 마음이 경계에 연(緣)하여 끌리거나 염착됨이 없고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직심으로 습기(習氣 : 습관의 세력)가 조복된다. 60권본 <화엄경> 권제15금강당보살 십회향품에 "보살은 직심(직심)의 힘을 성취하여 일체법에 자재할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신수대사는 입적하면서 단 3자로 "굴곡을 직하게 하라(屈曲直)"고 하였다. (능가사자기'신수장') 여기서 굴곡(屈曲)은 경계에 마음이 끌리어 물들고 영향받은 것을 말하고, 직(直)은 거울같이 마음이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염착되지 않음을 말한다. 또 혜능대사는 <유마경>의 "직심(直心)이 곧 도량(道場)이다"를 인용하며 직심하지 않으면 불자(佛子)가 아니라 하고, 직심이 곧 일행삼매(一行三昧)임을 강조하였다.
심성(心性)은 공적(空寂)하고 무상(無相)이며 분별을 떠난 까닭에 본래 평등 일여(一如)하다. 그래서 모든 경계와 함께함에도 무엇을 지니는 바가 없다(無所有). 지금 어떠한 괴로운 마음에 있다 하더라도 실은 심성은 괴로움을 지니는 바가 없다. 심성은 본래 무엇을 소유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체법불가득(一切法不可得: 일체 모든 것은 얻을 바 없다)이다.
또 심명(心銘)에 설한다.
모든 정을 멸하려 하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을 쉰다는 가르침에 따르고,
상념은 무심해야 멸하는 것이나니, 마음을 끊으려 하지 말라.
공을 증하려고 하지 말라. 자연히 명철해지는 것이나니
생사를 온전히 멸하는 길은 심원한 마음의 이법에 들어가는 것이네.
莫滅凡情 惟敎息意(막별범정 유교식의)
意無心滅 心無行絶(의무심멸 심무행절)
不用證空 自然明徹(불용증공 자연명철)
滅盡生死 冥心入理 (멸진생사 명심입리)
거울은 정(情)이 없어 더러운 것이나 깨끗한 것에 영향받지 아니하고 평등하게 비춘다.
그러나 범부는 그러하지 못한다. 본래 지(知)함에는 정(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범부는 지(知)하면서 동시에 망령된 정(情)이 붙어서 대상에서 희로애락을 일으킨다.
실은 지(知)하는 그 일법(一法)에 다른 어떠한 것이 붙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 희로애락 등의 정(情)이 붙게 되니 바로 망령된 일이라 한다. 정(情)이 없이 지(知)함이 지(知)함 없이 지(知)함이다.
분별과 염착됨을 떠난 지(知)인 까닭이다. 혜가(慧可)도 일찍이 "정을 붙이지 말라(情事無奇)"고 하였다. 그러나 혜가의 이 법문은 당시 선정을 위주로 닦던 소위 정학(定學)의 무리들에 의해 마어(魔語)라고 비난 받았다.
지혜가 따르지 아니하고 선정 위주로 닦다 보면 그 선정에 정(情)이 깃들게 된다. 정이 깃들게 되면 이미 사정(邪定)이다. 그런데 이 망령된 정(情)이란 망령된 것인 까닭에 이를 억지로 말해버리고자 한다면 이 또한 어리석음이다. 망령된 것이니 실다움이 없고, 그림자와 같아서 본래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이를 제거할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정(情)이 본래 그러함을 요지(了知)하여 단지 마음을 쉬고 있으면 저절로 사라진다. 망령된 것이니 사라지게 되어 있다.
상념도 마찬가지여서 무심(無心)해야 멸해지는 것이지 억지로 이를 잡아서 제거하려고 하면 그림자를 잡아 없애려 하는 것과 같아 또 하나의 어리석음을 낳은 것이 되어버린다. 무식함이란 바로 정(情)을 붙임 없이 지(知)함이니 곧 지(知)함 없이 (知함에 염착됨이 없이)지(知)함이다. 그래서 마음을 끊어 가지고 정을 없애려 함은 잘못이다
이렇게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끊으려 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마음이란 공적(空寂)한 것이고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끊으려 한단 말인가.
공(空)을 증(證)하려 함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행이다. 공이란 곧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한 법문인데 공을 증하고자 한다면 이미 그 공의 뜻에 위배된다. 공이라는 법문을 통해 일체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요지하였다면, 그 공상(空相)도 버려야 한다. 이를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일체법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요지함에 무명(無明)이 힘을 잃게 되면서 점차 자연히 명철해지는 것이다. 구름이 걷히니 밝은 해가 드러나듯이.
생사를 온전히 멸하여 구경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심원한 마음의 이법(理法)에 들어가야 한다. 자심(自心)에서 대승의 심오한 이법을 요지하고 통달해야 한다 . 위에서 설한 법문들이 곧 대승의 심오한 이법이고 심지법문(心地法門)이다.
또한 이입(理入)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상생활과 실수(實修)에서 달마대사가 설한 보원행(報怨行; 고난 받는 것을 자신이 지은 죄업을 갚는 것으로 여기고 달게 받음), 수연행(隨緣行; 부딪디는 인연에 수순하여 걸림없는 행), 무소구행(無所求行; 당처를 떠나 따로 구함이 없는 행), 칭법행(稱法行; 교의에 합당하게 행함)의 네 가지 행입(行入)을 실행해 나가야 한다. 행입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인데 이를 헤쳐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 곧 이입(理入)이다. 이입이 잘 되면 이(理)가 사(事)에서 통용이 되고 구현이 되어 이사무애(理事無碍)에 이르게 된다.
또한 이입(理入)이 되었다 해서 좌선행(坐禪行)을 소홀이 해서는 안된다. 좌선을 통하여 이입도 더욱 심화되고 힘을 얻어 사(事)에 구현되어 걸림없게 될 수 있다. 단지 좌선한다고 하면 앉아서 마음을 어떻게 하고자 함이 있는 행이 되기 쉽다. 그래서 앞에 소개한 징선사의 예와 같이 정(定)을 위한 정의 행이 되어 버린다.
심일경성(心一鏡性)이니 마음을 어떻게 할 바도 없고, 마음이 무엇을 함도 없이 단지 무원무구(無願無求)의 직심(直心)으로 앉아 있을 뿐이다. 선종의 명구 '지관타좌(只管打坐)'는 이를 뜻한다.
혜능이 <유마경>에서 유마힐거사가 사리불의 연좌행(宴坐行)을 꾸짖은 것을 들어 설한 것은 (육조단경) 좌선이 마음을 어떻게 해서 고요함이나 청정함에 머물도록 하는 행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좌선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렇게 구함이 있고, 마음을 어떻게 함이 있는 좌선행은 달마대사의 네 가지 행입(行入) 가운데 무소구행(無所求行 ; 구함이 없는 행)에 어긋난다. 마음이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좌선행에 의해 마음으로 마음을 닦아 무엇을 이루고자 함은 심일경성(心一鏡性)에 어긋난다. 마음이 원래 공적(空寂)하여 무상(無相)이고 무생(無生)이니 닦을 바 없고, 멸할 망상과 번뇌 없는데 앉아서 마음을 어떻게 하고 있다면 잘못이다. 이입이 안 된 때의 좌선은 헛되이 힘과 시간만 소모시키기 쉽다. 아울러 여러 병폐가 쌓이게 된다. 그래서 불교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근본이다. 단지 아직 오(悟)가 안 된 상태에서 방편으로 산란심 등을 대치(對治)하고 집중력을 기르기 위한 정행(定行) 위주의 행법이 시설되어 있고, 이를 필요로 하는 시기가 있을 뿐이다.
요컨대 달마 이래의 선법은 정혜무이(定慧無二)의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박건주님 저 <達磨禪>에서 발췌함 -
'성인들 가르침 > 초기선종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혜쌍수(定慧雙修) (0) | 2018.07.13 |
---|---|
대승오방편(大乘五方便)-5 (0) | 2018.06.29 |
본체는 텅 비어 고요하다 (0) | 2018.06.13 |
대승오방편(大乘五方便)-4 (0) | 2018.06.10 |
현종기(顯宗記)-9 (0) | 2018.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