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자신인 진아는 어떤 결점이나 장애도 없고, 불멸이며 완벽히 청정하다

2018. 2. 7. 09:43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여러분들이 잠자리에 들 때에 겉옷을 벗고,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옷을 입는다.

깊은 잠 속에서는 몸이 진아를 덮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의식하지 못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주위 사물을 보면서 주의력으로 모든 것을 기억한다.


무지와 에고성이 사라진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브라만일 뿐이다.

또한 생시상태도 역시 그렇다.

개아가 사라져서 빠라브라만이 된 것이다.

그러면 어떤 종류의 욕망도 없게 된다.

 

이때는 표현할 적당한 비유가 전혀 없다.

이 경우에 비유하는 것은,

진리의 성품을 한 지(知)가 다른 어떤 경우와 비슷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어떤 말일 뿐이다.

그것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것이라고 보여줄 수 잇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의 상태나 그 의미를 충분하고도 적절하게 묘사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어떤 언어도 없다.

그것의 상태에 비교할 수 있는 어떤 형상이나 대상, 어떤 말도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상태를 두고 비유를 넘어서 있다고 하거나,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어떤 비유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게는 다른 것들이 전혀 없다.

전 세계가 빠라브라만 , 빠라마트만일 뿐이다.

진아지가 분명할 때는 행복 자체, 존재한다는 행복감이 있다.

지복 자체가 지복 안에서 즐거워한다.

무아적 헌신자가 될 사람은 환(幻)을 내버렸을 때 이 체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헌신은 지속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잊어버림이 없어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다른 어떤 대상이나 성취가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가 그 대상을 생각하면,

신에 대한 자신의 헌신을 잊게 된다.

그래서 성자들은 끊임없이 헌신(수행) 할 것을 강조한다.


헌신자가 돈, 자식, 물질적인 부(富), 사회에서의 명성에 대한 욕망을 버리고 신에 대한 헌신(수행)에 완전히 몰두할 때, 의식에 묻어있는 오염된 때가 씻기고 그 의식이 신과 하나가 되어 그것의 참된 성품안에 안주하게 된다.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늘어날 때는 경전의 말씀들이 그 헌신자를 따른다.

베다에서 '최고의 진리'라고 선언한 것을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다.

그럴 때 삶은 하나의 완전한 전체로써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최고 수준의 헌신이다.


이 헌신은 여자, 남자, 비천한 자, 브라민을 포함하여 모두를 아무 구분없이 해방시킨다.

그러나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진아의 빛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는 헌신을 하는 사람은 실재에 도달하게 된다.

그의 눈 위에 덮혀있던 베일이 걷혀진다. 태양과 무수한 사물이 다 보인다.

우리가 모든 자부심을 놓아 버리고 마음이 의심에서 벗어나게 되면 일체가 브라만으로 보인다.

자나까 왕이 물었다.

"깨달은 뒤에는 우리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해야 하며, 업(業)으로부터의 속박은 어떻게 타파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모든 오염에서 벗어난 상태로 머무릅니까?

어떤 수행에 의해 카르마(業)의 매듭이 끊어지거나 느슨해 지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행위를 하면서도 무위의 상태를 성취할 수 있으며, 지고의 존재인 신은 어떻게 만날 수 있습니까?

진인 사나까와 그 밖의 분들은 왜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지,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사실 이런 질문들은 답변하기가 어렵다.

(질문을 받은) 진인 아위르호뜨라 나라야나('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진인의 한사람)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행위, 비(非)행위, 무위(無爲)는 평범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생각한 입법자들은 지쳐 버렸고, 위대한 현자들은 그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습니다.무수한 현자들이 머리를 짜내 보았지만 결국은 자존심으로 서로 다투기만 했습니다.창조주 브라마와 여타 존재들에게도 행위를 적절히 구분하고 분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행위는 베다의 근저에 있는데, 베다는 나라야나일 뿐입니다. 베다가 침묵을 지키는 곳이 이 지점입니다. 행위, 무위, 비행위는 어느 면에서 모두 동일합니다. 설탕의 경우, 여러분이 부드러운 설탕, 흰 설탕, 갈색 설탕을 가지고 있다면 '설탕'인 점은 동일한 것과 같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행위는 하나이지만 행위에 집착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차별상을 발견합니다. 행위 안에 무위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비행위 안에도 행위와 무위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어떤 행위가 시작되면 그것을 업(有爲行,karma)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시발점부터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비(非)행위(vikarma)라는 것은 선으로도 불리고 악으로도 불립니다.

행위를 뒤로함이 무위(無爲,akarma), 이는 마치 그 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무행위자(non-doer)가 참된 행위자임을 아는 사람은 진인이 된 것입니다.

그는 '행위 없음'을 성취했습니다.

(註; 베단타 문헌에 의하면 일반적인 의미로, karma는 해야할 일을 하는 것(善行), vikarma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는 것(惡行), akarma는 선도 악도 아닌 행위라고 한다.)

오, 왕이시여, 행위자와 행위를 야기하는 자가 이 몸 안에서 오직 하나임을 깨달을 때만이 당신은 행위가 없어질 것입니다. 행위의 처음에 존재하는 행위자 자신이 행위의 결과를 받는 자입니다. 참스승의 축복에 의해서만 행위에서 벗어난 상태를 성취합니다. 하나의 행위로부터 많은 행위가 일어나며, 그것들은 옳바른 행위나 그릇된 행위로 불립니다.

그러나 참스승의 가르침에 의해 모든 행위가 단절됩니다. 행위의 노래는 이와 같습니다."


그 질문은 아주 큰 질문이다. 그래서 진인 사나까와 다른 사람들은 아직 성숙되지 않은 (영적) 어린이들에게 이 지(知)를 전해주지 않았다. 행위와 무위의 이러한 차이는 그것을 이해할 만큼 성숙않은 사람들에게 말해 줄 수가 없다.

빠라마트만은 언제나 어떤 흔들림도 없고 어떤 장애도 없다. 그것은 영원히 파괴 불가능하며, 완벽하게 청정하다.

바로 여러분 자신이 그것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