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4

2017. 11. 27. 10:35성인들 가르침/반야심경 관련 법문


중도의 가르침


이처럼<반야심경>에서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부득이하게 비슷한 내용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설명한 이유는 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이해하지 말라는 중도의 가르침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색에도 치우쳐 머물지 말고, 공에도 치우쳐 머물지 말고, 현실세계를 거부한다거나 깨달음의 세계만을 추구하지도 말며, 어느 한쪽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불법은 '이것이 불교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적인 진리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불법은 어느 하나를 방편으로 내세우고 난 뒤에는 반드시 그 방편으로 내세운 가르침을 깨부숩니다.

한쪽에서는 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수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교는 중도의 가르침이다'라고 내세울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중도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지, 중도라는 또 다른 무엇을 내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교의 모든 핵심적인 교리들은 전부 다 그 무엇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드러내는 용어입니다.

공사상은 어떤 진리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라, 텅 비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방편의 용어이고, 무아도 나랄 것도 없다는 것이며, 무상은 항상하는 것이 없다, 무소득은 얻을 것이 없다, 무자성은 자성이 없다 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연기법은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사실은 진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과 연이 가짜로 화합하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중도로써만 드러낼 수 있을 뿐,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가르침 또한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색'이라는 모든 경계가 사실은 텅 비어 공한 것이며, 그렇다고 공하다는데 치우쳐서도 안 됨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어느 작은 한곳에도 치우치거나, 머물러 집착하지 못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 어떤 발 디디고 안주할 만한 그 어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체 모든 망상 분별을 한 티끌도 남기지 않고 전부 다 불살라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법이고, <반야심경>이며, 중도의 가르침입니다.

                                      -법상지음 <반야심경과 선공부>에서 일부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