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상세계는 의식이 만든 환영(幻影)이다

2017. 11. 17. 23:40성인들 가르침/시다르메쉬와르 마하리지



말이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지만, 말해야 할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브라만에 대한 깨달음이 일어난다.

말이 끝난 뒤에 깨달음이 일어나고 그 말은 침묵한다.

베다는 모든 경전의 왕이지만 그 조차도 침묵한다.

베다가 브라만에 대해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Neti Neti)"라고 했을 때 다른 학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했다. 그 학문들은 브라만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어떤 표지나 암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제반 학문, 곧 사스뜨라(Shnstrs, 세간적인 지식을 설하는 경전들)는 베다의 산물이며, 베다가 브라만과 접촉하여 침묵하자 다른 경전들을 브라만의 한 자락도 보여줄 수 없었다.


다른 경전들은 묘사하려고 할 뿐이지만 베다는 그것을 직접 보여주려고 했다.

결혼하려고 마음을 정한 사람은 결혼할 생각 밖에 없다. 그는 결혼에 대한 오직 한 생각뿐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삶의 주된 목표이다. 설탕은 단데, 여러분이 그것을 먹을 때만 그 단맛을 안다. 단맛을 묘사하려고 경전을 인용할 필요는 없다. 전 세계는 하나이다. 그것은 한 물건에 의해서만 채워져 있고, 달리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을 이해하고 그 체험을 얻는 것이 여러분이 성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도처에 그 '하나' 외에는 다른 어떤 것의 출현도 없다. 이 체험이 있으면 에고의 매듭이 느슨해지고 , 몸에 대한 숨은 속박이 헐거워지며, 모든 정신적 작용이 하나가 된다.

주(主) 가나빠띠의 상(像)을 숭배하는 열매나 공덕은 그 상이 크든 작든 동일하다.

신상이 더 크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흙의 양이 더 많을 뿐이다. 흙이 가나빠띠 상이고, 그 상은 흙에 지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정서적인 차이, 즉 그것에 대한 느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특정한 형태와 색깔의 흙에 신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이다. 그 상으로부터 기쁨을 얻고 싶은 것이다. 그 전체가 마음의 이미지일 뿐이다. 흙은 가나빠띠가 되지 않고, 가나빠띠로 흙이 되지 않는다.

숭배는 우리 마음의 정서적 산물이다. 그것은 마음의 투사물이기 때문에 영원할 수 없다.

 

성자들은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따라서 어떤 감상적인 기분에도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절대자, 불멸자를 굳게 믿고 있다.

현자 삐빨라얀은 현상계 전부가 브라만이라는 진리를 전할 의도로 이렇게 말했다.

" 자신과 브라만이 하나임을 이해하는 사람도 남들처럼 활동하지만, 그의 모든 행위, 감정, 행동은 브라만일 뿐이다. 수까나 브라마데바(브라마)처럼 그의 잠은 삼매이며, 그것을 브라만 삼매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고 상상일 뿐인 어떤 거짓된 개념적 인간이 있었다.

그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다가 실재하지 않는 것, 비실재물로 판명되어 무효화되었다.

'나'가 거짓임을 깨달은 사람은 그의 삶 전체가 브라만이 된다.

그의 불결함은 베다에 의거하여 주 시바의 상 위에 뿌린 깨끗한 물이다.

브라만을 아는 자는 그 자신이 브라만이다.

자부심이 사라진 사람, 브라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가장 큰 신 마하데바이다.


스승의 헌신자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은  큰 범죄다. 스승의 헌신자를 괴롭히면 안된다.

에고가 사라졌고, 만물에 편재한 브라만을 보게 된 사람이 시바가 아니면 달리 누구이겠는가?  ​

브라만을 깨달은 진인, 즉 진아지를 가진 사람의 모든 행위는 신의 삶 그 자체이다.

그의 몸과 그의 가정생활은 시바의 집이다. 그의 말은 무한한 가치가 있는 큰 진언이다.

그의 부인은 우마(빠르빠띠)이고, 그의 아들은 가나빠띠, 즉 스승의 아들이다.

그런 진인을 숭배하는 것은 수천의 가나빠띠 신상에 예공을 올리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이 있다.

브라만 안에서는 선과 악이 다르지 않다. 그에게는 지옥과 천국의 입구가 동일하다.

그에게 시바는 무소부재하여, 링감 상징물 안에도 있고 진흙 속의 벌레 안에도 있다.

자비에 가득 찬 그의 시선은 시바의 직접적인 축복이다.

마야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녀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위해 행위(業)를 창조해 두었다.

그녀는 빠라마트만이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시바를 조롱했다.

그녀는 지(知)와 무지(無知) 둘 다를 창조하고 세계의 활동들을 확장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고, 거듭되는 탄생의 연쇄를 도입했다.

시바의 의식 안에 망각을 창조하고, 그를  한 마리의 당나귀나 돼지로 만들었다.

형상없는 것에게 무수한 형상들을 창조해 주었다.

바지, 셔츠, 모자 등 모든 천에는 실 밖에 없고 많은 형상과 모양이 그 실에서 만들어지듯이, 마야의 기이한 게임도 그와 같다. 사람들은 연꽃 앞에 서 있는 여자는 부의 여신 락슈미이고, 나무 밑에 서 있는 여자는 그 반대인 악령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마야는 이처럼 온갖 상상적 존재들을 도입했고, 세계 전반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디왈리 날(사람들이 락슈미 여신을 위해 등불을 켜는 흰두 축제일) 사람들은 소똥으로 만든 크리슈나, 고삐(크리슈나와 유희를 벌린 목동 여인들) 등의 상(像)을 준비하여 실제로 꽃으로 그것들을 숭배한다.

이 마야가 어떻게 개아들에게 소똥한테도 절을 하게 하는지 보라. 소똥으로 만든 크리슈나 상 안에 소똥말고 무엇이 들어있나? 그것들은 모두 꾸민 것이고 모두 허황된 것이다. 진실은 모두가 브라만이라는 것이지만, 바보들은 마야가 지어낸 이 거짓 현상이 진실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개아들은 한때 아기들을 요람에 눕힐 때와 아기 이름지어 줄때 부르던 그 노래들을 부른다.

개아들은 이름과 모양을 단단히 붙들므로써 생사의 순환고리에 붙들리고, 매순간 '나, 나' 라고 말한다.

이것이 끝없는 생사의 연쇄고리를 일으키게 한 것이다.

하나의 브라만 안에서 많은 모양과 형상들이 창조되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이것은 이와 같다", "저것은 다른 것이다, 저것은 남의 것이다"라는 등으로 이야기 한다.

체스 게임에서 여왕, 기사, 왕 등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졌다. 그냥 나무다.

하지만 게임에서는 불필요한 다툼이 벌어진다. 그 사람들이 영리하면 할수록 ​더 많이들 다툰다.

그와 마찬가지로, 브란만인 <하나> 안에 거짓된 겉모습들이 수없이 많이 존재해 왔다.

이것이 환(幻)이다. 이것은 최면술이다. 이 환은 하나의 숨박꼭질 게임이다.

일종의 놀이이고, 영리한 정서적 상상의 게임이다. 마야를 아는 사람은 그녀를 즉시 내버릴 것이다.

만약 체스 게임이나 다른 게임이 참된 것으로 밝혀진다면 세계도 참된 것으로 밝혀지겠지만, 그러나 세계는 참되지 않다. 그것은 의식 안의 한순간의 겉모습일 뿐이며, 사라질 허망한 그림자들이다.

외관상에 보이는 세계라는 이 현상전체가 실재하지 않는 환영(幻影)의 그림자들인 것이다.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 



                                           <한희원 화백의 '피안의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