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30. 23:44ㆍ성인들 가르침/종범스님법문
- - - - 전략(前略)-- - -
우리는 이름과 형상에 속아서 늘 걱정하다가, 우리 본래 자성을 깨닫는 순간에 모든 근심걱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자기 집 뜰 밑에 숨어 있는 금은보화를 찾으면 가난이 다 해결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금은보화 같은 본래 자성이 무엇이냐?
경허스님은 그 마음을 '대포사계(大包沙界) 소입미진(小入微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크게는 삼천대천세계를 다 포용하고, 작게는 작은 티끌 속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크게는 항하(恒河)의 모래알 수와 같은 삼천대천세계를 다 포함하고, 작게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티끌 속에 들어 갑니다. 이것을 실증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명칭과 형상으로 나타낼 수 없는데, 이름을 통해서 이름에서 자유로워지게 하기 위해서 이름 붙인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름을 통해서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붙인 것입니다.
이 마음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느냐? 마음은 어디에나 다 있습니다. 어떻게 있느냐?
예를 들어 그릇 속에는 그 그릇을 만든 사람의 마음도 있습니다. 그릇을 만들 때 그 사람이 마음을 써서 만들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그릇만 있는게 아니라 만든 사람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릇만 보이고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그릇을 만든 사람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 마음입니다.
또 그릇을 보는데 이것이 그릇이라고 보는 자기 마음은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그릇이라고 알지만, 그릇이라 보는 내 마음은 모릅니다.
죽는다는 것만 알지 죽는다고 보는 내 마음은 보지 못합니다.
죽음도 내가 죽는다고 보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이고, 삶도 내가 산다고 보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죽는다고 보고 산다고 보는 그놈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전도몽상(轉倒夢想)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고 내가 거기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려 놓고 자기가 좋다고 하고 자기가 싫다고 하는데, 내가 그려 놓은 그림입니다.
"못살겠다"는 말을 종종하는데, 못살겠다고 하는 밖에서 보이는 것만 중요하게 여깁니다.
못 살겠다고 보는 내 마음은 모릅니다. 이것이 미혹입니다.
<화엄경>의 아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법문이 있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데 화가의 마음 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화가의 마음도 없다. 그러나 그림을 떠나서 화가의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림에 화가의 마음이 없지만, 그림을 떠나서 화가의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림 속에 마음이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머리를 손질하고 나왔습니다. 눈에는 머리 모양만 보이지만, 스스로 꾸미고 만진 그 마음이 붙어 있습니다. 모양을 떠나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떠나서 모양이 있는 것이 아닌데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산이 높다면서 산만 보고, 산이 높다고 보는 자기 마음은 모릅니다.
저 사람이 멋있다고 볼 줄만 알았지, 멋있다고 보는 자기 마음은 모릅니다.
그래서 해에 매이고 사람에 매이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연애학을 강의하는 사람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연애에는 A급 연애가 있고 B급 연애가 있답니다. 전화 오면 받고, 만나자면 만나고, 싫으면 그만인 심플한 연애가 A급 연애입니다. 그런데 '왜 연락이 안 올까? 내가 찾아가 볼까? 내가 잘못한 게 없나? 늘 그 사람에게 얼매여서 딸려 가는 연애가 B급 연애입니다. 딸려 가면 B급이고 딸려가지 않으면 A급입니다.
몇십년 살다가도 가면 " 안녕히 가시오"하고, 갔다가 다시 오면 "어서 오십시오"하는 것이 A급입니다.
그러나까 이렇게 자유로운 것이 좋습니다.
자기가 간다는데 왜 내가 못가게 하며, 자기가 또 그리워서 오겠다는데 못 오게 하겠습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크게는 대천세계를 감싸고, 작게는 가는 티끌에 들어 갑니다.
어떤 분이 <화엄경> '일체유심조' 법문을 가지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하는데. 마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제가 평하는 말을 한마디 하겠습니다.
'마음을 누가 만들었느냐?"라는 질문이 평범한 질문은 아닙니다. 아주 기특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에서 보면 '마음은 누가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 한마디에 "허물이 허공에 가득할 만큼 많다"라는 평을 드립니다. "마음을 누가 만들었습니까?"라는 질문이 기특하기는 기특합니다. '죄과만천(罪過滿天)'이라, 그 허물이 하늘에 가득합니다.
한 물건이라고 하는데, '한 물건'이 무엇이냐? 한국불교 전문 강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는 <金剛經五家解>에 한 물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물건이라는 게 명상(名相)이 끊어졌습니다.
만약 끊어졌다고 하는 말은 없다고 하면 없는 형상이 있고, 있다고 하면 있는 형상이 있는데, 없는 형상과 있는 형상이 다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역사가 끊어졌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닙니다. 한 티끌에 있지만 온 우주를 다 에워쌉니다.
그러면 평소에 어디 있느냐?
'소소어부앙지간(紹紹於俯仰之間)하고, 은은어시청지제(隱隱於視聽之際)라'
우리가 오고 가고 앉고 서고 하는 거기에 항상 밝아 있습니다. 보고 듣는 사이에 은은히 다 있습니다.
'선천지이무기시(先天地易無其始)하고 후천지이무기종(後天地而無其終)이라',
천지보다 먼저 있어서 시작이 없고, 천지보다 뒤에 까지 있어서 끝이 없습니다.
이것이 한 물건이고, 우리의 근원입니다. '참나'는 이런 것입니다.
참나는 하늘보다 먼저 있어서 시작이 없고, 하늘보다 뒤에까지 있어서 끝이 없습니다.
참나가 무엇이냐? 이것이 딱 보이면 바로 한 물건입니다.
(물컵을 들어 보이며) 이것을 명상(名狀)으로 보면 그릇인데, 한 물건으로 보면 하늘보다 먼저 있고 하늘보다 뒤에 있는 이치입니다. 명칭이나 형상을 떼어 놓고 보면 팔 한번 드는 것이 하늘보다 먼저 아주 태곳적 역사이고, 또 팔 한번 드는 것이 하늘보다 뒤에 까지 있는 아주 최후적 역사라는 것입니다.
태고와 최후, 명상이 끊어진 그 한 물건은 오고 가고 앉고 눕는 데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한 물건은 오고 가는 데 분명하고, 보고 듣는 데 아주 은은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직 모를 뿐입니다.
그래서 이 미혹에서 우리 참나, 한 물건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 공부입니다.
수심공부(修心工夫), 즉 마음 닦는 공부입니다.
-종범스님 법문('인생과 한물건'에서 발췌)-
'성인들 가르침 > 종범스님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을 돌이켜 보는 관심수행법(觀心修行法) (0) | 2017.10.09 |
---|---|
수행이란 비동시성에서 동시성을 보는 것이다 (0) | 2017.10.04 |
자기의 진실상(眞實相)으로 돌아가는 방법 (0) | 2017.09.28 |
나의 진실한 모습은 '원융무이 부동본적(圓融無二 不動本寂)이다 (0) | 2017.09.24 |
육정참회(六情懺悔), 육진삼매(六塵三昧) (0) | 2017.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