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는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2017. 5. 26. 10:11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전번 회에서 연속으로 이어지는 대화입니다)

질문자 : 제가 헌신을 위해 마하리지 곁에 좀 더 머물고 싶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마하리지 : 우리가 방에 여유가 있다면 괜찮겠지만, 여러가지 모습을 바꿔가며 가장(假裝)하고 돌아 다니는 그 원리를 그대가 이해하고 나면 환(幻)은 그만 그치게 되어 있어. 이 원리, 이 의식을 한 마리 뱀으로도 보고 , 한 마리 물소로도 보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것으로 보게 되지만, 그 원인을  파악만 하게 되면  곧 알게 될거야.

우리들은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을 가져야 해, 마하트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오직 이 '내가 있음'에만 관심을 가져야 되네. 그 원리를 어서 알아내라구. 말로 이루어진 지식에만 정신을 팔지 말고, 내가 하는 말의 깊은 의미를 완전히 흡수해서,바로 그 근원으로 들어가야해.

질문자 : 제가 적극적으로 주시자가 될 때는 일어나는 모든 일을 조용히 관찰하게 되는데, 그것은 집중을 필요로 하고 두뇌자체에도 부담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피곤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명상 중에는 '내가 있다' 단계에 3,40분 이상 머물러 있지 못합니다. 그 정도 되면 머리가 진동하는 것 같아서 예전상태로

되돌아 갑니다. 이것이 나아지겠습니까, 아니면 두뇌에 가해지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하여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왜 그런데 쓸데없이 신경을 쓰고 그러나? 자네는 자신이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나는 자네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자네가 앉아 있다는 것을 주시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질문자 : '내가 있다'입니다.

마하리지 : 의식이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것을 주시하는 것은 누구냐구? 나는 자네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자네는 자신이 앉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 완전히 열려있어, 그러면서도 아주 불가사의하단 말야.

주시하려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말고 그냥 편안한 상태로 있어 봐. 자네는 지금 마음의 수준에서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연구하고 있는 것 같애. 

질문자 : 예, 제가 바로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하리지 : 자네는 주시하기를 연습하고 있을 뿐, 주시자가 되지는 못하고 있어. (주시란)무슨 특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냥 저절로 일어나고 있는거야. 집중에 대해서 비유해 보자면, 그것은 봄베이 정부의 사진을 찍으러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것과 같애. 정부의 사진을 찍을 수 있겠어?   

질문자 : 모든 것을 지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마하리지 : 바로 그 정부가 자네에게 수갑을 채울 수도 있어.


질문자 : 명상에서 내려오고 나면 두뇌에서 어떤 활동과 긴장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왜 일어납니까?


마하리지 : 명상에 들어갔다 내려오는 그 '자네'가 그 사람을 설명하는데, 그런 수행은 뭐하러 하는가? 그런 수행은 더 이상 하지 말고, 그냥 자네의 본래상태에 편안히 머물러 있으라구. 그것이 가장 높은 상태야. 그 보다 낮은 상태가 집중 수련 또는 명상수행이야. 어떤 것에도 상관하지 말고 '내가 있다'는 의식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해. 다시는 그런 지적 유희같은 것은 하지 말게나.

의식이 의식을 가리키고 그 지(知)를 설명해 주지만, 자네는 그것에 머물지 않고 여전히 그 육체를 끌어안겠지.

'내가 있다'는 앎이 '내가 있다'에게 그 자신에 대한 지(知)를 말해줄 뿐이야. 남이라고 하는 것은 없어. '너'와 '나'라는 것은  그 (개인적인) 몸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 뿐이야. 따라서 우리는 원래 침묵만 지키고 있을 뿐이야. 왜냐하면 아무도 없으니깐. 최전선은 모두 조용하지(서부전선 이상없음)


질문자 : 마음을 깨끗이 정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가 받은 만트라(진언)를  열심히 염송하라구. 그것을 하면 마음이 정화되지.



[閑 談]

위의 대담에서는 주시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시란 억지로 어떤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저절로 자연 주시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명상을 하기 위해서 앉아 있으면, 그 앉아 있는 사실을 아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몸뚱이의 감각기관으로내가 아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아는 것도 아닙니다. 몸이 앉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내가 있다'앎을 통해서 진아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비추고 있는 주시자는 우리의 의식으로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앉아 있으면 "나는 내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배면의 말없는 주시자가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도 앉아 있는 것을 알고, 내가 앉아 있는것을 알고, 너는 내가 앉아 있는 것을 알고, 나도 네가 앉아 있는 것을 아는데, 이 공통으로 알고 있는 것은 너와 나라는 개인이 아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것이 아는데 이것이 바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또한 완전히 불가사의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절대진아인 주시자입니다.

절대진아라는 것은 어떤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양변을 넘어선 절대 무(無), 즉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배면의 절대 무(無)인 주시자에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 주시자를 이원화 마음 쪽에서 들어갈 때에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며, 그 상태를 거쳐야 절대진아인 바탕으로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에서,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지만, 마지막의 <알고 있다>는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의 자연적인 비춤입니다.

내가 <컵>이라는 대상경계를 보는데, 그 컵이라고 하는 이름과 모양을 아는 것은 의식이지만, 그 경계를 알게 해주는 '말없는 비춤'은 절대진아에서 나옵니다. 이 '말없는 비춤'이 바로 자연 주시이며, 절대진아에서 항상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컵'같은 개별적인 경계대상을 성성하게 깨어서 내면의 바탕에서 되비추어 수동적으로 보면 그 컵이라는 대상경계는 없습니다. 마치 얼룩하나 없는 맑은 거울에는 물건의 상이 또렷하게 비추고 거울면도 동시에 보이듯이, 고요하고 또렷하게 깨어있는 마음으로 어떤 대상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면, 그대상의 그림자도 또한 마음의 비춤(거울면)임을 그대로 깨닫게 됩니다.

거울에 비친 어떤 상(相)을 바짝 깨어서 수동적으로 들여다 보면, 그 개별적인 상(相) 뿐만 아니라, 상의 그림자를 비추고 있는 배면의 맑은 거울면도 동시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상(萬象)은 그것이 바로 마음의 깨끗한 배경면 위에 나타나는 상이므로, 내면에서 되비추어 볼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그것이 허상의 그림자이면서 동시에 전체 마음바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인가 지켜 볼 때는 '내가 본다'는 식으로 능동적인 보는 자가 될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 무엇이 보여진다"식으로 "나"가 뒤로 물러나면 무엇인가 대상을 보되, 보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에서 "상(相)이 상(相)이 아님을 보라"는 것은 이렇게 수동적인 봄, 즉 " 무엇이 보여진다"라는 자세로 '나'가 생략되고 배면이 보는 것입니다.즉 '나'라는 아상(我相)이 없이 저절로 보여지는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보되 보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면에서 되비추어 본다는 것은 바로 수동적으로 "무엇 무엇이 보여진다"로써, '나'가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주시되려면 위에서도 마하리지가 말씀하셨듯이 '편안한 상태로 가만히 지켜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실은 그렇게 편안하게 마음이 고요히 있으려면 '사마타'수행이 사전에 필요합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배면으로 되비쳐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마하리지는 마지막에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려면 만트라를 염송하는 수련을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염송이나 염불을 할 때는 그냥 만트라나 염불을 입으로만 중얼거릴 것이 아니라, 입으로 염송을 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그것을 듣는 것이 무엇인지 참구하면서 해야 합니다. 그 염불을 듣는 것, 또는 염불하는 것을 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의식배면(절대無)에 있으며, 그것은 절대로 의식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모르는 것' 또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도 마하리지가 그것은 완전히 열려 있고, 또한 불가사의 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하튼 위의 글에서 우리가 취하여야 할 중요한 것은 <주시는 저절로 일어난다>라는 것을 잘 이해하여야 하겠습니다. 따라서 모두에게 공통되는 우리의 주시자는 볼 수도 없고 알수도 없지만, 생시, 잠, 꿈, 탄생,죽음, 어느 때든지 항상 깨어서 영원히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그 주시자가 바로 본래의 나 자신(참나)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