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진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2017. 5. 4. 10:03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 : 깨달음을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합니까?

마하리쉬 : 깨달음은 가르침, 강설(講說), 명상 등의 결과라기 보다는 스승의 은총의 결과입니다. 가르침 따위는 2차적인 보조수단에 불과하지만, 은총은 1차적이고 본질적인 원인입니다.

방문자 : 진아 깨달음을 가로막는 장애는 무엇입니까?

마하리쉬 : 마음의 습(習)입니다.

방문자 : 마음의 습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진아를 깨달음으로써 극복합니다.

방문자  : 그것은 하나의 순환논법입니다.


마하리쉬 : 바로 (그대의) 에고가 장애물을 만들어 그런 어려움을 야기하고 나서, 외관상의 모순에 걸려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런 질문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찾아내십시오, 그러면 진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방문자 : 깨달음의 방편들은 어떤 것입니까?

마하리쉬 : 경전과 깨달은 영혼들이 일러주는 가르침입니다.

방문자 : 그 가르침이 토론, 강설, 명상의 형태일 수도 있습니까?

마하리쉬 : 그렇습니다. 그런 것은 모두 2차적인 방편일 뿐이고, 본질적인 것은 스승의 은총입니다.

방문자 : 그것을 얻는데는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마하리쉬 : 왜 알려고 합니까?

방문자 : 희망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마하리쉬 : 그런 욕망도 하나의 장애물입니다. 진아는 항상 존재하며 그것 없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아가 되십시오. 그러면 그런 욕망과 의심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런 진아가 바로 잠,꿈, 생시라는 (세가지)존재 상태의 주시자입니다. 이런 상태들은 에고에 속합니다. 진아는 에고도 넘어섭니다. 그대는 잠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그대는 자신이 잠들어 있다거나 세계를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잠의 체험은 아무 것도 지각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그대가 말하는 것은 생시의 상태일 뿐입니다. 따라서 잠들어 있을 때의 의식이나 깨어있을 때의 의식이나 동일합니다. 만일 그대가 이 생시의 의식이 무엇인지를 알면, 세 가지 상태 모두를 지켜보는 그 의식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잠들어 있을 때와 같은 의식을 추구하면 그런 의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방문자 : 그러다 보면 저는 잠이 들어 버립니다.

마하리쉬 : 상관없지요 !

방문자 : 그것은 하나의 공백상태입니다.

마하리쉬 : 누구에게 그 공백상태가 있습니까? 알아내십시오. 그대는 한시도 그대자신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진아)는 항상 있으며 모든 상태에서 지속됩니다.

방문자 : 마치 잠자는 상태에 있으면서 활짝 깨어있어야 합니까?

마하리쉬 : 그렇습니다. 활짝 깨어있음은 생시와 같습니다. 따라서 그 상태는 잠의 상태가 아니라 '잠 없는 잠'입니다. 만일 생각들이 일어나는대로 따라가면 그 생각들에 휩쓸리게 될 것이고, 끝없는 미로를 헤메게 될 것입니다.

방문자 : 그렇다면 생각들의 근원으로 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마하리쉬 : 정말 그렇지요. 그렇게 하면 생각들이 사라지고 진아만이 남게 됩니다. 사실 진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습니다. 안이나 밖도 에고의 투사물입니다. 진아는 순수하고 절대적입니다.

방문자 : 그것은 지적으로 이해될 뿐입니다. 지성도 깨달음의 한 보조수단 아닙니까?

마하리쉬 : 그렇지요. 어느 단계까지는, 그렇기는 하나 진아는 지성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깨달으십시오. 진아에 도달하려면 지성 자체가 사라져야 합니다.

방문자 : 저의 깨달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마하리쉬 : 예, 물론이지요. 그것이 그대가 줄 수 있는 최선의 도움입니다. 그러나 도와 줄 다른 사람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금 세공인이 금으로 만들어진 여러가지 보물을 감정할 때 금만 보듯이, 깨달은 존재는 진아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대 자신을 몸과 동일시할 때만 형상과 모양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몸을 초월하면, 몸-의식과 함께 다른 사람들도 사라집니다.

방문자 : 풀이나 나무들도 그렇습니까? 

마하리쉬 : 그것들이 과연 진아와 별개로 존재합니까? 그것을 밝혀내십시오. 그대는 자신이 그것들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 생각은 그대의 진아로부터 투사되어 나옵니다. 그것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밝혀내십시오, 그러면 생각들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진아만 남게 됩니다.

방문자 : 이론적으로는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쉬 : 그렇지요. 그것은 영화와 같습니다. 화막(畵幕, 스크린)에 빛이 비치고 있고, 그 위를 언뜻 언뜻 지나가는 그림자들이 관객들에게는 어떤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일 그 영화 안에 관객도 (작품의 일부로서) 나타나게 한다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모두 화막 위에 놓이게 되겠지요. 이것을 그대 자신에게 적용해 보십시오. (진아인) 그대는 화막입니다. 진아가 (에고(보는 자)를 만들어 냈고, 에고는 생각이라고 하는 부가물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 생각들이 세계와, 그대가 지금 묻는 나무나 풀 등(보이는 대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이 모두가 진아일 뿐입니다. 만일 그대가 진아를 보게 되면, 어디서나 항상 모든 것이 진아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진아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문자 : 예, 저는 아직 이론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내용은 간명하고 아름다우며 설득력이 있습니다.

마하리쉬 : '나는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도 하나의 장애입니다. 사실 진아만이 존재합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한담(閑談)]

이 부로그가 처음 만든 것이 2004년 6월경이니깐, 그때부터 마하리쉬의 말씀들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새 13여년이 지난 지금, 그 두꺼운 책의 마지막 장까지 넘겼습니다.  물론 책 전체를 올린 것은 아니고 개중에 빠진 것도 좀 있었지만, 수행자에게 참고될 만한 문장들은 거의 다 올려습니다. 그래서 이번 부터는 마하리쉬 대담록을 처음부터 새로 다시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진아를 깨닫는 수많은 방편 중에서 관조(觀照)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관조(觀照)라는 것을 대부분이 '관찰' 또는 '무엇을 지켜본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정신수행 측면에서는 관조(觀照)한다는 것은 보통 대상을 관찰한다, 또는 무엇인가를 지켜본다는 의미와는 약간 다릅니다.

관조(觀照)는 '되비추어 본다'는 의미로 "절대바탕의 입장에서 되비추어 본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럼 그냥 관찰한다거나 지켜본다는 것과 관조(觀照)는 어떻게 다른가? 물론 이것은 이 글쓴이의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관찰한다" "지켜본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인데 이 때는 봄의 삼요소(보는 자,보는 대상, 보는 작용)이 모두 형성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때는 유위적(有爲的)인 봄 행위상태입니다. 그래서 나(我,개아)가 있는 상태입니다. 이 유위적인 봄은 항상 그 뒤에 생각이나 분별심(分別心), 판단,기억의 재생,등 생각이 따라 일어납니다. 즉 분별심이나 망상이 보는 행동과 함께 뒤따라서 일어날 수 밖에 없습니다. 유식학적으로 말하면 5식(識)과 6,7식(識)이 이따라 일어나서 에고적인 망상을 하게 됩니다. 즉 "내가 무엇을 본다"는 내가 무엇인가를 대상으로써 바라보면 그 대상에 대한 어떤 인상이나 기억, 분별심 등의 육식의 분별망상심이 작동합니다. 이것이 보통 중생의 마음작용입니다.그러나 정신수행에서 관조(觀照)라는 것은 감각작용, 즉 5식의 감각작용은 있되, 6식의 분별작용이 제외됩니다.5식과 8식만 작동합니다. 이 경우를 "보되 보지 않는다"라고도 표현하는데, 이러한 관조(觀照)하는 자세를 갖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특별한 자세로 모든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즉 수동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방법인데, 이를테면 모든 대상에 대해서  "보여진다" 또는 "들려진다" "느껴진다" 식으로 "나'가 뒤로 물러나서 수동적으로 감각되어진다 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입니다. 즉 분별심없이(아무 생각없이) 그저 수동적으로 바라만 보는 자세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꽃을 본다"했을 때에는 "나"라는 "보는 자"가 꽃이라는 "대상"을 능동적으로 "본다"는 자세를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만일 "나에게 꽃이 보여진다"라고 여기면 "보는 자"의 주체인 "나"는 뒤로 물러서서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것이 됩니다. 소리를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염불이나 다라니같은 수행을 할 때도 수동적으로 소리를 듣는 자가 누구인지를 탐구하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온갖 소리가 우리 귀에 저절로 들려오는데, 이러한 소리가 저절로 들려오는 것을 무심히(생각없이) 관찰하면 수동적인 듣는 자가 모양없는 무한한 무(無)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에고인 '나'가 저절로  무한하고 모양없는 "무(無)'가 됩니다. 이때에 "나"는 유위(有爲)적 행동(보는 작용, 듣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보여지고 들려지는 무위(無爲)적인 행위에 가깝게 접근됩니다. 이렇게 평시의 일상생활에서도 수동적인 입장에서 "나"가 물러나서 모든 대상을 아무 생각없이 수동적으로 관조(觀照)하는 수련을 오랫동안 하면, 점차로 '나'라는 에고가 점점 뒤로 물러나면서 엷어져서 나중에는 나'가 사라져 모양없는 '무(無)' 또는 무한하고  말없는 주시자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말없는 주시자, 모양없는 주시자로 들어갈 수 있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도 쉽게 할 수 있는 한가지 수행 방법입니다. 대상을 보는 자세, 소리를 듣는 자세만 바뀌면, 보는 자, 듣는자가 절대진아임을 깨닫게 됩니다.즉 자기는 모양없는 무한한 주시자일 뿐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말없는 주시자와 합일이 되면 바로 이러한 때가  성인의 흐름, 즉 깨달음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는 경지가 됩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업습(業習)들을 제거하는 수행을 꾸준히 하고나면  위에서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 것처럼 모든 것이 진아라는 궁극적 자각(깨달음)이 확고하게 확립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안에서 진정한 부처의 탄생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