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9. 09:43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 : 생각 하나마다 주체와 대상이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이처럼 주체가 사라질 때 '나'는 사라지지 않습니까? 만약 사라진다면 '나'에 대한 탐구를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주체(아는 자)는 마음의 한 상(相)일 뿐입니다. 그 상(相)은 지나가지만, 그 이면의 실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상(相)의 배경이 '나'인데, 마음의 상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고 가라앉습니다.
방문자 : 진아를 '듣는 자', '생각하는 자','아는 자' 등으로 묘사하고 나서, 또 그것을 '듣지 않는 자', '생각하지 않는 자' '모르는 자'라고 묘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하리쉬 : 바로 그거지요. 보통 사람은 지성(明知殼) 안에서 변상(變相)들이 일어날 때만 자신을 자각합니다. 이런 변상들은 일시적이어서, 일어나고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명지각(明知殼)을 하나의 각(殼), 곧 껍질이라고 부릅니다.
순수한 자각이 남아 있을 때 그것은 그 자체로 찌뜨(진아), 즉 지고자입니다. 생각들이 가라앉아 버린 뒤에 자신의 본래적 상태 안에 있는 것이 지복입니다. 만일 그 지복이 일시적이라면, 즉 일어나고 가라앉는다면, 그것은 지복의 껍질(至福殼)일 뿐입니다. 모든 생각이 가라앉고 나면, 주의를 그 순수한 '나'에 고정하고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극히 미세한 하나의 생각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정한 자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해탈정수>와 <분별정보>에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잠 속에서 진아의 자각은 상실되지 않지만, 개아의 무지는 그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이 무지가 파괴되려면 이 미세한 마음의 상태(相知)가 필요합니다. 햇빛에는 솜이 타지 않지만, 솜을 렌즈 밑에두면 불이 일어나 그 렌즈를 통과하는 햇빛에 다 타 버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진아의 자각은 항상 있지만 그것이 무지를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명상을 해서 그 미세한 생각의 상태를 얻으면 무지가 소멸됩니다. 또 분별정보에서는 "극히 미세한 지고아의 진리는 거친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고, "이것은 스스로 빛나면 일체를 주시한다"고 합니다.
이 미세한 마음상태는 브리띠(相, vritti)라고 불리는 마음의 한 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태에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본래적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들의 형태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진리이고, 후자는 그 행위자나름의 상태입니다. 후자가 사멸되고, '물 속의 세제 덩이처럼'전자만 남게 됩니다. (주: 옛날에 빨래의 때를 빼기 위한 넣었던 자연세제덩어리를 말하는데, 이 세제는 빨래 속의 때만 빼고 물 속에 세제덩어리는 녹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명상입니다. 이것은 비록 분별의 삼요소(아는 자, 앎, 아는 대상)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순수한 자각으로 귀결됩니다. 명상은 애를 써야 하지만, 진지는 애씀이 없습니다. 명상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고 잘못될 수도 있으나, 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명상은 행위자 나름이지만, 진지는 실재 그대로 입니다.
-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
[閑 談]
맨위의 마하리지 답변인 <주체(아는 자)는 마음의 한 상(相)일 뿐입니다. 그 상(相)은 지나가지만, 그 이면의 실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상(相)의 배경이 '나'인데, 마음의 상들은 그 안에서 일어나고 가라앉습니다. >에서,
위에서 말하는 주체(아는 자)는 개아(個我), 즉 육체를 동일시한 "나"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를 본다'할 때에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에서 '나'는 대상을 보는 자이며, 이 '나'는 '개아'이며, 이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 마음의 한 상(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의 이면에 있는 실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라고 했을 때에 그 이면에는 표현되지 않으므로 사라지지도 않는 실재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나는 '내가 모니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표현하게 되며,여기서 "나는 '~ ~'알고 있다'가 바로 이면에 있는 실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내가 있다" 또는 " I AM"이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이 이면에 있는 주시자입니다. 물론 절대진아는 이 "내가 있다"를 지켜보고 있는 최종 주시자이지만, 여기서는 마하리쉬가 개아의 이면에 있는 "내가 있다"를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은 지성(明知殼) 안에서 변상(變相)들이 일어날 때만 자신을 자각합니다. 이런 변상들은 일시적이어서, 일어나고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명지각(明知殼)을 하나의 각(殼), 곧 껍질이라고 부릅니다. >에서,
지성 안에서 어떤 변상들이 일어날 때만 자신을 자각한다는 것은, 어떤 지각작용이나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났을 때에만 "나"라는 주체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무엇인가를 본다고 느낄 때에 "내가 무엇을 본다"는 느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대상을 지각하면서 그 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육체적인 "나"가 지각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느낌이나 지각작용, 생각들이 일어나면 "나"라는 개아의 주체도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지각이나 인식, 생각의 움직임 등이 모두 마음의 변상들인데, 이런 마음의 변상들은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고 다시 또 다른 변상들이 생기면서 계속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변상(變相, 변하는 상)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렇다면 변상이 없는 순수한 마음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절대자각(自覺)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어떤 변상(變相, 파동성움직임)이 없는 깨끗한 마음입니다. 이것을 파동성으로 비유해서 설명해 보자면, 절대자각은 파동성이 완전 공진되어 파동성 변화가 무(無)인 상태를 말합니다. 파동성, 즉 파장(波長)이 제로(0)상태가 절대공진상태이며,이때는 주파수는 무한대상태이므로, 시간이 없고 공간은 무한대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이 공진상태 외부에서 볼 때는 점(點)의 상태같이 보입니다. 이와같이 時空이 없는 상태를 절대공진상태로 가상을 한다면 이 절대공진점은 무한대의 파동에너지를 잠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절대공진상태를 유지한 상태에서 주변에 어떤 환경이 조성되면 어떤 조건화된 파동성이 유기되어 발생할 수가 있습니다. 즉 자체 절대공진상태는 변화가 없지만, 주변의 어떤 조건에 감응하는 변상(變相)의 파동성 에너지가 유기되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대진아상태로부터 거친 파동성이 유기되어 일어나 변화하는 파동에너지 상태를 변상(變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식자체가 파동성이며, 순수의식은 변상이 없는 깨끗한 순수 파동성으로 비유할 수 있지만, 의식의 변상은 육체의 오염된 조건에 의해서 유도된 거친 파동성의 변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에서 고요한 상태가 순수의식이라고 가정한다면 온갖 탐진치(貪嗔稚)와 망상, 상상,그리고 감각기관에 나타난 모든 지각대상, 즉 세상의 삼라만상은 모두가 육체기관에 의하여 오염되어 만들어진 마음의 변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의 변상들은 명지각(明知殼)이라는 지성의 껍질 안에서 만들어지는데,
왜 똑같은 앎의 성질이 있는데, 지성의 껍질과 순수지성을 구분하는 것일까요? 지성의 껍질이라는 것은 마음의 한 부분이며 주체와 대상으로 갈라진 이원적인 앎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마음 안에서 나타나는 앎을 지성의 껍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무지(無知)에 의하여 반사된 반사앎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절대진아에서 직접 나온 대상이 없는 비이원적인 순수앎을 진지(眞知)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태양빛으로 비유해 보자면, 태양 자체를 절대진아라고 부른다면 태양에서 직접 비친 태양빛을 순수앎 또는 대상이 없는 앎,진지(眞知)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다. 반면 우리가 이원적인 앎이라고 부르는 지성각(知性殼), 즉 지성의 껍질 안에서 느끼는 대상적인 앎은 태양에서 비치는 빛이 달의 표면에 반사되면 달빛이 되어 그 달빛으로 밤 중에 달맟이 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즉 태양에서 직접 비친 빛이 아니라, 한번 반사된 달빛으로 어스럼한 밤중에 물건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보통 마음으로 아는 지성각(지성의 껍질)과 진아에서 직접 비치는 진지(眞知)의 순수 앎과의 개념적인 차별을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가지 경전을 공부하고 성인들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는 이 모든 노력의 앎의 활동은 모두가 지성의 껍질인 이원적이며 간접적인 반사앎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진지(眞知), 순수앎 쪽으로 주의를 돌릴 수가 있습니다.
<모든 생각이 가라앉고 나면, 주의를 그 순수한 '나'에 고정하고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에서,
주의를 순수한 '나'에 고정하라는 것은 "내가 있다"앎, 즉 존재핵점, 현상계의 주시자에 안주하여 계속 붙잡고 유지하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이 지점은 대상적인 앎으로 절대로 모르는 상태며, 항상 모름의 주시자측면을 말합니다.
<진아의 자각은 항상 있지만 그것이 무지를 없애버리지 않습니다. 명상을 해서 그 미세한 생각의 상태를 얻으면 무지가 소멸됩니다. 또 분별정보에서는 "극히 미세한 지고아의 진리는 거친 눈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고, "이것은 스스로 빛나면 일체를 주시한다"고 합니다. >에서,
진아의 자각이라는 것은 변함없이 항상 유지되고 있는데, 그 위에 무지(無知)의 두터운 껍질이 덮혀 있다는 것입니다. 지성의 껍질도 그 무지의 껍질에 한 층에 불과합니다. 무지의 껍질에는 제일 겉면에 음식의 껍질(육체)이 있고, 그 다음에 생기(生氣,운동 감각활동에너지)의 껍질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마음(사고작용)의 껍질, 지성의 껍질(앎), 그 다음에 지복의 껍질(원인체) 이렇게 개인의식에서는 다섯개의 껍질이 있고, 다음에 초원인체라는 "내가 있다" 핵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다섯개의 껍질이 사라지면 초원인체는 절대진아가 됩니다. 그래서 절대진아는 무지의 개체아에서는 알 수가 없고, "내가 있다"는 핵점인 초원인체의 미세한 의식상태에서만, 진아자체가 스스로 빛나면서 일체를 주시한다라는 것을 깨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상수행을 한다는 것은 이 개인의식의 다섯가지 껍질을 벗겨내고 초원인체인 미세한 의식의 "내가 있다"핵점상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닦는 것입니다. 그 상태에 도달하면 의식의 원초상태가 되므로 진아에서 직접 비치는 진지(眞知)로 무위적으로 절대진아를 깨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지에 덮힌 개인의식으로는 절대로 진아를 깨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미세한 마음상태는 브리띠(相, vritti)라고 불리는 마음의 한 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상태에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본래적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대상들의 형태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진리이고, 후자는 그 행위자나름의 상태입니다.>에서,
이 미세한 마음 상태라는 것은 바로 "내가 있다"앎의 핵점, 초(대)원인체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파동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아주 미세한 파동성이 있지만 순수한 상태여서 거친 마음으로는 알려지지는 않습니다. 즉 대상으로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미세한 파동성이므로 상(相)으로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거친 파동성을 가진 상(相)은 그것이 대상화된 상(想)으로 나타나는데, 개인의 업식과 행위에 따라 일어났다 꺼졌다 하므로 행위자 나름으로 생긴 변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변상이 없는 고요한 의식을 진아라 하고, 수시로 변하는 변상의식은 개인의 업식과 주체적 행위성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명상이란 "내가 있다"는 핵점상태가 되어, 거친 마음의 변상들을, 마치 세제가 빨래의 때만 녹이듯이, 없애버리고,세제덩어리처럼 물에 그대로 남아 있듯이, "내가 있다"는 앎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있다"핵점의 대원인체에서 무지의 다섯가지 껍질을 벗겨버리면, 그 자리에서 "내가 있다"핵점이 절대진아로 바로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가 절대진아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내가 있다" 핵점에서 어떤 명상수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 아무 애씀없이, 즉 무위(無爲)로 진지(眞知)를 유지하고 있으면 저절로 순수자각(절대진아)으로 귀결된다는 것입니다. 즉 무위라는 것은 주체자'인 '나'가 없는 상태이므로, 명상은 행위자인 나가 있지만, 진지(眞知)는 '나'가 없는 무위(無爲)로 저절로 절대진아를 깨친다는 것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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