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21. 09:45ㆍ카테고리 없음
마하리지 : 상상이나 관념에 속박되지 말고 그것들로부터 초연할 것이며, 일체가 그 성품에 따라 일어나도록 놔둬.
자네는 지금 몸-마음의 느낌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이 대상 세계에 연결되어 묶여 있는데, 이 지금 대상세계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가 아주 심각한 상태란 말야. 내면의 진아에서 나오는 진실된 지켜봄이 자유인데, 그것이 바로 자네들의 것이란 말이야.
내면에 있는 진아는 오직 하늘의 텅빔일 뿐이지만, 자신에게 나타난 의식을 통해서 자네는 그것들을 보고 있는거야.
자신이 깨어있다는 앎과 더불어 자네는 세상이 온갖 대상화된 그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지만, 그 세상 모든 것들은 자네 (마음)안에 있는 것이야.
깊은 잠 속에서는 아무 그림도 없고 아무런 대상화 된 영상이 보이지 않지. 이 대상화 세계가 생겨야 할 어떤 원인도 없어. 그것들은 저절로 나타날 뿐이야. 누가 어떤 행위를 한 것도 아니란 말야. 의식 자체가 그것을 자각하는 자에게 말해 줄거야. 그래서 그것들이 모두 그대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이야.
이것을 이해하기는 아주 어려워. 의식이 보편적인 의식에 의해 주시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결국은 궁극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야.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내가 있다'는 현현된 앎에 막혀 있어.
세계가 내 안에 있지, 내가 세계 안에 있는 것이 아냐. 바가반(신)은 이 현현된 세계이기도 한 그 빛이지. 나는 그 빛을 깨쳤지만, 그 빛에 의해 속박되지 않고 그 안에 있지도 않아.
그것이 우리가 현상계를 지켜보는 상태야. 이스와라(신) 상태는 이 현상계에 대한 주시하기가 일어나는 곳으로서 절대자 영역으로 들어가는 경계선이자, 존재로부터 비존재로 들어가는 니르구나(無)의 시작이야. 그것이 절대자의 시작이라구. 그것은 '내가 있음'이 아냐. 절대자는 말을 할 수 없지만, 이 대화에서는 그것만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진리를 추구하는 어떤 방법도 말할 수 없어. 다만 자네에게 생명기운을 정화하라고 말해 줄 수 밖에 없어.
자네는 명호-진언(nana-mantra)에 대한 명상을 하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고, 그게 전부야.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구. 명호를 염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은 원초적인 리듬(파동)이야. 이 명호-진언의 리듬을 타라구. 그렇게 하다보면 자네 자신을 잊어 버리고 모든 번뇌가 사라지는 때가 온다네.
질문자 : 이 현상계가 저 자신이면 거기에 제가 어떤 형상을 가져 올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자네가 몸-마음에 집착하면 현상세계에서 갈라져 나와서 세계와 따로 떨어진 개체만을 보게 되지. 그 상태에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개선시키고 싶은 여러가지 욕망을 갖게 되는 거야.
그 다음 상태는 '내가 있음'인데, 여기서는 모든 행위가 나 자신이고 현현된 모든 사물이 나 자신이 되지. 그 상태에서는 무엇을 향상시킨다는 것이 없어. 자네 자신이 바로 현상계이고, '나는 일체다'라는 것이야.
그 다음은 태어나지 않은 불생(不生)의 상태인데, 여기서는 '내가 있다'를 이해할 어떤 존재성도 없어. 그것이 최고의 경지야.
내가 나 자신을 산야시(출가구도자)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조건 지우게 하는 것이야. '나는 머리를 헝클고 있어야 겠다' '나는 탁발을 해야겠다' '나는 이것만 먹어야 겠다'는 식으로 말야. 그래서 나는 어떤 태도도 취하지 않아. 누가 음식을 주면 이 몸뚱이가 즐기는 어떤 음식이든 먹고, 그렇지 않은 것은 먹지 않게 내비러 두었어. 이것은 좋고 저것을 싫다는 그런 것이 아니야.
자네가 도달해야 할 첫째 단계는 존재성이야. '내가 있다'는 그 앎을 끌어 안고, 그것이 되어야 해. 나는 지금 내가 가장 잘 알고 친숙한 방법을 말하고 있는 거야. 꿈 세계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나타났고 자네가 그것을 지켜보듯이, 이 세계도 청하지 않았는데 나타났고 자네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지. 그저 지켜보기만 하라구.
저절로, 모르는 사이에, 자네의 존재성이 나타났어. '이제 내가 존재해야겠다'고 자네가 알면서 일부로 존재한 것이 아니잖아. '내가 있음'이 생기고 난 뒤에야 자네는 '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야.
질문자 : 저의 정상적인 가정적 임무를 계속 해 나갈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온 정성을 다해서 그것들을 해나가라구. 단 내가 말한 것을 명확히 이해해야 돼. 그것을 이해하고 나서 그것을 계속 기억하고 항상 생각하고 있어. 생명기운이 마음의 움직임의 원인이야. 잠 잘 때 외에는 그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유지되어야 해. 겉으로는 큰 소리로 찬송을 하고 우리가 무슨 영적인 행위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어떤 의식을 치룰 수도 있겠지만, 마음은 그 찬송 따위에 집중되지 않고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지.
질문자 :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에 전적으로 즐기고 있을 때는 '나'라는 느낌이 없습니다.
마하리지 : 그 존재성은 마음의 습에 완전히 몰입해 있지만, 저 비존재의 상태만은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야.
자네가 있고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그 원리를 명상하라구. 그것이 현상세계의 바로 근원이야. 모든 행위는 생명기운에 의해 수행되며, 생명기운의 언어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이지.
진언이나 염송은 생명기운에 의해 수행되며, 이 존재성은 생명기운의 그런 행위들에 대한 주시자일 뿐이야.
'내가 있다'는 메세지는 주시자에 불과하고, 생명기운이 모든 활동을 촉발시키는 거야. 이 두 가지 개체를 지탱하는 것은 음식 몸, 음식기운이야. '내가 있다'는 앎은 필림, 곧 운명이라구. 결국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가 기록 되어 있고 일체가 일어나는 저 탄생의 존재핵점, 저 필름이란 말이지. 여기서 '자네'란 것이 어디에 있나?
'내가 있음'은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체가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의 화학반응점(존재핵점)이라구. 이것을 깨달으면 자네가 한 개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야.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Seeds of Consiousness)-
[閑 談]
마하리지는 윗글에서 생각이나 대상에 관심을 두지 말고 그 이면의 주시자에 주의를 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은 마음의 대상입니다. 그 뿐 아니라 우리 마음 속의 모든 생각이나 느낌, 기억, 앎 등, 우리 의식에 알려지는 모든 것은 대상입니다. 물론 몸과 감각기관, 의식도 전부 대상입니다. 모든 알려지고 보여지고 느껴지는 모든 것이 오로지 대상일 뿐이라면 주시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주시자는 절대로 알려지거나 보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마음으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대상만 있을 뿐이지 주시자는 절대로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포함하여 모든 현상계의 주시자는 "내가 있다"는 앎이라고 했습니다. 이 "내가 있다" 앎이라고 하는 것은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써 보고 있으므로 지금 현재 "내가 있다"앎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우리가 생각과 상상과 느낌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도 마음 표면에 나타난 의식의 대상입니다. 세상도 의식의 대상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의식의 거친 파동의식이 움직이는 그림자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있다"앎은 이러한 모든 마음의 작용과 현상세계가 나온 의식의 가장 미세한 뿌리입니다. "내가 있다"앎이 현상세계와 마음의 뿌리라고는 하지만 의식의 파동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있다"앎이 존재의식이라고도 하는데, 의식 중에서 가장 미세한 의식입니다. 말하자면 테레비 수상기 화면에서 동영상 그림과 소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현상계이지만, 이 그림들이 수상기 화면의 흰색바탕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모든 현상계의 근원은 "내가 있다"존재의식의 배경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상이 있는 한에는 그 배경에 항상 존재의식이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즉 모든 마음의 움직임과 현상계의 주시자는 항상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보이든가, 알려질려면 거기에는 동시에 이면의 주시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시자는 대상으로서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함으로서 마치 육체의 눈이 보고 귀로 듣고 자기 마음으로 느낀다고 여겨서 그 알고 듣고 보고 하는 자를 개인 육체 의식 범위내로 한계지워 축소시켜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앎의 상태, 즉 전체 우주의식이 되면, 그런 육체를 가진 개인은 없다는 깨침이 저절로 옵니다. 왜냐하면 전체 우주 현상계가 자기 자신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과정에서 일차적으로 모든 현상계와 마음을 주시하는 "내가 있다"앎의 존재의식을 되찾아내야 합니다.
원래 "내가 있다"라는 말은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에서 영어로는 "I AM"을 "내가 있다"라고 한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엠"을 "내가 있다"란 말 그대로 번역하면 수행을 안해 본 사람은 그 의미를 잘못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I AM"을 그 의미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일상 말 넘어의 "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깨어있다"라고 말한다면, 실은 더 자세히 표현해 보자면 "내가 지금 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서 <알고 있다> 주시자부분이 "I AM"을 의미합니다. 마하리지 대담록에 나오는 "내가 있다"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이 <알고 있다>는 보통 생략됩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바로 모든 우리들의 일상활동과 심리현상에서 항상 붙어 있는 주시자로써 존재하면서 말없이 "알고 있다, 알고 있다 - - " 연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하리지가 줄기차게 말씀하시는 " 아이 엠"입니다. 그 < I AM>이 모든 생각과 말의 넘어로 생략된 <말없는 알고 있다>입니다.
이제 "내가 있다"가 무엇인지 이해 했겠죠.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를 <I AM>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모니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지만, 우리는 맨 끝의 <알고 있다>는 보통 생략되죠. 또 우리는 잠 잘 때는 나는 잠을 자고 있다는 말을 잠을 든 상태에서는 할 수가 없죠. 그러나 잠을 깨서는 "아, 잠을 참 잘 잤다"라고 느끼거나 생각합니다. 잠을 편안하게 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죠. 따라서 나는 잠자는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아는 자가 잠을 자는 중에서 깨어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I AM> 또는 < ~ 알고 있다>는 그 주시자는 잠을 자는 중에도 깨어 있어서 잠 자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 주시자입니다. 그래서 생시, 잠, 꿈을 주시하고 있는 것이 이 <I AM>입니다.
마하리지는 수행의 1차 목표로써 이 <내가 있다>앎이 무엇인줄 이해하고 그것에 안정되게 머무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내가 있다"앎, 또는 <~알고 있음> 자체는 우리가 마음으로는 알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가 있다> 앎이 되기 위한 기초 수행으로 마하리지는 만트라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하리지 자신이 맨 처음 싯따르메쉬와르 마하리지를 찾아가서 입문 할 때에 <따뜨 뜨왐 아시>(그대가 그것이다)라는 만트라를 받아서 그것만을 열심히 수행하다가 3년만에 "내가 있다"앎에 도달한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트라나 염송을 하는 것이 초보자들에게 가장 쉽고 빠른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있다"는 경지에 가서도 절대진아를 깨치려면 많은 길을 더 가야 되겟지만, 일단 "내가 있다"까지는 만트라나 염송을 하라고 권유하십니다.
불교에서 염불이나 다라니 염송을 수행하는데, 무조건 염불이나 다라니 구절을 외우기만 해가지고는 수행의 효과가 덜 하고, 그 염불소리를 듣는 자, 다라니를 듣는 자가 누구인지를 염불을 하면서 동시에 탐구하라고 권유합니다.
말하자면 염불하면서 그 염불소리를 듣는 자 입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염불을 주시하는 주시자를 말합니다.
바로 그 염불을 하면서 듣는자, 다라니를 듣는 자가 여기서 말하는 "내가 있다"앎, 또는 주시자(알고 있다)를 말합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탐구법도 있고, 간화선의 화두수행도 거의 같은 방법입니다. 또한 크리스나무리티가 말하는 말없이 '관조'하는 방법도 같은 길입니다.
"내가 있다"존재의식상태에 안정되게 있으면 절대진아는 인연이 닿으면 저절로 깨치는 무위자연적인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은 수행이라기 보다는 수행을 그친 무위의 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니사르가다타'라는 말 자체가 '자연'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있다"는 앎의 존재핵점은 모든 현상계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육체와 세계는 의식의 거친 파동성 의식인데, 뿌리 부분인 "내가 있다"앎은 아주 미세한 파동성의식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미세한 파동성이 거칠게 변화되어 드러난 것들이 바로 마음의 움직임과 현상계라는 것이죠.
물론 "내가 있다"존재앎이 나온 곳은 절대 진아이므로, 최종적인 근원은 절대진아가 되겠죠.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전체 말씀의 요지는 이 "내가 있다"앎이 되라는 말씀이므로, 매번 이 "내가 있다"앎의 존재의식에 대하여 수없이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을 말씀드린 바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이 "내가 있다" 존재의식의 앎에 대하여 비슷한 내용으로 반복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많을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