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7. 9. 10:57ㆍ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 : 저는 저 자신을 계속 분석해 보면 지성을 넘어서는데, 그리고 나서 아무런 행복이 없습니다.
마하리쉬 : 지성은 진아의 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것 자체를 넘어서 있는 것을 아는 데는 그것이 도움이 될 수 없지요.
방문자 : 그것은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넘어에는 아무 행복이 없습니다.
마하리쉬 : 지성은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앎 그 자체인 진아이기 때문에 이미 알려져 있고, 따라서 앎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지성은 그대에게 바깥의 사물들을 보게 해 주지, 그 자체의 근원인 것을 보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방문자 : 그 질문을 되풀이 하겠습니다.
마하리쉬 : 지성은 그대가 자신을 분석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데까지는 유용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것이 에고(존재의식) 속으로 합일되어야 하고, 그 에고(존재의식)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에고(존재)는 사라집니다. 그 근원으로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에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문자 : 그 상태에서는 아무 행복이 없습니다.
마하리쉬 : '아무 행복이 없다'는 것은 하나의 생각일 뿐입니다. 진아는 순수하고 단순한 지복입니다. 그대는 진아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지복이 아닐 수 없고, 그러니 아무 행복이 없다는 말을 할 수 없지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진아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비아(非眞我,個我)이고, 진아의 지복을 깨달으려면 그것이 없어져야 합니다.
방문자 :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하리쉬 : 그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그것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 혹은 지성이 누구에게 작용하는지 보십시오. 그 에고(내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지성을 에고(나라는 느낌)와 합일시키고 그 에고(나라는 느낌)의 근원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에고(나라는 느낌)는 사라집니다.
'나는 안다'와 '나는 모른다'는 하나의 주체와 하나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원성에 기인합니다.
진아는 순수하고 절대적이며, 오직 하나입니다. 두개의 자아가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원성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인 진아일 수는 없고, 그것은 비아(개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원성이 바로 에고의 특징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는 이원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에고임을 알고, 그 근원을 찾으십시오.
생각이 없는 정도가 진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 진보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진아 깨달음 자체는 어떤 진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똑같으니까요. 진아는 항상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장애물은 생각들입니다.
진보는 진아가 항상 깨달아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제기된 정도에 의해 가늠합니다.
따라서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찾으면서 그 생각들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그 근원으로 나아가십시오.
방문자 : 의심이 계속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드립니다.
마하리쉬 : 한 의심이 일어나서 해소되면 다른 의심이 일어나서 해소되고, 그러면 또 다른 의심이 일어나고, 그런 식으로 계속됩니다. 따라서 모든 의심을 해소해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의심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의심들의 근원으로 나아가서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의심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심을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 마음을 진아 안에 고정하고,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방문자 : 은총만이 제가 그렇게 하는 것을 도와 줄 수 있습니다.
마하리쉬 : 은총을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사실 은총을 바란다는 그 자체가, 이미 그대의 안에 있는 은총 때문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閑 談]
이번 글에는 자아탐구나 화두를 공부하는 구도자들에게 아주 도움이 되는 핵심적인 가르침들이 간단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맨 첫줄의 방문자가 처음 질문하는 내용을 좀 자세히 살펴 보죠.
방문자는 <저는 저 자신을 계속 분석해 보면 지성을 넘어서는데, 그리고 나서 아무런 행복감이 없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구도자는 아마도 자아탐구를 하면서 어떤 얕은 삼매체험까지 간 모양입니다. 보통 유상삼매나 선불교에서 말하는 "무기(無記)"상태의 체험을 한 모양입니다. 방문자가 지성을 넘어섰다고 말하는데, 방문자가 말하는 지성은 아마도 "앎"의 상태, 즉 "안다, 모른다"의 "안다"상태만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방문자는 이내 그 앎상태를 넘어서도 "어떤 행복감이나 지복감을 느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구도자가 아직 "나라는 느낌" 또는 "내가 있다"는 느낌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나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 어떤 지복감이 오기를 바라는 에고"나"가 남아 있는 것이죠. "내가 있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한에는 "안다"라는 느낌이 없어져도 지성을 넘어가지 못한 상태입니다. "안다, 모른다"라는 느낌에서 "안다"는 느낌뿐만 아니라, "모른다"라는 느낌도 지성(知性)에 포함됩니다. 여기서 지성(知性)이란 이원화 분별지(分別知)의 성품을 말하는데, "내가 있다는 앎의 느낌"자체도 지성(知性)에 속합니다. 이것은 "내가 있다"앎 또는 존재앎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내가 있다"는 느낌이 남아 있는 한 이원적인 지성(知性,분별지)이 그대로 있습니다. 따라서 질문하는 방문자는 아직까지 "내가 있다"는 앎, 즉 이원적인 지성(知性)을 넘어서지 못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두번째 밑줄친 마하리쉬 답변 중에서,
<그대는 앎 그 자체인 진아이기 때문에 이미 알려져 있고, 따라서 앎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지성은 그대에게 바깥의 사물들을 보게 해 주지, 그 자체의 근원인 것을 보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에서,
"나(진아)"는 아는 주체이므로 이원적인 앎의 대상으로 알려질 수가 없지만, 이미 앎의 주체로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반면 에고의 이원적인 분별지성(知性)은 의식의 대상들만 볼 수가 있는 기능만 있지, 보는 자 그 자체를 볼 수는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고의 이원적인 지성을 가지고 진아를 탐구해 보아야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밑에 밑줄 친 마하리쉬의 답변 <지성은 그대가 자신을 분석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데까지는 유용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것이 에고(존재의식) 속으로 합일되어야 하고, 그 에고(존재의식)의 근원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에고(존재)는 사라집니다. 그 근원으로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에고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서,
"지성이 자신을 분석할 수 있게 도와주는 데 까지는 유용하지만,"이라는 말씀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 자기(개아)는 진아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데 까지는 이원적인 분별지성으로 분석할 수 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상 에고를 초월하는데는 이원적 분별지성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죠. 이원적 분별지성을 이용해서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자기가 참나가 아니라는 확신을 굳힌 다음에, 그 지성이 에고의 뿌리인 존재의식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이원적 분별앎이 "내가 있다"는 앎의 뿌리에 합일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망각"과 비슷한 원인체 (대원인체)삼매상태를 체험해야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에고인 "내가 있다는 느낌"을 망각한 원인체(대원인체) 삼매상태 속에 잠겨 있어야 에고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곳은 에고가 일어난 뿌리이지만, 에고의 느낌이 없는 무상삼매상태입니다. 마하리쉬는 이곳(에고의 근원)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
본문의 그 다음 밑줄 친 문장,
<이원성이 바로 에고의 특징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는 이원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에고임을 알고, 그 근원을 찾으십시오. 생각이 없는 정도가 진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 진보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진아 깨달음 자체는 어떤 진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똑같으니까요. 진아는 항상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장애물은 생각들입니다.
진보는 진아가 항상 깨달아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제기된 정도에 의해 가늠합니다.
따라서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찾으면서 그 생각들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그 근원으로 나아가십시오. >에서,
모든 생각이라는 것은 마음에 나타나는 의식의 움직임인데, 마음 속의 생각 뿐만 아니라, 육체의 눈귀코혀몸마음으로 감지되는 모든 세상만사와 마음의 느낌, 대상들이 모두가 에고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원성의 결과물들입니다. 따라서 그것이 나타난 마음을 관찰하고 그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 이 망상은 어디로부터 생겨나왔는가?"를 스스로 내면으로 물으면서 탐구해 들어가야 합니다.
마음은 에고에서 나왔는데, 그 에고라는 것은 "내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이 "내가 있다는 느낌"이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밑바탕에 있는 뿌리 생각입니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느낌의 뿌리"는 우리 마음 밖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음 밖에 나타난 것들은 나무로 비유해 보자면 이파리와 줄기와 밑둥까지는 밖으로 보이는 나무 몸뎅이지만, 나무 뿌리는 땅 속에 파뭍혀서 보이지 않는 것처럼, 몸과 생기작용,마음 움직임,나라는 느낌과 온갖 보이는 세상들은 느껴지는 대상일 뿐, "나라는 느낌의 뿌리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보이고 느껴지는 이원적 대상들을 전부 배제해 가며 내면으로 파고 들면 결국은 "나라는 느낌의 뿌리"에 닿게 됩니다. 마하리쉬는 다른 곳에서 " 이 생각들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가?" 라고 부단히 내면을 향해서 탐구하며 물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내면을 향해서 탐구하다보면 그런 망상들이 점차로 없어지는 고요한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생각의 움직임이 고요한 자리가 나라는 느낌의 뿌리자리입니다. 그 나라는 느낌의 뿌리에서는 "나라는 느낌"이 없는, "나"마저 망각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직 미세한 의식의 작용이 있으며, 마하리쉬는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이곳이 바로 나라는 바탕으로,나라는 생각조차 없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의 마지막 뿌리인 에고의 근원자리입니다.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있다"앎에 머무르라는 말씀이 바로 이곳, 에고의 뿌리에 머무르라는 말씀입니다. 깨달은 스승들이 손가락으로 안내해 주는 곳은 바로 이곳까지 밖에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 안정되게 머무르면서 스스로 절대본체를 깨쳐야 합니다. 이곳이 베단타에서 말하는 뚜리아 체험인데, 다른 말로 대원인체 또는 초원인체라고도 부릅니다. 그 이전의 원인체는 대원인체로 들어가는 초기에 잠깐 동안 체험하는 신발벗는 입구이고, 초원인체는 절대진아의 현관입구의 마루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위에서 마하리쉬가 말씀히시는 에고의 근원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은 바로 이곳, 대원인체 삼매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참고로 마하리쉬는 "내가 있다"존재의식을 에고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참고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있다" 존재의식의 핵점이 우주적 자아의식이긴 하지만, 그 존재의식이 생긴 기본 원인은 육체로 인해서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마하리쉬는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도 우주적 의식이긴 하지만 크게 따져서 에고라고 말씀하기도 하며, 또한 어느 때는 대화 상대방 의식수준이나 분위기에 따라서는 "내가 있다"가 진아나 마찬가지라고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다"가 진아라고 말씀하실 때는 그것은 진아를 가르쳐 주는 손가락 대용으로 표현하시는 것이고, "내가 있다"가 에고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실 때는 '에고의 발생원천', 즉 에고의 뿌리로 표현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있다"존재의식 핵점은 개아와 진아의 중간매듭과 같으므로 구도자에게 그때 그때 구도자수준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하신다는 것을 감안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문의 헤갈림 현상은 아마도 마하리쉬 현존당시 그 말씀을 최초로 받아쓰기로 영문으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직접 들은 것을 자기들이 이해하는 수준에서 번역을 하다가 보니깐 적절한 어휘선택을 하지 못하고 원본 자체가 다소 오역이 되어서, 이러한 후대에 이해하기에 헤갈리는 혼란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개인적인 추측도 잠깐 듭니다.
참고적으로 영문의 <Self>는 <진아>로 번역된 것이고, <self>는 <에고 또는 개아>로 번역이 된 것인데, 간혹 <self>의 맨앞글자인 <s>가 대문자이면 진아이고, 소문자이면 에고인데 불구하고, 영문원본 인쇄과정에서 이것이 소문자, 대문자가 서로 바뀌는 곳이 몇군데 있는 것을 전에 영어원본을 볼 때에 본 것 같은데,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잘못 인쇄된 소문자,대문자를 그대로 번역할 수도 있으므로, 그렇게 되면 전체 뜻이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번역이 바뀔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없지않아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원성이 바로 에고의 특징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는 이원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에고임을 알고, 그 근원을 찾으십시오.생각이 없는 정도가 진아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 진보의 척도입니다. 그러나 진아 깨달음 자체는 어떤 진보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똑같으니까요. 진아는 항상 깨달음 속에 있습니다. 장애물은 생각들입니다.
진보는 진아가 항상 깨달아져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제기된 정도에 의해 가늠합니다.
따라서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찾으면서 그 생각들을 제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그 근원으로 나아가십시오. >에서, 마하리쉬는, 생각이 일어나는 한에는 에고적 이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에고의 특성입니다. 아무리 심오하고 기특한 철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원적인 에고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그 넘어의 일원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망상이 일어나면 내면 속으로 "이 망상이 어디로부터 일어나는가?"라고 탐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없는 무심(無心)경지까지 도달해서 거기에 안주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이원적인 진리의 체험은 오직 생각없음, 즉 무심(無心)의 체험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 없음'이란 단순히 망상이 그친 것이 아니라, "내가 있다는 느낌"조차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나"라는 것이 없어졌으니깐 모든 행위자체가 자연스럽게 무위(無爲)적으로 되는 것이죠.즉 무아(無我), 무심(無心), 무위(無爲) 또는 무작(無作), 말하자면 '나라는 느낌이 없음"과 " "아무 생각도 없음" " 억지로 짓는 행위가 없음"이 함께 어울러진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육조 혜능은 이것에 대해서, 무심(無心)을 무념(無捻)으로, 무아(無我)를 무상(無相)으로, 무위(無爲)를 무주(無住)로, 육조단경의 정혜품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하리쉬는 이 무심(無心), 무아(無我)의 상태가 안정되는 근원까지 나아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무아(無我), 무심(無心) 무위(無爲) 또는 육조혜능식으로 말하자면 무상(無相), 무념(無念), 무주(無住)라고 표현 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하리쉬 말씀은 그것은 우리들에게 항상 변하지 않고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죠. 우리들 내면에 우리가 알던 모르던 그 상태로 변함없이 누구나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상태가 있다는 것을 확신을 얻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정신수행이란 바로 그 확신을 마음 속에서 바로 드러내기 위한 행위라고 볼 수 입니다. 그것을 가려진 것이 바로 망상,나라는 생각,환상을 진실로 여기는 착각 같은 방해물입니다. 그런 방해물만 걷어내면 바로 진리, 참나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 의심들이 누구에게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의심들의 근원으로 나아가서 거기에 머무르십시오. 그러면 의심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의심을 해소하는 방법입니다. " 마음을 진아 안에 고정하고,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에서,
의심들이 일어나면 "이런 생각들이 어디서 일어나는가?"라고 자기 내면을 향해 파고 들어가면 그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 곳을 도달하게 되고, 그 의심이 없는 곳에 안주하고 있으면, 의심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 간화선에서는 "화두의심"에 머물러 있는 수행을 하는 것이죠. 이것도 의심이긴 하지만, 무언가 이원화 앎의 대상으로써의 답을 알려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비이원적인 내면을 향하기 위한 오직 모름상태의 내면 집중을 위한 방편으로써 화두의심을 이용하는 것일 뿐이므로, 위에서 마하리쉬가 말씀하시는 분별앎의 답을 알게 위한 의심과는 그 의미와 목적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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