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성품은 생시와 깊은 잠을 관통하여 지속된다.

2016. 6. 13. 11:12성인들 가르침/라마나 마하리쉬



방문자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왔다.

1. 개인적 영혼들과 브라만은 하나인데, 이 창조계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2. 범지자(梵知者, 覺者,깨달은 사람)는 실제적 고통과 환생을 겪어야 합니까? 그는 자신의 수명을 늘이거나 줄일 수 있습니까?

마하리쉬 : 창조계를 말하는 목적은 그대의 개인성이라는 혼동을 없애기 위한 것입니다. 그 질문은 그대가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고 있고, 그래서 그대 자신과 주위의 세계를 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대는 자신이 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대의 마음과 지성이 그 그릇된 동일성의 요인입니다. 잠이 들었을 때 그대는 존재합니까?​

방문자 : 존재합니다.

마하리쉬 : 같은 존재가 지금 깨어있으면서 그런 질문들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그대가 잠들어 있을 때는 그런 질문들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일어났습니까?

방문자 : 아닙니다.

마하리쉬 : 왜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그대가 자신의 몸을 보지 않았고,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대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런 질문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질문들이 지금 일어나는 것은 그 몸과의 동일성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방문자 : 그렇습니다.

마하리쉬 : 이제 그대의 진정한 성품이 무엇인지를 보십시오. 그것은 생각들에서 벗어난 것입니까, 아니면 생각들로 가득 찬 것입니까?  존재는 지속적입니다. 생각들은 비지속적입니다. 그러니 어느 것이 영구적인 것입니까?

방문자 : 존재입니다.

마하리쉬 : 바로 그거지요. 그것을 깨달으십시오. 그것이 그대의 참된 성품입니다. 그대의 성품은 생각들에서 벗어난 단순한 존재입니다. 그대는 자신을 그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창조계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세계와, 그대의 몸을 포함한 대상들은 생시의 상태에서 나타나지만 잠의 상태에서는 사라집니다. 그대는 이런 상태들 모두에서 존재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상태를 관통하여 지속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알아내십시오. 그것이 그대의 진아입니다.

방문자 : 그것이 발견되었다고 가정하면, 그때는 어떻게 됩니까?

마하리쉬 : 그것을 발견하고 나서 살펴보십시오. 가정적인 질문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

방문자 : 그때는 제가 브라만과 하나입니까?

마하리쉬 : 브라만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누구인지 발견하십시오. 브라만은 스스로를 돌볼 수 있으니까요.

그대 자신을 몸과 동일시하기를 그치면 창조, 탄생, 죽음 등에 관한 어떤 질문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잠 들었을 때는 그런 것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아의 참된 상태 안에서는 그런 질문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즉, 그대는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하여 그대의 참된 존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대가 잠들었을 때는 그 질문을 할 수 없었겠지요. 잠 속에는 창조계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대는 지금 그 질문을 합니다. (지금은) 그대의 생각들이 나타나고 창조계가 있으니까요. 따라서 창조계는 그대의 생각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 자신을 돌보십시오.  그러면 범지자(참나)는 그 자신을 돌보겠지요. 만일 그대의 참된 성품을 알면, 범지(梵知,절대진아))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도  이해할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설명해 봐야 헛일입니다. 그대는 자기 앞에서 한사 람의 범지자를 본다고 생각하고, 마치 그대 자신을 그대의 몸과 동일시했듯이 그를 하나의 몸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도 그대처럼 고통과 쾌락을 느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방문자 : 그러나 저는 그분이 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서 영감을 얻어야 하니까요.

마하리쉬 : 예, 그가 그대에게 말해 줍니다. 영감을 줍니다. 그가 일러주는 대로 하십시오. 그대는 (그에게서) 배우고 싶은 것이지 그를 시험하려는 것은 아니니까요.

진지의 징표(깨달음의 판별기준)들을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구도자로 하여금 불행을 떨치고 행복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들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을 따르게 되면 그 결과는 그런 징표들을 갖는 진지일 것입니다. 그런 징표를 가지고 남을 시험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라마나 마하리쉬 대담록-

[閑 談]

구도자라면 누구나 각성(覺性)의 상태, 즉 위에서 마하리쉬가 설명하는 생시와 깊은 잠의 배면에 있는 비이원적인 절대바탕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어하고, 또 어떤 구도자는 대략적으로 그 각성상태에 대한 이미지나 개념을 나름대로 마음 속에 각인시켜놓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비이원적인 각성상태에 직접 들어가보지 않고 남한테 들은 개념이나 이미지나 생각으로만 그 각성상태가 어떤 것일 것이다 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혀 실제상태와 다릅니다.

그 상태를 말로 표현한다든가 이미지나 어떤 상상적인 느낌으로 생각하는 상태는 다만 이원적인 의식상태이므로 비이원적인 각성상태를 체험적으로 파악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여러 성인들이 간혹 그 상태에 대해서 나름대로 표현하는 말은 들어서 그것이 그런 것이로구나라는 정도는 대략 짐작들은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은 성인들이 표현한 말일지라도 그것은 이원적인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지, 실지로는 그것을 옳바르게 드러내 보이지 못합니다.

정확히 자신이 스스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체험한 사람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그것에 대해서 밖으로 어떤 표현을 한다고 하드라도 이미 그것은 이원적인 개념화(언어화)가 되어 버려서 실제와는 거리가 뚝 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선불교에서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는 선어(禪語)가 있습니다. 적(寂)은 고요함, 침묵상태(定)를 말하고, 성(惺)은 초롱초롱 정신이 깨어서 비추는 것(觀)을 말하며, 전체적으로 고요고요하되 초롱초롱 깨어있는 상태를 표현하는데, 화두수행에서 화두를 들 때에 이렇게 고요고요하되 초롱초롱 깨어있는 상태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자연적인 각성상태에 준하여 인의적인 수행상태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태로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지로 침묵과 깨어있음을 인의적으로 억지로 유지하기는 쉽지않고, 의식의 미세하고 깊은 경지까지 도달하게되면 그런 침묵(定)과 깨어있음(觀)이 저절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침묵과 깨어있음이 이원적인 마음에서 인의(有依)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비이원적인 각성상태가 바로 자연스런 침묵과  깨어있음이 무위적(無爲的)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진아의 각성상태에서 깊은 잠상태가 침묵상태에 대응되는 것이고, 동시에 깨어있음은 생시상태에 대응되어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 두 상태, 즉 침묵과 깨어있음, 깊은 잠과 생시상태에 공통배경이 바로 절대 바탕의 존재상태입니다. 그 절대바탕의 상대성이 없는 비이원적 측면이 깊은 잠과 침묵으로 반영된 성품이며, 동시에 절대바탕의 밝은 비춤은 깨어있음(성성한 주의)과 생시상태에 반영된 성품인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바탕은 깊은 잠과 깨어있음 또는 침묵과 관(觀)이 합성된 성품상태가 아니라, 두 상태를 동시에 포함하는 그 배경의 바탕을 말합니다.

그래서 절대진아, 즉 각성 상태는 침묵과 깨어있음(默照), 또는 정(定)과 혜(慧)라고 양측면으로 동시에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도자가 실지로 수행 중에 삼매에 들어가는 과정은, 물론 수행자에 따라서 다르고, 수행방법에 따라서 가지각색으로 다르겠지만, 대략적으로  삼매 초기에는 자기존재조차 모르는 깊은 잠 같은 완전히 자기망각상태 속에 처음에 접어듭니다. 물론 이 망각상태는 수행 중간에 잠깐 잠기기도 하는 무기(無記)상태와는 전혀 단계가 다릅니다. 무기(無記)상태는 수행 중간에 주의가 산만해진 틈에 일어나는 잠깐 수행의 졸음상태와  비슷하지만, 이 원인체 망각삼매상태는 수행의 정상적인 단계로 들어선 삼매입니다. 이 원인체 삼매상태는 의식의 뿌리로 들어가는 초기삼매상태입니다. 이 망각삼매상태에서 안정되게 깨어서 더 깊이 들어가면, 결국은 그 망각상태를 아는 그 앎자체에 접어들게 됩니다. 망각삼매상태를 원인체라고 하면, 그 다음 단계인 이 망각상태를 아는 그 앎의 상태는 초원인체 또는 대원인체 삼매상태라고 부릅니다. 보통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는 이 상태를 "내가 있다"는 앎이라는 특별한 용어로 부릅니다. 보통 원인체 망각상태에 접어드는 것을 어떤 수행계통에서는 한번 '꼴까닥 죽는다'라고 표현합니다. 실지로 체험상으로 의식이 완전히 망각상태가 되므로 잠깐 죽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그 망각상태에서 다시 앎의 빛(깨어남)이 떠올라오므로 이것을 '다시 되살아난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수행체계에서는 "한번 꼴까닥 죽었다가 살아나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 망각의 원인체 삼매와 망각상태를 지나 그것을 지켜보는 초원인체삼매의 전 과정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수행자가 수행 중에 최종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단계는 이 초원인체 또는 대원인체 삼매가 끝입니다.

이 망각삼매를 또 다른 용어로 "내가 있다"핵점의 입구의 초기상태라고 한다면, 그것을 아는 "내가 있다"앎의 초원인체 삼매상태를 "내가 있다"핵점의 출구, 또는 절대 진아의 입구 바깥쪽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체 망각삼매를 지나서 초원인체 "내가 있다"앎의 삼매를 지나야 비로소 진정한 절대진아를 깨칠 수가 있는 것이죠. 절대진아는 그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그 속에 항상 있음을 깨치는 것입니다. 그 깨칠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초원인체 삼매상태라는 특별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가 절대진아의 현관입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수행자가 체험할 수 있는 단계는 초원인체 또는 대원인체의 "내가 있다"앎의 삼매상태가 최종적인 체험입니다.

절대바탕은 이 초원인체 삼매상태에서 그냥 항상 여기 있다는 것을 깨치는 것입니다. "항상 그 절대바탕에 있다"는 것을 깨치고 스스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저절로 우연스럽게 깨쳐지는 것입니다. 절대바탕이 "어떻다"라고 아무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다만 "내가 있다"앎의 삼매인 초원인체 단계에서 스스로가 절대진아임을 깨칠 뿐이지, 절대바탕이 어떤 것이라고 말할 건더기가 하나도 없습니다.

절대바탕은 어떤 특별한 상태가 아니고 전체입니다. 그냥 그것은 변함없이 항상 있는 모양없는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침묵과 깨어있음, 깊은 잠과 생시의 중간상태라고 말한 것은 절대바탕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다"앎의 초원인체 삼매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초원인체 상태가 바로 절대진아의 간판같은 것입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종종 이 상태를 진아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구도자에게 어떤 구체적 상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초원인체 상태가 최종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절대진아는 그 자체가 실재함을 체험하지만 그 실체는 내보여줄 수가 없으므로, 어떤 상태라고 지적해서 말할 수가 없기 때문에, 대신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내가 있다"앎의 삼매를 최종상태로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일단 그곳에 도달하면 구도자가 절대진아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대진아상태가 마치 깨어있음과 깊은 잠의 중간상태정도로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절대진아는 지금 여기 항상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 누구도 어떤 것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하기 바랍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