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3. 10:21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잉태되기 이전 말입니까?
마하리지 : 잉태되기 이전에 어떤 상태가 존재하든, 그것은 그대의 가장 자연스럽게 완전한 상태이고, 항상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존재성이 사라져도 그 상태는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고, 늘 지배할 것입니다.
그대가 잉태되기 8일 전과 수백만년의 상태가 어떤 것이든, 그 상태가 지배하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존재성이 떠나고 난 뒤에도 여전히 지배할 것입니다 !
현재 저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많은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주제만을 다룰 것인데, 극히 몇사람만 제가 하고자하는 말을 이해하겠지요. 누군가가 거친 질문을 하면, 여러분은 제가 그 수준으로 내려가서 마치 유치원에서 하듯이 낱낱이 설명해 줄 거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몇 가지 이상한 질문들을 가지고 있지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잉태되기 전에, 누가 나를 자궁 속으로 끌어넣었나? 내 아버지? 내 어머니? 그리고 어떤 형상으로? 라는 것입니다. 잉태되기 이전에 내가 어떤 형상, 색갈 혹은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럴 때만 내가 자궁 속으로 끌려 들 수 있습니다. 이 수수께기를 푼 사람은 이 존재성과 이 전체 현상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존재성이 언제 없었느냐를 알 필요는 없습니다. 브라마나 비슈누와 같은 큰 신들도 이 수수께끼, 이 질문에 직면하면 눈을 감고 삼매에 들어 그냥 사라져 버립니다.
질문자 :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말입니까?
마하리지 :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 그대는 생명 기운과의 연관 때문에 '내가 있다'고 느낍니다. 생명기운이 움직이고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대는 '내가 있다"고 압니다. 존재성과의 그 연관이 없으면 그대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질문자 : 지(知)를 얻으려면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대 자신을 착파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그 존재성 안에 있으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그대에게 말해줄 것입니다. 존재성이 어떻게 '비존재성'이 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대에게 단 한 가지를 이야기해 드립니다. 즉, '내가 있음'의 그 감촉, 그 존재성만을 붙들고, 그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만 실참하십시오.
질문자 : '내가 있다'의 상태 안, 거기 있는 것이 최선이라고요? 존재하는 것이 명상입니까?
마하리지 : '거기 존재하라'는 없습니다. 그저 존재하십시오.(Just be)
질문자 : 하루 종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명상을 해야 합니까?
마하리지 : 누가 하루 종일이라고 말합니까? 그 존재성 말고 누가 하루 종일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성찰 속에서 그것은 모든 것을 (명상의 대상으로) 붙들 수 있지만, 그 자신은 붙들지 못합니다.
질문자 : 업(까르마)은 우리가 창조하는 문제입니까?
마하리지 : 그대를 창조한 그것이 이 업과 업을 문제들을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대가 그 안에 말려 들어 있습니다. 그대를 창조한 것은 누구입니까? 그대가 말하는 업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움직임, 활동입니다.
질문자 : 업이 있는 한 우리는 도중에 그것에 직면하는데, 마치 (그것이) 실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사실 환(幻)아닙니까?
마하리지 : 저는 그대가 마치 자궁 안에 있는 양 그대를 함정에 빠뜨려 두려고 합니다. 만일 제 말을 주의 깊게 그리고 말없이 경청하면, 모든 것이 싹터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몸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것은 흔히 범하는 실수, 큰 실수지요.
질문자 : 마지막 실수입니까?
마하리지 :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이지요. 다시금 제가 앞에서 한 말을 기억해 보십시오. 이 육신과 다른 모든 것을 창조한 그 씨앗이 살아 있고 촉촉한, 그대는 이런 말들을 설명하겠지요. 그 씨앗이 일단 사라지고 나면 그대는 오직 영원 속에, 그대의 영원한 상태 안에 있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 하나에서 아주 큰 나무가 하늘 높히 자랍니다. 이 작은 씨앗, 이 존재성, '내가 있음'의 감촉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그 씨앗에서 이 모든 현상계가 창조됩니다. 여기에 이르면 말 안에 어떤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대는 그것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158)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대담록-
[한담(閑談)]
매번 하는 이야기지만, 라마나 마하리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내가 있다"가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위의 질문자도 "내가 있다"에 머물러 있으라니깐, "내가 있다"가 우리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어떤 경지나 느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내가 있다"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이미 그것은 마음 안에 대상화 또는 관념화 되어버린 것으로써,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가 아닙니다. "내가 있다" 존재핵점은 우리 마음으로는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원화)마음 상태에서는
"내가 있다"가 모든 주체가 됩니다. 보는 것이든, 듣는 것이든,느끼는 것이든, 생각하는 것이든, 모든 정신활동과 그 대상들은 "내가 있다"는 한 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것을 보는 눈 자체는 우리가 볼 수 없듯이, 모든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그것 '임을 이해하고, 따라서 그것은 마음으로는 전혀 모르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니사르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 존재핵점입니다.
그래서 수행법 중에서 좀 고급 수행법이라고 자칭하는 방편들, 즉 선불교의 간화선,화두 수행도 그 화두의 의심자체가 전혀 모름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모름"의 상태를 니사르님은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 중에서는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지 않고 간접적으로만 말씀하십니다. 그 "내가 있다"를 어떻게 잡으라고 직접적으로 표현을 못하니깐," 그대가 잉태되기 8일전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탐구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문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내가 있다" 속에 잠기게 되고, 그 속에 안정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내가 있다"도 "내가 있다" 그 자체속으로 가라앉으면, 절대바탕에 닿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바탕에 한두번 닿는다고 해서 절대진아를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명상과 삼매에 안주하는 과정에서 습업들과 욕망들이 서서히 녹아지면서 절대바탕에 안정되게 자리잡는 과정을 향하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내가 있다"는, 현재 마음 내외의 모든 인식대상과 마음과 육체의 인식주체이므로 전혀 알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모름"이라고 딱 잡아 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면, 이것도 인식의 대상이 됩니다. 왜냐하면 "모른다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으니깐, 사실 모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틀립니다. 모른다와 안다를 둘 다 벗어나야 합니다. 그럴려면 이 내가 깨어있는 상태에서 깨어있음조차 넘어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있음을 넘어서 있는다는 것은 단순히 잠과 같은 모름하고는 또 다릅니다.
이 상태를 깨어있음과 중간상태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직접 체험해 보아야 하는 것이지, 말로 표현할 것이 못됩니다. 숭산선사같은 분들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내면 물음에 대하여 "오직 모를 뿐"만을 유지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초기에 망념이 나타나지 않도록 "전혀 모름"을 유지하여 생각의 흐름을 끊기 위한 초기의 방편을 말한 것이지, 그 자체가 전혀 모르는 상태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구도자들은 "오직 모를 뿐"이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모름"에만 의식집중을 하는데, 그렇게 하면 "모름"이라는 한 곳에 집중하는 정(定)수행은 잘 진행되겠지만, 혜(慧)수련인 주시 비춤수련이 부족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선가에서는 보통 귀신굴에서 들어 앉아 있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무엇인가?" 의심에만 관심을 집중적으로 주면 혜(慧)의 비춤으로만 강해지고, 정(定)수련이 부족해서, 망상이 쉽게 움직이게 됩니다. "오직 모를 뿐"으로 정(定)을 유지하면서, 화두의심에 의한 혜(慧)의 내면비춤으로 밝음을 유지하는 것이 선불교의 간화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수행계통의 전통은 초보 구도자에게 먼저 일정한 만트라(따뜨 뜨암 아시-네가 그것이다)를 주고, 그것을 계속 염하여 정(定)수련을 하면서 우선"내가 있다"까지 넘어간 다음에, "내가있다"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데 바로 이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정혜를 조화있게 안정시키는 수련과 같습니다.
즉 선불교에서는 혜능이 정(定)과 혜(慧)는 같다고 했듯이, 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도 이미 스승이 준 만트라로 기초 정수련을 마친 구도자에게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그 동안 닦아 얻은 "내가 있다"에 그냥 머물러 있으라고 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정과 혜가 같다는 것은 이원화 분별심의 중생마음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다" 수준에 올라와야지 정과 혜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구도자는 항상 이원화 중생의 분별마음상태에서 수행을 해야 되기 때문에 먼저 마음을 한곳에 모을 수 있는 정(定)수행이 적절한 것 같습니다.
한편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혜(慧)수련이 주된 것인데, 혜(주시)수련만 가지고도 "내가 있다"에 도달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위빠사나를 수행한 구도자를 관찰해 본 결과, 알아차림으로 넓어진 존재의식에서 더 이상 깊히 들어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내가 있다"는 상태에서 수행을 그만두고 보살행으로 대개가 전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수행단계가 얕은 단계에서 더 숙성되어 완전히 익기도 전에 일반사회에 나와 대중들과 함께 하면서 보살행이나 포교활동을 하다보니, 다시 속세의 물이 들어버려서, 그 환경에 따라서는 다시 속인들과 비슷한 욕망과 습에 또 다시 오염되어, 요즘 승려들 사회에서 해종행위니 은처승이니 뭐니,시끌시끌한 분위기가 다 이런 기본적인 수행의 미숙된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내가 있다"로 들어가는 방법 중에 간화선도 좋고,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도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초보구도자는 우선 간단한 만트라나 염불, 또는 다라니 수행으로 시작해서 정수련으로 마음을 집중수련으로 정화한 다음에, 다시 간화선이나 자아탐구법으로 중간에 바꾸면 좀 더 쉽게 "내가 있다"를 거쳐서 삼매에 도달하는 길도 있다는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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