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7. 09:46ㆍ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진아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 에고를 가지고 있습니까?
마하리지 : 그는 에고와 전혀 관개가 없어. 우리가 (자신을) 육체형상과 동일시하는 한, 에고가 있지만, 진아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몸 형상과의 어떤 동일시도 없기 때문에, 그런 질문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아. 그뿐 아니라, 그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어. 이것은 무엇을 말하냐 하면, '진아를 깨달은 원리'가 '현현되는 원리인 존재성과 함께 있는 생명기운(파동의식)을 주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야.
질문자 : 사람이 형상이 없으면 그에게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습니까?
마하리지 : 몸의 선 하나도 그를 건드리지 못하지. 진아를 깨달은 그 존재는 나타난 모든 것을 세계와 함께, 존재성과 함께 주시하고 있지.
질문자 : 진아를 깨달은 사람의 경우에, 모든 몸의 행위는 자발적으로 일어나는가요?
마하리지 : 모든 행위는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존재성이 잉태될 때 그 주위에서 육체의 형성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야. 누군가가 특별히 육체를 만든다는 그런것은 없어.
질문자 : 절대자에 자리 잡고 있는 진인의 경우에, 어떻게 그의 주위에서 일들이 그를 지탱해 주기 위해 일어납니까? 아이의 경우에는 자연이 부모를 제공해 주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발육하지만, 진인은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갑니까?
마하리지 : 존재성이 자궁 안에 있을 때는 몸 형성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그렇잖아? 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왜냐하면 그는 자연과 하나이고, 그 자신이 자연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를 돌보는 것은 자연이 걱정할 일이기 때문이야. 그는 어떤 인격도 필요하지 않으며, 모든 일은 그의 주위에서 그냥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야.
질문자 : 수천 년씩이나 살려고 노력하는 저 대단한 요기들이 무척 많습니다. 그들은 거꾸로 매달리기도 하고, 공중에서 살거나 그냥 물위에서 살기도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데 관심을 가지며, 그렇게 고생하면서 왜 그렇게 오래 살려고 합니까?
마하리지 :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인가 영적인 수행을 하고 있다고, 고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모종의 쾌감을 얻는 것이지. 그들은 그것을 계속 연장하고 싶어 하고, 수명을 늘임으로써 영적인 분야에서 어떤 임무를 완성해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야. 이 존재성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나? 그대는 무엇때문에 살아가고 있는가? 이 삶은 영원히 지속되지를 않아. 왜인가? 몸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바로 끝장 나는 거야. 자네는 자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지만, 그것은 무엇에 의존하는가? 그리고 , 이 확신, 이 존재성은 무엇때문에 사라지는가? 그 과정에서 존재성은 '비존재성'으로 되는거야. 그리고 '비존재성'은 다시 자발적으로 '존재'가 되지.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우리는 누구에게 물어보아야 하나?
자네 자신을 탐색해 보아야 해. 자네는 "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에 의존하는가?
누구도 이런 식으로 탐색하지 않아. 이 존재성이, 내가, 어떻게 해서 있으며, 내가 왜 있는가,무엇에 의존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이런 문제는 별로 탐구하지 않고 육체-마음과 관련된 상대적인 문제에만 골몰하며, 그것을 넘어서는 영역은 전혀 생각해 볼려고 하지도 않아.
자네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그 말, 그 보통 말은 무슨 뜻인가? "내가 있다"는 이 믿음이 사라지는 것, '내가 있다"는 확신이 없어진 것, -이것이 죽음이라는 것이야.
질문자 : 어떤 사람들은 수명을 늘이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기애(自己愛)를 가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마야의 한계 내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까, 아니면 그것을 초월해 있다는 것을 뜻합니까?
마하리지 : 육체 관념을 초월하고 나면 짧게 살든 오래 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이때는 그대의 존재를 위해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게 되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말고 그대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노력해 봐.
자네는 무엇을 생각하거나 숙고하려고 할 때마다, 자네가 아닌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자네가 아닌 것에 대하여 깊히 숙고 하잖아. 그러나 자네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 수가 있겠냐 말야. 그렇게 하지 못하지. 심지어 이스와라에 대한 생각과 같이 고상한 생각조차도 자네가 아닌 별개의 '말'뿐인데, 자네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싶어하잖아.
자네가 과연 자신의 진아를 생각할 수 있느냐, 그것이 아주 큰 문제란 말이야.
질문자 : 선생님께서는 저희들이 자신의 존재(몸-마음의 존재성)에서 독립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제 건강에서 독립할 수가 없습니다.
마하리지 :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질문을 해야지. 자네는 거친 몸에 대한 질문들만 하고 있어.
나는 지금 자네가 자신에 대해서 숙고해 봐야 하는 어떤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곳은 말이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는 곳이야. 말이 없으면 생각도 없어. 어머니 자궁 속에서 잉태되기 8일 전에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나에게 설명 좀 해 보게나. 그때는 어땠어? 그 상태에 대해서 자네만이 뭔가 말할 수 있어.
질문자 :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존제성이었습니까?
통역자 : 존재성이 자궁 속으로 들어갑니다. 잠재적인 상태의,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존재성이지요.
마하리지 : 잉태되기 이전의 존재성에 대해서 누가 알겠는가? 만일 자네가 잉태하기 전에 존재성을 알고 있었다면, 굳이 자궁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겠지.
질문자 : 저는 기억 못합니다.
마하리지 : 당연히 기억할 수 없지. 왜냐하면 그것은 주의가 없는 상태이니까. 그러니 기억한다고 할게 어디 있겠나? 주의는 존재성과 함께 나중에 시작되는 것이야. 존재성은 잠재적인 상태에서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존재와 비존재의 그 경계선, 바로 그 지점이 근본 마야인데 여기에는 명예로운 이름들이 붙혀져 있어. 처음에는 아무 주의도 없다가, 거기서 주의가 시작되는 것이란 말야.
여기, 한 물건이 있어, [마하리지는 자신의 담배라이터를 보여줌]
이것이 생겨나기 전에는 그이름이 무엇이었나? '비존재'로부터 '존재'상태로 되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관찰했는가? 그냥 그 감촉을 느껴을 뿐이야. 어떤 것을 관찰하기 전에 우리는 '내가 있다" 감촉을 느끼지.
잉태되기 이전의 상태가 무엇이든, 그 영원한 상태를 깨닫는 것, 그 상태 안에 안주하는 것이 위없는 가장 높은 상태에 있는 것이야. 이제 자네를 위해서 그것에 빠라브라만, 즉 절대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겠네.
- THE NECTAR OF IMMORTALITY -
[한담(閑談)]
위의 본문에서 <잉태되기 8일전에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라는 말은, 선불교의 간화선에서 "부모미생전에 너는 무었이었나?>하는 화두와 동일한 화두입니다. 화두라는 것은 사실 그 말 속에 어떤 깊고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못하도록 꽉 틀어 막는 생각의 마개역활만 할 뿐입니다. 애당초 불교에서 화두가 생기는 시초를 보면, 제자가 자기의 의심을 스승에게 말하면, 스승은 그 제자가 어떤 관념에 얽매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 제자가 묶여 있는 개념을 풀어주기 위해서, 또는 제자가 망상과 의심에 매여 있으므로 그 관념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즉각적으로 생각의 꼬리를 자르게 하는 방편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소리지름, 즉 활이라던가, 몸둥이 찜질, 또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마음에 충격을 주어, 생각의 꼬리를 잘라서 무심상태로 유도하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가 무엇입니까?> 묻는 말에 <삼 세근>이라고 동산선사가 대답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삼세근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냥 물어온 제자의 입과 생각의 흐름을 꽉 틀어 막히게 하는 말로 된 도구일 뿐입니다. 거의 모든 화두가 그렇습니다. 뜰앞의 잣나무, 無, 서강의 물을 다 마시면 알려 주겠다. 앞이빨에 털이 났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두가 거의 묻는 제자의 생각을 즉시 멈추게 하고, 입을 틀어막는 목적으로 나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잉태되기 8일 전에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는 물음도 상대방이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생각의 회로를 끊는 화두들과 똑 같은 것입니다. 이때 즉각 생각이 끊어지면, 바로 그것이 절대바탕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생각 넘어에 무엇인가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이 끊어진 것은 아니죠. 여하튼 생각 넘어에는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절대바탕인데,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정체성도 없으며, 바로 무심(無心) 그 자체입니다. 그것이 생각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자기가 잉태되기 8일전에 무엇이었나?>라는 물음에, 그 이전에는 전생에서 어떻게 어떻게 있었을 것이다 등, 여러가지 상상을 하겠지만, 그런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생각의 흐름과 말의 모든 의미가 끊어진 세계에 들어가는 열쇄라고 보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화두에다가 자꾸 어떤 특별한 의미나 가치를 붙혀서 해석하는데, 다 쓸데없는 짓이며, 거기에 어떤 의미를 덧붙히면 오히려 살아있는 화두를 죽은 화두로 만듭니다.
잉태된다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접촉하여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는 순간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엄마가 자기를 임신하기 8일전에는 자기가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인데, 꼭 8일전뿐만 아니라, 1일 전이나 백만년 전이나 1억년 전이나 다 똑 같은 영원의 시간입니다. 그때도 자기가 있었는지 모르고, 아무 기억도 없으므로, 말과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자리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생각을 넘어선 자리죠. 거기에 안정적으로 머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보통사람은 처음에는 누구도 생각없음 속에서 가만히 있지를 못하죠. 왜냐하면 그 동안에 너무나 두껍게 쌓인 생각의 習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두껍게 덮혀 있는 생각의 습을 벗겨내야, 옳바르게 <자기가 잉태되기 전에 무엇이었는지>를 깨치는 것이죠. 간화선의 거의 모든 화두도 동일합니다. 그 화두는 일단 말인데도,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말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말과 생각과 관계없는 그 넘어로 들어가게하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화두나 위에서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같은 말들은 거기에 어떤 의미도 해석하지 말아야 하고,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순히 말길이 끊어지고 생각의 흐름을 끊는 역활만 할 뿐, 다른 의미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주의가 내면을 향하게 하는 목적만 있을 뿐입니다. 만일 그런 화두에 어떤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소위 사구(死句)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죽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잉태되기 이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같은 근본적인 의문에 몰입하다보면 저절로 생각이전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되고, 그 생각이전은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을 말하는데, 이 존재의식이 위의 본문에서 말하는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중간지점, 즉 근본 마야라는 것인데, 그 존재의식에서 삼매 속에 오랫동안 안정되어 있다보면 나중에는 그 존재의식도 지켜보는 대상이라는 것을 깨치게 됩니다. 동시에 존재의식의 주시자 마저 사라지면서, 바로 비존재상태인 최종 무심의 절대진아를 깨치는 것이죠. 비존재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재상태는 알려지는 대상이죠. 따라서 우리는 비존재인 절대상태에 있음을 깨닭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감촉을 느끼는 것은 존재의 감촉인데, 존재의 감촉을 느끼는 자는 절대진아이지만, 존재의 감촉이 그 자체 속으로 합일되어야지 절대진아에 안주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있다"에서 주시작용이 아무 것도 없을 때에 절대진아상태에 도달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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