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 앎의 뿌리에 머물러 있어라.

2015. 10. 18. 19:58성인들 가르침/니사르가다타 마하리지

질문자 : 아리띠 불꽃을 흔드는 것과 같은 숭배의식과 헌가찬송은, 신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살아 있게 하고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하리지 : 자네가 이해하는 '아리띠'의 의미는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자 : 특별한 사랑입니다.


마하리지 : 마라띠어에서 '아라띠'는 '특별한 욕구'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 특별한 욕구는 모든 동물이 그 자신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구. 모든 동물이 각자 이 세상에서 활동을 계속하도록 독려하는 것이 바로 그 '존재애(存在愛)'라는 것이야. 이 '존재애'는 모든 종(種)의 내재해 있는 성품이야. 각 종이 그 자신의 종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러나는데, 이 '자기와 다른것이 있다는 생각'이 바로 쾌락과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된 것이야. '존재애'란 바로 자기사랑이야. 누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겠나? 바로 이 사랑을 자기애라고 하는 것이야.

인간은 자신을 한 개인으로 여기기 때문에 고통과 쾌락을 겪는 것이야. (순수)의식의 상태에서는 행복이나 불행이니 하는 그런 문제가 전혀 없어요, 그런 것들은 육체마음 수준에서만 경험되는 것이야.

나는 말이야, 이 육체-마음의 상태- 즉 개인적 상태-를 벗어나서, 존재 뿌리인 순수의식의 입장에서 자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란 말야.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자체가 나에게는 아예 없어져 버렸어. 또 나에게는 탄생과 죽음에 대한 어떤 생각도 없어.

지금 내 몸상태는 아주 쇠약해져 있어. 아마도 다른 사람이 이런 몸 상태에 있다면 누운 채 아예 거동도 할 수 없을 거야.  개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완전히 없어진 것이 나의 열반, 즉 비동일시의 상태라구.

자네는 어떤 동일성을 가지고 세간의 모든 일이나 활동을 하고 있잖아. 자네의 개체성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에는, 쾌락과 고통, 과거와 미래, 탄생과 고통 등을 겪게 될 수 밖에 없어.

자네가 이와 같은 생각들을 해 보기나 했는가? 누가 자네에게 이런 희유한 것을 묻겠는가?

형상이 없는 자, 전체의 움직임이 나온 뿌리, 드러난 의식의 근원에서 지금 내가 자네에게 묻고 있는 거야.

자네는 왜 고통을 겪어야만 하나? 자네 자신을 하나의 형상과 하나의 동일성 안에 쑤셔 넣었기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야. 바로 그런 제한되고 조건에 얽매인 자세를 가지고 깨달음법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네는 그런 행위에서 어떤 발판도 확보하지 못하고 있어. 어떤 주제에 몰입하든, 자네는 그것을 개인적인 존재의 관점에서 그것을 다루고 있지, 근본 원리적인 존재핵점의 입장에서, 즉 우주적 근본의식의 바탕에서 다루고 있지를 않는단 말야.

'내가 있다'는 앎은 우주 전체에 드러나 있는 것이야. 그것은 빛보다도 더 순수하고 더 미세한 파동성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네가 그 빛을 인식하고 있는거야.

자네는 자네가 개인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知)를 소화하지 못하고, 따라서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 하타요가를 하는 요기들과 성스러운 신의 이름을 염송하는 염송수행자들, 고통을 이겨내는 고행수행자들이 숫하게 많이 있는데, 겉으로 보기엔 그들이 진지하게 영적인 구도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신비한 힘을을 얻기 위한 초능력을 얻는데 만족하고 있다구.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영적인 깨달음을 향해 더 이상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 그들은 자신이 신봉하는 요가수행체계와 자신이 얻은 초능력, 또 자신의 개인성에 대한 자부심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야. 그런 것은 영적인 깨달음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어.

남을 섬기려면 천한 대우을 참고 있든지 아니면 그 자리를 그만두고 뒤쳐 나와야 해. 마찬가지로, 지(知) 수행자는 생시, 깊은 잠, 지각성의 세 가지 상태에 만족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것을 벗어나야 해.

지금 나는 깨달은 자로써 자네에게 이야기를 하는거야.

깊은 잠과 생시상태의 이런 반복되는 일상이 (나에게)무엇인줄 알아? 나는 그런 것은 전혀 원하지 않아. 지각 가능한 이 우주는 한량없이 무한한데, 그것을 보호하고 유지한다고 해서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깨달은 도인은 완전함 속에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한다는 필요성이 전혀 없어.

하지만 구도자들은 깨달은 이의 삶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익을 얻을 수가 있어. 그 숨어 있는 가치는 엄청나게 크지. 보통 범부들은 깨달은 도인의 절대적 상태를 얼핏보거나 짐작할 수조차 없어. 그래서 깨달은 도인의 존재한다는 한 표식으로 드러나는 그의 무위적인 행동과 자연스러운 말의 표현으로만 알아챌수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만 그런 깨달은 도인은 그 신체적 표현이나 말이 아니야. 예를 들면, 군대장교가 자신의 계급을 나타내는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고 있는데, 그 모두가 장교임을 나타내 보여주지만, 그 군복 따위는 그 사람이 아니잖아. 이와 같이 음식의 살 덩어리인 자네의 몸은 자네가 아니고, 그 몸 속에 내재하고 있는 '그대가 있음'의 원리가 본질상 자네란 말야. 그런데 자네는 지금 몸과 자신의 동일시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어. 이것이 바로 큰 환(幻)인 마하마야라는 것이야. 그 동일시에 걸려서 자네는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완전하게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야.  

                                                           -THE NECTAR OF IMMORTALITY- 

[餘談]

마하리지의 모든 가르침의 글들은 그 내용이 방대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만, 그 메세지의 줄거리는 단 한가지의 주제 밖에 없습니다. 즉 "내가 있다"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읽는 사람들은 "내가 있다"가 어떤 것인지 잘 파악을 못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의식상태라고 생각하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인줄 착각하고는, 자꾸 어떤 상태인가를 이해하지 못해서 노심초사해 가며, 반복해서 마하리지 가르침을 읽습니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이것이야 말로 간단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그것"이어서,그래서 가장 단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말없이 아무 것도 모른 채 있는 것입니다.

마하리지가 항상 "내가 있다"속에 머무르라니깐, 대부분의 사람은 "내가 있다"가 어떤 상태인줄 알아야지 그 상태에 머물지,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내가 있다"에 머무는가,하고 자꾸 책을 뒤적거리면,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는 단서나 말꼬리라도 붙잡을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있다"가 어떤 것이다,라고 이해하거나 표현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를 벗어나 있습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나 말이 나오기 이전을 말하는데, 또한 그 말이 나오는 것을 말없이 아는 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말로 표현이 될 수가 없고, 보통 내가 깨어있다는 느낌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즉 전혀 모르는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우리들의 보통 생시상태에도 저변에 변함없이 있는 바탕입니다. 우리는 알든 모르든 항상 그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생시의 무지상태에 가려져 있는 상태이므로, 또한 육체 동일시된 개인의 이원화 관점에 있으므로 마치 모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보통사람들은, 항상 그 상태에 있기는 하지만,그것을 모르므로, 아무 수행없이 바로 "내가 있다"로 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인식의 전환만 되면 노력없이 그대로 "내가 있다"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 모양도 없고 특성도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배면의 주시자"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수행을 해야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면 그 상태로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 상태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이 현상세계전체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우주적 의식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다"라는 것은 그 무한하게 퍼져 있는 전체우주의식이 부피도 없는 단 한 점으로  세계와 내가 함께 섞여 응축되어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호흡수련이나 만트라, 또는 염불수련으로 자신이 전체 우주와 하나인 우주적 의식이라는 믿음으로 자기 마음을 무한하게 확장시킵니다. 그 우주적 마음으로 확장된 상태에서 어떤 한가지 만트라나 염불, 호흡수련에 집중하면 서서히 깊은 내면의 모름 한 점속으로 집중되어 들어 갑니다. 아무 생각없이 모름 속으로 들어가 안정된 것이 바로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에 안주하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서는 어떤 표현도 할 수 없고 나자신이 있다는 느낌도 없습니다. 어떤 생각도 없는 무심상태에 함몰해 있습니다. 깨어 있는 깊은 잠의 상태와 비슷하다고도 표현 합니다. 더 깊히 들어가면 몸 자체와 마음이 사라지는 안정된 삼매경지에 다다릅니다. 그 삼매경지에서 꾸준히 무위수행하다보면 탐진치가 풀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곳을 어떻게 들어가느냐? 그냥 아무 생각없이 가만히 있을 수만 있으면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꾸준히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대상을 하나 붙잡고 거기에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죠. 어떤 염불이나 만트라를 하나 붙잡고 꾸준히 그것에 집중해 보세요. 예를 들면 마하리지는 처음에 스승에게서 "따뜨 뜨왐 아시"(네가 그것이다)라는 만트라를 받아서 그것만을 집중적으로 2년동안 수행해서 "내가 있다"에 도달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소함"(내가 그것이다)라는 만트라를 받아서 죽도록 그것만 외다가 깨쳤습니다. 그가 란짓트 마하리지입니다. 꼭 위의 만트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교 염불도 아주 큰 효과가 있습니다. 아니면 불교호흡수련을 해도 가능합니다. 문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인 "내가 있다"상태를 마음의 대상으로 인식하려는 욕구를 버려야 된다는 것이죠. 마음 편하게 아무 생각없이 깨어있는 상태를 오래 유지하게 되면 저절로 의식이 확장되면서 자기가 사라지면서 깨어있는 "내가 있다" 존재핵점에 안주할 수 있습니다.

무슨 수행을 하던 어떤 일정기간을 잡고 집중수행을 하면 어떤 신비한 체험 뿐 만 아니라, 한 단계 더 상승하는 듯한 수행의 참맛을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일주일간 잠 한 숨 자지 않고 밥먹고 화장실가는 시간만 빼놓고 계속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염불수행을 하던, 호흡수행을 하던 위빠사나를 하던, 간화선을 하던 간에, 마음 크게 먹고 한 일주일 내지 이주일 잠도 무시하며 집중적으로 꼬박 수행에만 열중하면, 무언가 나름대로 큰 효과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집중 수행으로 수행에 대한 의욕을 상승시키고 효율성을 증대하여 그 힘으로 마치 무소의 뿔처럼 앞으로 밀고 나간다면 사실 실패할 확율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별로 열성도 없이 하는 둥 마는 둥, 수행을 하는 것인지 노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게 한다면 사실 어느 세월에, 깨달음의 근처는 고사하고, "내가 있다"에 까지도 맛보지 못하는 것이죠.  


일단 1차적으로 마하리지가 말하는 "내가 있다"에 안정적으로 자리잡는 것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될 일입니다. 아무런 수행없이 바로 "내가 있다"속으로 들어가는 방법, 즉 자기가 관찰자로서의 관점을 바꾸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생각으로만 보는 관점, 또는 자세를 바꾸는 방법입니다.

마하리지가 말씀하시는 "내가 있다"는 한국말로 다시 쉽게 재해석하자면, "나는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을 본다(안다)"라고 일상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보는자를  본다(안다)"라는 말입니다. 본다라는 것 뿐만 아니라, 듣는자도 보고, 느끼는 자도 보고, 생각하는 자도 보고, 행동하는자도 보고, 자는 자도 보고, 깨어있는 자도 보는 것인데, 바로 우리 마음의 이면에서 지켜보는 주시자입장이 되는 방법입니다.

한 생각을 바꾸므로써 바로 쉽게 자기가 주시자입장이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보통 "모니터를 보고 있다"했을 때에 그 모니터를 보는 자는 육체를 가진 개인인 "내"가 본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육체와 동일시된 개인의식입니다. 그러나 그 '모니터를 보는 자를 본다'고 나 자신이 여기면, 지금까지 나라고 여겼던 육체를 가진 개인은 보여지는 대상이 됩니다. 즉 자기가 본다고 여기는 그 나라는 개인성을 보여지는 객관적 대상으로 다시 자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니터를 보는 자인 이 개인은 보는 주체가 이니라, 보여지는 객관대상이 되므로. 보는 자가 따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 넘어에 있는 그 보는 자를 모릅니다. 그 보는 자는 모양도 없고,성질도 없으며, 알 수도 없지만,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어서 보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있다"의 뿌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알려지지 않지만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그 주시자입장이 되어 모든 알려진 것을 객관적 대상으로 주시하는 수련을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모든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배면에 항상 주시자가 말없이 주시하고 있습니다.느끼거나 생각하거나 잠자거나 깨어있거나 내 앞의 모든 인지되는 것은 육체의식이 하는 짓꺼리인데, 이것을 무조건 객관화된 대상으로써 무심으로 주시합니다. 내 육체도,내 마음도,내 감정도, 세상은 물론이고 모든 보이고 느끼고 들리는 것을 모두 대상화시켜서 진짜 나하고는 관계없는 인식의 대상으로 봅니다. 사실은 억지로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취급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저절로 자연스럽게 보아 온 것이므로 그것을 그냥 알아채기만 하면 됩니다.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주시되는 그 상황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는 자, 주시자는 알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알 수 없는 것은 보는 주체인 나이고, 알려져 있는 몸과 마음과 나라는 느낌조차도 모두 보여지는 대상으로 말없이 관찰하면 점차로 이면에 숨겨져 있는 주시자, 즉 "내가 있다"가 자신과 동화가 됩니다.

마치 눈은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지만, 눈이 보는 모든 보여지는 것이 존재함으로써 눈의 존재를 알 수 있듯이, 자기 몸과 마음과 내가 깨어있다는 느낌을 말없이 주시하는 주시자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절대진아상태에서는 이 주시자도 없어지겠지만, 일단은 우리는 1차적으로 "내가 있다"가 되어야 하니깐, 이렇게 보는 관점을 일시에 전환함으로써, 전체 우주가 나 자신일 뿐 아니라, 전체 우주 현상계를 비춰주는 것이 바로 나 자신아라는 것을 깨닫는 문으로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있다"가 된다고 해서 탐진치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습니다. 관점만 바꾸어졌을 뿐 이제부터 진짜 구도자과정에 들어 가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이 "내가 있다"에 처음 들어온 단계를 성인의 입류(入流)에 들어 왔다고 말합니다. 성인의 입류에 들어 왔다는 것은 예류(豫流)라고도 하며, 즉 성문 4과 중에서 제일 첫번째 수다원과에 든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완전히 절대진아까지는 아직 멀고 멀지만, 일단 구도자로써의 자리에 올라온 것이며, 여기서부터는 특별한 유위적(有爲的) 수행을 하지 않고 무위적인 수행으로 잠재해 있는 습(習)을 녹이는 수행아닌 수행을 한다는 것이죠.

라마나 마하리쉬의 <나는 누구인가?> 자아탐구법도 "내가 있다"로 가는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물론  선불교의 <간화선>도 "내가 있다"로 바로 들어가는 수행방법이긴 합니다만, 개념이나 수행체계가 좀 다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크리스나무리티가 항상 말하는 아무 분별적인 판단없이 그냥 무심하게 관찰하라는 수행방법도 바로 "위에서 설명한 "내가 있다"가 되기 위한 수행을 하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겉으로는 쉬운 것 같아도 보통 사람은 그것이 잘 안됩니다. 온갖 망상과 외부 대상에 대한 집착과 조건화된 습때문에 말없이 관찰만 꾸준히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보자는 어느 정도 기본 수행을 해야 된다는 것이죠. 염불,만트라,호흡 위파사나 등 그런 유위적 수행법들이 모두 "내가 있다"까지 도달하려는 수행법들입니다. "내가 있다"에서부터는 유위적인 수행법들이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마조의 스승인 남악선사가 이미 마조가 "내가 있다"는 수준에 까지 도달해 있으면서도 계속 유위적 수행을 하는 것을 보고 답답해서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겠다고 제자 앞에서 쑈를  부려서 마조가 그만 유위적 수행을 하지 않도록 가르쳤던 것이죠.

여하튼 마하리지가 "내가 있다"에 안주해 있으라는 말씀에서, 그 "내가 있다"라는 존재의식에 즉각 도달하는 방법으로서 지금 자기의 보는 자세 또는 관점, 태도를 즉시 바꾸어서 "모양없고 알 수 없는 배면의 주시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비롯해서 모든 느껴지고 알려지는 것들을 대상화해서 바라본다면 점차로 모든 것이 이전에서 말없이 바라보는 "내가 있다"로 서서히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있다"가 어떤 인식할 수 있고 지각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아 이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비이원적인 모양없는 상태입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려는 그 사람자체가 없기 때문에 표현도 안되며,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비추며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태라고 말할 수 없고, 만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여기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꾸준하게 탐구하다보면 어느새 주시자와 주시대상이 모두 사라지는 때를 몰록 맞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삼매 상태에서 오랫동안 파묻혀서 완전히 푹 숙성시켜야 탐진치가 서서히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 마하리지가 말하는 "내가 있다"는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무(無) 또는 인공(人空)상태를 말하는데, 그렇다고 절대상태는 아닙니다.행여나 그것이 마음으로 알거나 느끼는 것이라고 여기거나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냥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의 뿌리이기는한데, 자기자신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전체성의 상태입니다. 그냥 그 모르는 것에 아무 생각없이 편안하게 안주하고만 있으면 됩니다.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인들이 "내가 있다"를 말하는 것은 절대 진아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이원적인 사고방삭에 찌들어 있는 구도자들에게 중간 기착지 또는 중간 다리로써의 가상 목표를 설정하고 일단 그곳까지 오게 유도한 다음, 그것을 자기도 모르게 지나치면서 절대진아를 향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사막의 신기루 오아시스같은 가상 목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상태(이원화 무지한 마음상태)에서는 그것이 바로 내가 목표로 갈 수 있는 실질적인 "나의 뿌리"입니다.

물론 앞으로 더 멀리 그것마저 벗어나서 나가야 되겠지만서도요. 이 "내가 있다"까지는 노력만 하면 누구나 도달 될 수 있습니다.

마하라지의 가르침은 바로 "내가 있다"부터 시작하는 수준높은 가르침입니다. "내가 있다"가 되기 이전의 기초적인 수행 이야기는 마하리지는 툭하고 무뚝뚝하게 한마디만 던지거나, 유치원 수준에 대해서는 자기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쌀쌀맞게 무시합니다. 그것은 수행자의 기초수행으로서 자신이 노력해서 "내가 있다"까지 올라 오라고 유도하는 말씀입니다. 자기는 그런 유치원 수준의 수행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하리지가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는 "내가 있다"까지 도달하기 이전의 그 기초 수행부분에 대한 요령을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몇가지 간단한 예를 들어 가며 대략적으로 소개해 본 것입니다. 

                                                                                                                  -무한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