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7. 19:33ㆍ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26]
5-1-2.동분망견(同分妄見)
[본문]
[云何名爲同分妄見고 阿難此閻浮提에 除大海水하고 中間平陸有三千洲하
니 正中大洲를 東西括量하면 大國凡有二千三百하고 其餘小洲는 在諸海
中호대 其間或有三兩百國하며 或一或二로 至于三十四十五十하니라 ]
어떤 것을 동분망견(同分妄見)이라고 하느냐?
아난아! 염부제(閻浮提) 가운데 큰 바다의 물을 제하고 그 사이에 육지가 삼천 개가 있다. 그리고 한 복판에 있는 가장 큰 대륙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헤아려 보면 그 안에 큰 나라가 이천 삼백 개가 있고, 그 밖에도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는 하나의 섬에 혹 삼백 개의 나라가 있기도 하고, 혹은 한 두개의 나라가 있기도 하며, 더 나아가 삼십 ․ 사십 ․ 오십 개의 나라가 있기도 한다.
[해설]
여러사람이 같이 가지고 있고, 같이 당하고, 같이 보고 듣고 하는 것, 즉 같은 집단에서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지닌 망견(妄見)을 동분망견(同分妄見)이라고 합니다.
염부제는 큰 소금물 바다 한가운데 있으므로, 소금바다물을 제하면 거기에 사람이 살수 있는 육지가 3000개가 있고, 그 중에서도 한복판에 있는 가장 큰 대륙에는 대략 이천삼백개의 나라가 있고, 그 큰 대륙 밖의 바다에도 수없이 많은 작은 섬들이 떠 있는데, 그중 작은 섬에도 큰섬은 삼백개의 나라가 있고, 작은 섬에는 한두나라가 있는 곳도 있고, 또한 삼십개, 사십개, 오십개,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우주 은하계에 수 없이 많은 나라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묘사한 것 같습니다.
[본문]
[阿難若復此中에 有一小洲호대 祗有兩國이어든 唯一國人同感惡緣할새 則
彼小洲의 當土衆生은 覩諸一切不詳境界호대 或見二日하고 或見兩月하며
其中乃至暈適珮玦와 彗孛飛流와 負耳虹蜺히 種種惡相을 但此國見하고
彼國衆生은 本所不見亦復不聞하니라 ]
아난아! 그 가운데 하나의 작은 섬에 두 개의 나라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나라 사람만이 좋지 못한 인연을 함께 만나게 되어 거기에 사는 모든 중생들이 일체의 상서롭지 못한 경계를 보게 되었으니 말하자면 두 개의 해를 보기도 하고, 혹은 두 개의 달을 보기도 하며, 그 가운데에 더 나아가 달무리 ․ 햇무리 ․ 해의 귀걸이 ․ 혜성 ․ 유성 해무지개에 이르기까지 가지가지 좋지 못한 모습을 오직 업(業)이 같은 그 나라 사람들만 볼 뿐, 같은 섬인데도 저쪽 나라 중생들은 업이 다르고 복이 달라서 보지도 듣지도 못 하는 것이다.
[해설]
조그만 섬 가운데 두 나라가 있는데,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도 한 나라에서만 이상한 천문현상을 보고, 그 옆의 다른 나라사람들은 전혀 그런 이상한 현상을 못 본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두 나라 중에서 오직 한나라 사람들만 이상한 하늘의 현상을 보고, 그 옆의 다른 나라 사람은 못 보니, 이것은 실제로 있지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등불의 둥군 빛그림자가 눈병이 난 사람에게만 보여서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금 하늘에 생기는 이런 재앙도 악연을 만나 나에서만 보이지 다른 나라에서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죠. 여기 동분망견에서는 하늘에서 생기는 재앙을 이야기하고, 앞서 별업망견에서는 생병난 사람들이 등불의 둥근 빛그림자를 본다는 예를 들어서, 우리 우주,산하대지전체가 실재(實在)가 아닌 허망한 그림자라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죠.
5-1-3. 두 망견을 앞뒤로 부합시켜 밝힌다.
[본문]
[阿難吾今爲汝하야 以此二事進退合明호리라 ]
아난아! 내가 지금 너를 위하여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 앞뒤로 비유를 들어가면서 결론지어 밝혀 주리라.
[해설]
<두 가지 일>이란 별업망견에서는 눈병난 사람 이야기고, 동분망견에서는 재앙 당한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현상, 두 가지 일이라고 말합니다.
<앞뒤를 비유를 들어가면서 결론지어 밝혀 주리라(以此進退合明)>에서,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앞의 알기 쉬운 것을 가지고 뒤의 어려운 것을 실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앞의것과 합쳐서 밝힌다는 것(進合明)이고, 알기 어려운 것을 가져다 알기 쉬운 것에 실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을 뒤의 것과 합쳐서 밝힌다는 것(退合明)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눈병난 사람의 비유를 가지고 남섬부주에 있는 산하대지 같은 것들을 예를 드는 것은 뒤의 것을 앞의 것과 합쳐서 밝히는 것이고, 또 한나라의 악연 받는 것을 가져다 별업망견에 갖다 대는 것은 앞의 것을 뒤의 것과 합쳐서 밝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읍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알기 어려운 것에다 알기쉬운 비슷한 예를 들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阿難如彼衆生別業妄見으로 矚燈光中所現圓影이 雖現以境하나 終彼見
者目眚所成이니 眚卽見勞非色所造어니와 然見眚者終無見咎하니라 ]
아난아! 저 중생들이 별업망견으로 등불 주위에 나타난 둥근 그림자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비록 흡사 있는 것[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보이는 둥근 그림자는 눈이 병듦[赤眚]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이러한 적생은 눈이 피로함으로 생긴 허상이지 색(色)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적생임을 보면 마침내 보는 성품[見]에 허물이 없는 것이다.
[해설]
등불 주위에 둥군 빛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은 마치 뭔가가 나타난 것 같지만, 눈병이 난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이므로, 이 눈병은 눈이 피로해서 생긴 허상이지, 물건의 모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둥근빛그림자가 눈병으로 인해서 헛것이 보인다는 것을 알면 견(見)자체에는 아무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눈의 생병을 가지고는 생병을 못보지만, 눈의 생병 때문에 둥근 그림자가 생겼으므로, 둥근 그림자가 생긴 것을 보는 것은 그 사람의 보는 눈 자체의 (순수)작용으로 보는 것이므로, 눈의 원래 보는 작용은 병이 없다는 것, 즉 잘못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눈의 원래 보는 작용까지 병이 났다면 생병인줄 조차도 전혀 모르겠죠.
생병임을 본다는 것은 능히 생병임을 보는 그 자체가 있으니깐, 생병으로는 생병을 못보는 것이고, 생병을 보는 것은 見의 眞體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별업망견의 자체가 이렇다는 것을 애기하고 , 생병난 사람이 둥근 빛그림자 보는 것을 알기쉬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보는 산하대지도 눈병난 사람이 보는 둥근 빛그림자와 같다는 것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이것을 앞의 것에 합쳐서 밝힌다는 진합명(進合明)입니다.
[본문]
[例汝今日에 以目觀見山河國土及諸衆生인댄 皆是無始見病所成이라 見與見緣이
似現前境이나 元我覺明으로 見所緣眚이니 覺見卽眚어니와 本覺明心覺緣非眚이
니라 ]
예를 들어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 그리고 국토와 여러 중생들을 보는데 다 이것이 시작이 없는 과거부터 보는 성품[見]이 병듦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견(見)과 견연(見緣)이 흡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원래 나의 깨어 있는 밝은 성품[覺明]이 소연(所緣)의 경계를 보아 눈에 적생이 낀 것이다.
그러므로 분별심[覺]으로 보면 눈에 적생이 끼지만 본래 깨어 있는 밝은 마음[本覺明心]으로 대상에 반연(攀緣)하는 마음을 돌이켜 깨닫는 것은 적생이 아니다.
[해설]
<네가 지금 눈으로 산과 강 그리고 국토와 여러 중생들을 보는데 다 이것이 시작이 없는 과거부터 보는 성품이 병듦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다>에서, 앞서 별업망견으로 눈병으로 인해 등불의 둥군빛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우리들이 산하대지를 보는 것도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見의 병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지, 참말로 산하대지가 실재(實在)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견의 병이란 바로 근본 무명을 말합니다. 근본 무명이란, 무지, 즉 존재의식의 파동성 작용을 말하는 것이죠. "내가 있다"는 존재의식이 바로 근본 무명이고, 이것으로 인해서 主,客 이원화가 나누어지므로,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나눠지는 것이 바로 見의 병(病)이라는 것입니다.
<見과 見緣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에서, 見은 能見, 즉 보는 것(주체)를 말하고, 見緣은 所見,보이는 대상, 즉 산,나무, 물 등을 말합니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대상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과 산하대지가 앞에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눈병 난 사람의 등불에 보이는 둥군 빛그림자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이 앞에 나타난 것 같지만,실지는 진심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마치 등불의 둥군 빛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원래 나의 깨어있는 밝은 성품이 소연의 경계를 보아 눈에 적생이 낀 것이다>에서, 소연(所緣)은 앞에 대상으로 나타나 있는 산하대지를 말합니다. 원래 나의 깨어있는 밝은 성품(覺明)으로 대상을 보는 것은 잘못된 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어있는 밝은 성품은 전체가 하나로써 주,객 이원성으로 나눠지지 않는 것인데, 대상경계를 본다는 것은 이미 주,객 이원화로 나누어진 것이니깐, 이것이 바로 눈의 생병과 같다는 것입니다.원래의 진견(眞見)은 非二元的이며, 전체가 一切인데, 見이 대상이 보인다면 이것은 진견이 아니고, 能見이며, 能見(보는자)와 보이는 대상(所見)으로 이미 나눠져 있는 상태가 된 것이죠.
<그러므로 분별심(覺明)으로 보면 눈이 적생이 끼지만, 본래 깨어있는 본각명심(本覺明心)에 의해 대상에 반연하는 마음으로 돌이켜 깨닫는 것은 적생이 아니다>에서, 분별심,즉 覺明으로 보면 눈이 적생이 낀다는 것은, 육체의식, 즉 主,客 이원적인 見의 입장에서 보면 눈병이 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第二月과 같이 主,客 二元的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見의 생병입니다.
본래 있는 절대본체의 바탕인 本覺明心으로 보면 전체가 하나이므로,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없는 본각명심으로 회광반조, 즉 바탕으로 되돌려 반조하면 올바른 진견이 되어, 적생(눈병)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覺所覺眚어니와 覺見眚中이라 此實見見이니 云何復名覺聞知見이리요 ]
말하자면 경계[所覺]를 분별[覺]하는 것은 적생이지만 각을 돌이키는 것은 적생이 아니다. 이는 정말 보는 것을 돌이켜 보는 것[見見]인데, 어찌하여 이를 ‘경계에 집착하여 견문각지(見聞覺知)하는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해설]
<경계를 분별하는 것은 적생이지만>에서, 육체의식으로,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으로, 즉 주객 이원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이 분별심인데,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병든 눈으로 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覺을 돌이키는 것은 적생이 아니다>에서, 여기서의 覺은 本覺明心, 진심을 말하는 것으로서, 소위 "보는 자를 본다"는 것입니다. 즉 '보는 자를 주시한다'라는 그 최종"주시자"를 말합니다.
<어찌하여 이를 '경계에 집착하여 見聞覺知하는 것이다'고 말할 수 있느냐?>에서, 경계에 집착하는 見聞覺知라는 것은 눈,귀,등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보고 알고 느끼는 주,객 이원적인 육근 작용이며, 본각명심의 見은 이 허망한 육근 작용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입니다.
[본문]
[是故汝今에見我及汝와 幷諸世間十類衆生한대 皆卽見眚이요 非見眚者니 彼見
精眞性非眚者일새 故不名見이니라 ]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 나와 그리고 모든 세간과 열 가지 중생을 보는데 이는 모두 보는 성품[見]에 적생이 낀 것이지, 보는 성품[見] 그 자체에 적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이와 같이 보는 성품의 정묘하고 진실함[見精眞性] 속에는 본래 적생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보는 성품[見]이라고도 부르지 않는다.
[해설]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 나와 그리고 모든 세간과 열가지 중생을 보는데 이는 모두 보는 성품이 적생이 낀 것이지, 보는 성품 자체에 적생이 낀 것이 아니다>에서, 아란과 부처님, 모든 세간이라는 것은 온갖 무정(無情)을 말하고, 열가지 중생은 온갖 유정(有情)을 말합니다.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온갖 경계를 분별하여 보는 것은 보는 병, 즉 주,객 이원적인 관점으로 보기 때문이지, 眞見 그 자체가 비추는 비이원적 순수 작용에는 병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와같이 보는 성품의 정묘하고 진실함 속에는 본래 적생이 없기 때문에 이를 보는 성품(見)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에서, 본각 자리 자체는 병이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는 것(見)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보통 견문각지(見聞覺知)란 六根의 작용을 말하며, 주체와 대상이 별도 나누어져 있어서 病이 들어 있는 상태이지만, 우리의 본성인 진심자리에서 나오는 진견(眞見) 또는 眞覺은 주체와 대상이 일체인 비이원적인 순수한 각성이므로 보는 것(見)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별업망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부터는 동분망견입니다.
[본문]
[阿難如彼衆生의 同分妄見으로 例彼妄見의 別業一人컨대 一病目人은 同
彼一國하고 彼見圓影인 眚妄所生은 此衆同分으로 所見不祥인 同見業中
에 瘴惡所起하나니 俱是無始見妄所生이니라 ]
아난아! 저 중생의 동분망견(同分妄見)을 다시 저 별업망견(別業妄見)의 한 사람에게 비교할 때에 한 사람의 눈에 병이 난 것은 작은 섬의 한 나라에서 보는 장악(瘴惡)과 같고, 그가 보는 둥근 그림자[圓影]인 적생의 허망은 이 곳 중동분(衆同分)으로 보는 바 상서롭지 못한 경계인 동업(同業) 가운데 장악(瘴惡)으로 생긴 것과 같다. 모두가 시작이 없는 과거로부터 보는 성품이 잘못되어 생긴 것이다.
[해설]
앞의 동분망견으로서 예를 들어 별업망견과 비슷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뒤로 물러서 합하여 밝히는 것(退合明)입니다.
또 한 사람의 눈에 생병이 난 것은, 동분망견에서 얘기했던 섬 가운데 두 나라 중에서 일식,월식을 보는 한 나라와 같다는 것이죠. 또 장악(瘴惡)이라는 것은 특수한 토질의 지역에서만 생기는 나쁜 기운을 말합니다.
별업망견의 둥군 그림자를 보는 허망한 병은 동분망견에서 한 나라 사람들이 다 같은 업중에서 생긴 장악으로 생긴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분망견과 별업망견 모두 다 無明 때문에 생긴 第二月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妙明見精이지만 손가락으로 누르는 그것이 妄이므로 그것이 없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본문]
[例閻浮提三千洲中과 兼四大海와 娑婆世界와 幷洎十方諸有漏t國과 及諸衆生
하건대 同是覺明의 無漏妙心의 見聞覺知하야 虛妄病緣으로 和合妄生하고 和合
妄死니라 ]
염부제의 삼천 주와 네 가지 큰 바다와 사바세계와 그리고 시방의 여러 번뇌가 많은 나라[有漏國]와 모든 중생들을 예로 든다면, 이 모두가 본래부터 깨어 있어 번뇌가 없는 묘한 마음[覺明無漏妙心]이 견문각지의 허망한 인연[病緣]과 화합하여 부질없이 생기고 없어지는 것이다.
[해설]
단순히 지구촌 하나만을 예를 든 것이 아니라, 전 은하계, 전 우주의 모든 중생들을 통틀어서 예를 든다면, 중생마다 본래부터 번뇌없는 깨끗한 묘심, 비이원적인 순수한 본심(本心)이, 六識의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주,객 이원적인 허망한 의식파동작용으로 상호간에 인연과 화합작용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없어졌다 하며 변화하면서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ㅇ. 동분망견 총정리
별업망견이 중생의 업보의 개별성에 촛점을 맞춰 설명된 妄見이라면 , 동분망견은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성에 촛점을 맞춰서 설명되는 妄見입니다.
한 나라에서는 온갖 상서롭지 못한 현상을 봄이 전혀 없는데, 다른 한 나라에서는 온갖 상서롭지 못한 현상들을 목격합니다. 그 나라의 중생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지 그 나라에서 사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현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개개인의 業果에 상관없는 필연성을 내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나라 중 온갖 상서롭지 못한 현상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청정한 불국토이며, 온갖 상서롭지 못한 현상을 보게되는 나라는 중생계를 비유한 것입니다.
惑의 개념을 빌려 별업망견과 동분망견을 비교하지면, 별업망견은 分別惑에 해당하고 동분망견은 俱生惑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분별혹은 태생에 관계없이 경험적으로 잘못된 分別識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별업망견을 한 사람의 망견이 비대했으니 이를 分別惑(후천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구생혹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惑(미혹)입니다. 배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남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등의 본능적인 상념들이 모두 구생혹에 해당하는데 이는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業緣에 따라 인간은 인간끼리 동물은 동물끼리 衆同分으로 感得하는 것을 동분망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變感성을 가져서 생겼다가 시시각각 변화하여 결국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것들이 생기고 사라지고 합니다. 중생들이 망견으로 진실하게 보지 못하고 생주이멸하고 성주괴공하는 현상을 허망하게 있다고 보므로 생멸심의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합니다. 이러한 생멸심이 동분망견의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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