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28. 13:44ㆍ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14 ]
4-2. 견성(見性)은 움직이지 않는다.(見性不動)
ㅇ. 견성은 객(客)과 진(塵)이 아니다.
[본문]
아난이 비록 이러한 말씀을 듣고 대중과 함께 입으로는 말이 없었으나 마음속으로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래께서 자비한 음성으로 다시 설명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맑은 마음으로 합장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阿難雖復得聞是言하고 與諸大衆으로 口已黙然이나 心未開悟하야 猶冀如來慈音宣示하며 合掌淸心佇佛悲誨하니라 >
[해설]
견(見)이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본다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그럴 것 같긴 하지만 마음으로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연하게 알지 못해서 부처님께서 더 설명해 주기를 맑은 마음으로 합장하며 기다리고 있읍니다.
[본문]
그 때 세존께서 도라면(兜羅綿) 같이 빛나고 그물 모양인 손을 들어 다섯손가락[五輪指]을 펴 보이시고, 아난과 여러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처음 성도한 후 녹야원(鹿野園)에서 아야다(阿若多憍陳那) 등 다섯 비구와 너희들 사부대중에게 ‘일체의 중생들이 깨달음과 아라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다 객진(客塵)의 번뇌 때문이다.’고 말했으니 너희들은 그 당시 무엇으로 인하여 깨닫고, 이제 성과(聖果)를 이루었느냐
<爾時世尊 舒兜羅綿相光手하야 開五輪指하고 誨勅阿難及諸大衆하사대 我初成道하야 於毘園中에 爲阿若多五比丘等及汝四衆言호대 一切衆生이 不成菩提及阿羅漢은 皆由客塵煩惱所誤라호니 汝等當時因何開悟하야 今成聖果오 >
[해설]
<도라면(兜羅綿)>은, 인도의 깨끗하고 보드라운 솜을 말하며, 부처님의 손이 맑고 깨끗하며 부드럽기가 도라면 같다해서 부처님의 손을 묘사하는 표현어입니다.
<그물모양의 빛나는 손(網相光手)>는, 부처님의 삼십이상 중 특이하게 생긴 손바닥을 말하는데,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가 오리발처럼 물갈퀴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손에는 여유있는 막이 있는데 그믈모양으로 여러 무늬가 있다고 해서 망상(網相,그물모양)이라고 부릅니다.
<녹야원> 부처님이 깨달으신 후 처음으로 가르침을 펼치신 곳입니다.
<阿若多>는 교진여의 이름이며, 번역하면 '알았다' '알아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아라한>은, 소승에서 열반에 도달한 것을 말합니다.
<객진번뇌(客塵煩惱)>는, 손님같은 번뇌와, 티끌같은 번뇌입니다. 여기서 객(客)은 번뇌장이고, 진(塵)은 소지장이라 할 수 있으며, 객번뇌는 거친 것이라 알기 쉬운 것이지만, 진번뇌(塵煩惱)는 미세하여 알기 어려운 번뇌입니다. 그 객진번뇌 때문에 소승으로는 아라한을 이루지 못하고, 대승으로는 보리를 이루지 못한다는 얘기를 부처님이 처음 녹야원에서 초전법륜할 적에 했으니, 너희들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깨달아서 오늘의 성과를 얻었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본문]
그때에 교진여(憍陳那)가 일어나서 부처님께 사뢰어었다. “저는 지금 나이가 많지만 그래도 이 대중 가운데에서 유독 ‘알았다(解,阿若多)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손님[客]과 티끌[塵], 이 두 글자의 의미를 깨닫고 성과(聖果)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어! 마치 객지에 떠도는 방랑자가 여관[旅亭]에 의탁하여 숙식(宿食)하고 숙식이 끝나면 바로 행장을 정돈하여 여행길을 떠나기에 편안히 머물 겨를이 없지만 주인(主人)은 정말 나갈 필요가 없는 것처럼,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머물지 않은 것은 손님이요, 항상 머무는 것은 주인이니 머물지 않는 것으로 손님[客]의 뜻을 삼았습니다. 또 비가 개이고 하늘이 맑아져서 햇빛이 틈으로 들어오면 허공에 많은 티끌[塵]이 보이며, 이 때 티끌은 요동하고 허공은 고요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맑고 고요한 것은 허공(虛空)이요, 요동하는 것은 티끌이니 요동하는 것으로 티끌[塵]의 뜻을 삼았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와 같다.”
<時憍陳那起立白佛호대 我今長老於大衆에 獨得解名은 因悟客塵二字成果니다 世尊譬如行客이 投寄旅亭하야 或宿或食하며 食宿事畢하고 俶裝前途하야 不遑安住커든 若實主人인댄 自無攸往하니 如是思惟컨대 不住名客이요 住名主人이니 以不住者名爲客義이니다 又如新霽에 淸陽昇天하야 光入隙中하면 發明空中에 諸有塵相이니 塵質搖動하고 虛空寂然이라 如是思惟컨대 澄寂名空이요 搖動名塵이니 以搖動者名爲塵義하노이다 佛言如是니라 >
[해설]
<阿若多>를 번역하면 ,'解' '알았다' 인데, 다섯비구 가운데 혼자서 알았다 하여 부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무엇으로 인하여 그런 이름을 얻었냐 하면, 客,塵의 두 글자 깨달음으로 인하여 그랬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客塵煩惱의 내용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客>은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이고,<塵>은 미세한 움직임이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관에 들락날락하는 손님을 객번뇌(客煩惱), 여관 주인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으니깐 주인(見)을 상징하고, 또한 문틈으로 들어온 빛줄기에 드러나는 작은 먼지알갱이의 움직임이 진번뇌(塵煩惱)로, 맑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허공이 참마음(見)을 상징하는 것이죠.
ㅇ. 견성은 주인이며 허공과 같다.
[본문]
그 때 바로 여래께서는 여러 대중들 앞에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구부렸다가는 다시 펴시고, 폈다가는 다시 구부리시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을 보았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가지가지 보배로운 법륜(法輪)의 무늬가 새겨진 손바닥을 대중 앞에서 ‘폈다, 쥐었다’하심을 보았습니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나의 손이 대중 앞에서 폈다 쥐었다함을 보았다’하니 그때 나의 손이 ‘펴졌다 쥐어졌다’하였느냐, 아니면 너의 보는 성품[見]이 ‘펴졌다 쥐어졌다’하였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세존께서 보배로운 손을 대중 앞에서 ‘폈다 쥐었다’하시니 저희들이 여래의 손이 ‘펴졌다 쥐어졌다’함을 보았을지언정 저희들의 보는 성품에는 ‘펴졌다 쥐어졌다’함이 없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무엇이 움직이고 무엇이 고요했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손은 머무르지 않을 지언정,저희들의 보는 성품이야 오히려 ‘고요해졌다’할 것도 없는데 무슨 ‘머물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와 같다.”
<卽時如來於大衆中에 屈五輪指하사 屈已復開하고 開已又屈하시어 謂阿難言하사대 汝今何見고 阿難言 我見如來百寶輪掌을 衆中開合이니다 佛告阿難汝見我手를 衆中開合인댄 爲是我手에 有開有合가 爲復汝見有開有合가 阿難言世尊寶手를 衆中開合하시니 我見如來의 手自開合이언정 非我見性에는 有開有合이니다 佛言誰動誰靜고 阿難言佛手不住요 而我見性은 尙無有靜커니 誰爲無住잇고 佛言如是니라 >
[해설]
부처님 손바닥이 펴졌다 쥐었다하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인데, 아란의 말은, 흔들리는 것은 부처님의 손이요, 아란의 見은 펴락쥐락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부처님의 손이 폈다 쥐었다하는 것을 볼 때에 보는 성품(見)도 함께 폈다 쥐었다 한다고 볼 수도 있을 수가 있는데, 見이라는 것은 이미 전체에 가득 차 있는 것이고, 가득 차 있는 속에서 부처님 손이 쥐었다,폈다 한다고 보아야 지요.
여기서 우리의 보는 성품, 즉 見은 동요하지도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부처님의 손은 머무르지 않을 지언정,저희들의 보는 성품이야 오히려 ‘고요해졌다’할 것도 없는데 무슨 ‘머물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에서, 흔들리다가 가만히 있는 것을 고요하다고 그러는데, 아란의 보는 성품은 본래부터 고요하지, 어떤 때는 고요하지 않다가 지금에 와서 고요한 것이 있는 게 아니죠. 見, 보는 성품은 본래부터 흔들리지 않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고요하지 않다고 할 게 뭐 있습니까, 이런 말이죠. 다시 말하면 靜(고요)하다고 할 것이 없는데, 머물지 않는다(無住)라고 말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본문]
여래께서 법륜(法輪)의 무늬가 새겨진 손바닥으로부터 하나의 보배광명을 날려 아난의 오른 쪽에 비추시니 즉시 아난이 머리를 돌려 오른쪽으로 돌아보고, 다시 하나의 광명을 놓아 아난의 왼쪽에 비추시니 아난이 다시 머리를 돌려 왼쪽으로 돌아보았다.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의 머리가 지금 무엇 때문에 요동하였느냐?” 아난이 대답하였다. “저는 여래께서 묘하고 보배로운 광명을 놓아 저의 좌우에 보내셨기에 좌우로 이를 보느라 저의 머리가 요동했습니다.” “아난아! 네가 ‘여래의 광명을 보려고 좌우로 머리를 움직였다’하니 너의 머리가 움직였느냐, 너의 견(見)이 움직였느냐?”
“세존이시어! 저의 머리가 스스로 움직였을지언정 저의 보는 성품이야 ‘움직였다 그쳤다’할 것이 없는데 무슨 ‘요동하였느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건 그렇다.”
<如來於是從輪掌中飛一寶光在阿難右하니 卽時阿難廻首右盼하고 又放一光在阿難左하신대 阿難又則廻首左盼이라 佛告阿難汝頭今日에 何因搖動고 阿難言我見如來가 出妙寶光하사 來我左右일새 故左右觀에 頭自搖動이니다 阿難汝盼佛光하야 左右動頭인댄 爲汝動頭가 爲復見動가 世尊我頭自動이언정 而我見性은 尙無有止하니 誰爲搖動이잇고 佛言如是하니라 >
[해설]
부처님의 손에서 빛줄기가 나와서 아란의 왼쪽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비치니 아란이 고개를 빛을 따라서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부처님이 네 머리가 움직였느냐? 네 보는 성품(見)이 움직였느냐, 묻습니다.
눈으로 본다면 머리가 흔들릴 때 눈도 같이 흔들렸으니깐, 見도 흔들렸다고 볼 수가 있겠지만, 위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눈이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이 보는 것이라고 하셨읍니다. 그래서 아란은, 그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리가 움직였을 뿐 자기의 見은 움직이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앞서 여관의 손님을 예를 들어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은 것과, 다음에 부처님이 손을 폈다 쥐어다 하면서 손이 움직였지 아란의 見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과. 이번에 아란의 몸 자체가 움직였지, 아란의 見자체는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엔 거친 것에서 부터 점차 미세한 것으로 세밀하게 예를 들어 단계적으로 자세히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다시 여래께서는 널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중생들은 요동하는 것으로 티끌[塵]을 삼고, 머물지 않는 것으로 손님[客]을 삼아야 한다. 너희들은 아난의 머리가 스스로 요동하였을지언정 보는 성품[見]은 요동이 없었음을 보았으며, 또 나의 손이 ‘펴졌다 쥐어졌다’했을지언정 보는 성품[見]은 ‘펴졌다 쥐어졌다’함이 없었음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그대들은 지금도 요동하는 것으로 자기의 몸을 삼고 요동하는 것으로 경계를 삼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생각에 끌려 다니면서, 진성(眞性)을 유실하고 전도(顚倒)되어 살고 있느냐? 더구나 참 마음[性心]의 진실함을 잃고, 밖의 사물을 오인하여 자기를 삼아 그 가운데 윤회하면서 스스로 고통[流轉]을 취하고 있느냐?”
<於時如來普告大衆하사대 若復衆生以搖動者로 名之爲塵하고 以不住者로 名之爲客하니 汝觀阿難의 頭自動搖언정 見無所動이며 又汝觀我의 手自開合이언정 見無舒卷커늘 云何汝今以動爲身하고 以動爲境하야 從始洎終히 念念生滅遺失眞性하고 顚倒行事하며 性心失眞하고 認物爲已하야 輪迴是中自取流轉고 >
[해설]
중생들은 진심을 버리고 망심을 내 마음으로 믿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주인이라고 하면 움직임이 없어야 하는데, 움직이는 것은 왔다가 가는 손님(客)이요, 티끌 일 뿐 우리의 주인이 아닌데, 움직이는 몸을 우리는 "나"라고 합니다. 이 몸은 생멸(生滅)하고, 죽을 때는 이것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데, 나라고 말하며, 내몸이라고 말합니다. 중생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이 몸입니다. 재물도 몸 다음이고, 온갖 부귀도 몸 다음인데, 그 몸이라는 것이 여관집에 잠깐 왔다가는 손님과 같고, 허공 가운데 흔들리는 먼지와 같은데 내 몸이라고 하고 있으며, 이것을 알아채서, 그 동일시를 속히 벗어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래의 정체성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모르니깐, 누가 시켜서 그렇게 생사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참마음을 모르고 육체를 자기자신이라고 동일시하므로서, 그로 인해서 業을 짓게 되고, 業을 짓기 때문에 생사(生死)에 유전(流轉)하니,우리 스스로가 유전(流轉,윤회)을 취한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중생입장에서 볼 때 몸과 마음, 외부의 모든 대상이 어느 하나라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읍니다. 이 움직이는 모든 것이 전부 客(손님)과 塵(먼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현상과 세상, 심리현상이 모두가 객진(客塵) 번뇌에 해당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면에서 모양없는 주시자만이 홀로 말없이 지켜 볼 뿐입니다. 그 내면의 주시자가 바로 진성(眞性)의 자기입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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