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엄경 공부하기(13)

2014. 11. 28. 13:41성인들 가르침/능엄경

[무한진인의 능엄경 공부하기 13]

 

[본문]

그 때 아난이 여러 대중과 함께 묵연히 무엇을 잃어버린 듯 부처님만 바라보고 있었다.  

<卽時阿難 與諸大衆으로 黙然自失하니라 >

[해설]

지금까지 말한 것이 마음이 아니라 하니, 그렇다고 다른 마음은 모르겠고, 뭘 잃어버린 것 같아서 뭐라고 말을 꺼낼 수도 없고 아뭇소리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본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세간의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이 눈 앞에서 비록 구차제정(九次第定)을 이루고도 번뇌가 없는 아라한이 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생사의 망상을 집착하여 그릇 진실을 삼기 때문이며, 네가 지금 비록 다문(多聞)은 했으나 성과(聖果)를 이루지 못했던 것도 그 까닭이다.”

<佛告阿難世間一切諸修學人 現前雖成九次第定코도 不得漏塵하야 成阿羅漢함은 皆由執此生死妄想하야 誤爲眞實이니 是故汝今雖得多聞이나 不成聖果니라 >

[해설]

구차제정(九次第定)이란 사선(四禪)과 사공처(四空處)와 멸진정(滅盡定)을 말하는데, 사선은 四禪定이며 色界의 四禪天입니다. 사공처는 無色界의 四空을 말하는 것으로 모두 여덟인데 누구든지 범부도 외도도 성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홉째 멸진정은 7식이하가 다 없어진 자리이며 證하면 소승 아라한이 되는 것이니 범부는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루(漏)는 번뇌망상을 말하며 아라한은 小乘 聲聞으로서 더 배울 것이 없는 자리에 이르러 가서 생사를 초월한 자리입니다.

아난은 성문사과 중 초과인 수타원과를 증득했으니, 수타원과는 입류(入流)이니 성인에 들어는 같으나 아라한을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고 했읍니다.(운허스님 강설에서)

3. 아난이 미혹의 원인을 끊는 법을 간청하다.


[본문]

그때 아난이 이 말을 듣고 거듭 슬피 울면서 온 몸을 땅에 던져 장궤합장(長詭合掌)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부처님을 따라 발심하여 출가한 이래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만 믿고 항상 ‘제가 애써 닦지 아니하여도 여래께서 삼매(三昧)를 얻게 해주실 것이다’고 생각했지, 몸과 마음이 본래 서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만 저의 본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비록 몸은 출가하였으나 마음이 아직 도(道)에 들지 못한 것이 마치 헐벗은 아들[窮子]이 아버지를 피하여 도망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卽時阿難已重復悲淚하사 五體投地長跪合掌하고 而白佛言自我從佛發心出家하야 恃佛威神하고 常自思惟호대 無勞我修하야도 將謂如來惠我三昧라하고 不知身心本不相代하고 失我本心이니 雖身出家心不入道호미 譬如窮子捨父逃逝이니다 > 

[해설]

아무리 부처님이라도 몸과 마음을 대신해서 공부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에 보리를 얻으려고 출가했던 본심을 잃어다고 한탄하는 것이죠. 즉 잘못된 것을 이제야 깨닫고 하는 말입니다.

법화경의 비유인데 본성,불성 자리를 아버지에 비유하고, 중생이 六趣를 다니면서 生死속에서 貧窮해 다니는 것을 궁한 아들에 비유했는데, 마치 중생이 부처를 모르고 六趣에 다니면서 중생노릇하는것이 이와 같다는 말입니다.

 

[본문]

금일에야 비로소 비록 다문(多聞)했다 하더라도 만약 수행하지 아니하면 듣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이 마치 어떤 사람이 음식을 말하는 것으로는 마침내 배부를 수 없다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今日乃知雖有多聞하야도 若不修與不聞等호미 如人說食終不能飽하니다 >

[해설]

경(經)을 아무리 잘 안다 하더라도 몸소 수행하여 선정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

세존이시어! 저희들이 지금 두 가지 장애에 얽매이게 된 것은 참으로 고요하고 항상한 심성(心性)을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원하옵니다. 여래께서는 헐벗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묘명(妙明)한 마음을 드러내 저희들의 도안(道眼)을 열어주소서!”

<世尊我等今者 二障所纏 良由不知寂常心性이니 唯願如來哀愍窮露하사 發妙明心하야 開我道眼하소서 >

[해설]

<저희들이>라는 말은 아난과 대중을 말합니다.

<두가지 장애(二障)>은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말하는데, 세밀하게 말하자면 아주 복잡하지만,간단하게 몇가지만 예를 들자면, 아집(我執)은 번뇌장이고, 법집(法執)은 소지장(所知障)입니다.

아집은 색신, 즉 내 몸뚱이를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고, 법집은 '나'는 공했으나 法에 대한 局執을 하여 일체만물이 내 마음 밖에 참으로 있는 줄 아는 그것도 法執의 하나입니다. 또한 약간 어떤 경지를 체험하여 '나'가 空이라는 것까지 얻은 것을 애착해서 성불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자기가 증득한 체험에 애착하는 것도 법집이라고 볼 수가 있읍니다.

번뇌장은 번뇌자체가 障(장애)라는 뜻이며, 我空에 이르러야 하는데 번뇌가 앞을 막는다는 뜻입니다. 번뇌 그자체가 장애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지장은 그것과는 달리 所知가 障이라는  뜻이 아니고, "소지를 장한다"라는 뜻으로, 소지는 法空인데 그 법공의 이치를 알아야 되겠는데, 다른 것이 와서 장애를 한다는 겁니다. 즉 진공의 이치를 알아야 겠는데 法執이 들어서 法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妙明한 마음이란 眞心을 말하는데, 지금까지 진심 자체를 모르고 있었으니 알게 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묘명심은 마음을 말하고, 도안(道眼)는 보는 능력, 즉 見을 말합니다.  

 

4. 부처님이 답변하시다.-십번현견(十番顯見)

 

[본문]

그때 여래께서 가슴의 만자(卍字)로부터 보배광명을 용출하시니 그 광명이 찬란하여 백천의 빛이 있고, 수많은 부처님의 세계에 일시에 두루하여 시방보찰(十方寶刹)의 모든 여래의 정수리에 비추었다가 돌아서 다시 아난과 여러 대중들에게 비추시었다.

<卽時如來 從胸卍字하사 涌出晃昱有百千色이라 十方微塵普佛世界 一時周徧하야 遍灌十方所有寶刹 諸如來頂이라가 旋至阿難及諸大衆하고 >

[해설]

부처님 가슴 한가운데에 저런 卍자 무늬가 있는 모양입니다. 가슴 한 가운데서 광명의 빛을 비추었다는 것이죠.

<아난과 여러 대중들에게 비추었다>는 말은, 부처님의 순수한 의식의 비춤이 아난과 여러 대중들을 하나의 참마음으로 공명시킨다는 표현입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부처님이 견성(見性, 봄,주시자)을 밝히는 법문이 시작됩니다. 즉 妄 속에서 眞을 가려내는 과정입니다. 앞서 맨처음의 칠번파심(七番破心)은 중생이 마음이라고 여기던 것이 실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이는 마치 아들로 여겼던 이가 기실 도적임을 알게 된 것과 같으니 이제 진짜 아들이라 할 참마음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진짜 아들을 한번도 본적이 없고 오히려 무시이래(無始以來)로 도적이 아들인 줄만 알아 왔으니 도데체 진짜 아들을 찾을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지요. 이러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하여 "眞心이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망상이 자기 참마음인 줄 알고 있는 아난에게 그것이 잘못된 생각임을 타파하는 칠번파심(七番破心) 후에 다시 이종근본(二種根本)에 대해서 妄과 眞의 분별법을 명확히 설하신 다음, 이어지는 십번현견(十番顯見)에서 견성(見性)을 들어 참마음(眞心)에 대해 열 번에 걸쳐서 구체적이면서 자세한 설법을 하십니다. 見性이란 바로 의식의 빛이 비추는 주시특성을 말합니다. 의식의 빛이 비추는 주시특성(見)은 그 자체가 참마음에서 직접나오는 것이므로, 見만 올바로 붙들고 있으면 참마음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죠. 마치 태양에서 직접 나오는 햇빛이 태양자체인 것처럼 말입니다.

見性(注視)은 보는 것과 관련한 것이지만 견성(주시자)을 제대로 깨달으면 진심(眞心) 그  자체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 즉 상주진심(常住眞心)인 성정명체(性精明體)는 본래 원만하여 따로이 六識의 구분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見識에서 見을 관하여 본원으로 돌아가면 상주진심으로 통하는 것이므로, 결국 견성(주시자)이 곧 참마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앞으로 10번에 걸쳐서 부처님이 見性(주시자)가 무엇인지를 자세히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큰 법당을 세우고 또한 시방의 일체중생들에게 묘하고 미밀[妙微密]하며 청정하고 밝은 본성의 마음[性淨明心]을 얻게 하여 깨끗한 눈을 이루게 하리라.

<故阿難言하사대 吾今爲汝하야 建大法幢하고 亦今十方一切衆生으로 獲妙微密性淨明心하야 得淸淨眼케호리라 >

[해설]

 <큰 法幢을 세우고>라는 말은, 幢이란 幢竿을 말하는데, 절에 있는 깃대를 말합니다. 절에서 깃대를 세운다는 것은 불법을 편다는 것을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즉 "삿된 것"을 꺽고  "이것이 불법이다"라는 선언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妙하고 微密하며 청정하고 밝은 본성의 마음>은, 妙微密한 性品과 妙淨明한 마음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본문]

아난아! 네가 앞에서 나에게 ‘빛나는 주먹을 보았다’고 대답했으니 그 주먹의 광명이 어떻게 해서 있으며, 어떻게 해서 주먹이 되었으며, 너는 무엇으로 보았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부처님의 몸은 전신이 염부단(閻浮檀)의 금(金)이기에 빛나기가 마치 보배의 산과 같고, 청정 속에서 생긴 것이기에 광명이 있습니다. 그 광명을 저희들은 정말 눈으로 보았으며,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쥐어서 저희들에게 보이셨기에 주먹의 모양이 있게 된 것입니다.”

<阿難汝先答我호대 見光明拳이니 此拳光明因何所有 云何成拳이며 汝將誰見 阿難言由佛全體閻浮檀金이라 赩如寶山淸淨所生일새 故有光明이시니 我實眼觀하며 五輪指端 屈握示人故有拳相이니다 >

[해설]

​부처님이 " 주먹은 어떻게 되었고, 광명은 왜 있으며, 보기는 무얼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염부단이라는 것은 금의 이름입니다. 자금광처럼 아주 좋은 금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몸의 전체가 금산과 같다는 것은 부처님의 몸이 깨달음으로 인해 淸淨으로 소생했기 때문에 금빛이 난다는 것을 묘사한 것이죠.

[본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가 금일에 참으로 너에게 말하노라.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비유를 듣고 알게 될 것이다. 아난아! 예를 들어 나의 주먹은 손이 없으면 이룰 수 없는 것처럼, 너의 눈이 없다면 너의 본다는 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치에서 너의 눈을 나의 주먹에 비교한다면 그 이치가 같겠느냐?”

 아난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어! 만약 눈이 없으면 누구나 볼 수 없으니 저의 눈을 여래의 주먹에다 비교하면 그 이치가 서로 같겠습니다.”

<佛故阿難如來今日實言告汝호리라 諸有智者要以譬喩 而得開悟니라 阿難譬如我拳 若無我手하면 不成我拳이며 若無如眼이면 不成如見이라 以汝眼根으로 例我拳理컨댄 其義均不 阿難言唯然世尊이시여 其無我眼이면 不成我見이니 例如來拳事義相類이니다 >

[해설]

 손이 없으면 주먹을 만들수가 없고, 눈이 없으면 "보는 자(見)"가 없다는 이치가 같다는 것이죠.

 

4-1. 눈이 없어도 봄(見)은 있다.-見이 眞心이다.

 

[본문]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서로 같다고 말하였는데 그 뜻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손이 없으면 주먹은 끝내 만들 수 없으나 눈이 없다고 하여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한 번 저 길에 나아가 맹인들에게 ‘당신들은 무엇을 보느냐?’고 묻는다면 저 맹인들이 하나같이 너에게 ‘우리들은 지금 눈앞에 오직 어두움만 보이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보더라도 눈앞의 대상[前塵]이 스스로 어두울지언정 보는 성품[見]이야 어찌 손상이 있겠느냐?”

<佛故阿難 汝言相類라하나 是義不然이라 何以故如無手人 拳畢境滅어니와 彼諸無眼者非見全無이니 所以者何 汝試於途 詢問盲人호대 汝何所見고하면 彼諸盲人必來答汝호대 我今眼前唯見墨暗하고 更無他矚이리니 以是義觀컨대 前塵自暗이언정 見何虧損이리요 >

[해설]

 눈 없는 사람이라면 장님을 말하는데, 손 없는 사람은 주먹을 만들 수 없지만, "주시자(見)"이 없으면 보지 못한다는 말과는 같지 않으니, 눈이 없어도 본다는 말입니다.

맹인의 대답하는 이치로 본다면 前塵(대상) 자체가 스스로 어둡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보지 못한다는 것은 눈을 가리웠기 때문인데, 그 가리운 것은 암흑, 곧 앞면이 깜깜하니까, 어두운 것 보는 것과 틀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것을 보는 見은 없어지지 않으며, 前塵(대상)자체가 어두운 것이기 때문에 見에는 상관이 없어서 눈이 없어도 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리적인 시각기능(눈)을 넘어선 마음의 눈(見)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본문]

아난이 말하였다. “저 맹인들이 오직 어두운 것만 보는 것을 어떻게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맹인들이 눈이 멀어 오직 어두운 것을 보는 것과 눈이 밝은 사람이 깜깜한 암실에 있는 것과 이 두 가지 어두움이 서로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어! 깜깜한 암실에 있는 사람이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나 이 두 가지 어두움을 비교했을 때 조금도 다름이 없겠습니다.”

<阿難言諸盲眼前 唯覩黑暗커니 云何成見이리요 佛告阿難 諸盲無眼하야 唯觀黑暗 與有眼人 處於暗室 二黑有別 爲無有別 如是世尊이시여 此暗中人與彼群盲 二黑校量컨대 曾無有異니이다 >

[해설]

​아난이 "밝은 데서 여러가지를  볼 수 있어야지, 캄캄한 것만을 보는 것을 뭘 본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니깐, 부처님이 "눈 있는 사람이  암실에서 캄캄한 것만 보는 것이나, 맹인의 캄캄한 것을 보는 것이나, 같은지 다른 것인지" 되 묻습니다.

그러니깐 아닌이 눈뜬 사람이 암실에서 캄캄한 것을 보는 거나, 눈먼 사람이 캄캄한 것을 보는 것나 마찬가지라고 대답합니다. 캄캄한 것을 보는 것도 보는 것은 보는 것이니깐, 눈만 가지고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본문]

“아난아! 만약 눈이 어두운 맹인이 눈앞에 어두움만 보다가 어느 날 홀연히 눈을 뜨게 되어 눈앞에 가지가지 모양을 보게 되었을 때 이를 눈이 본다고 고집한다면 저 깜깜한 암실에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다가 홀연히 등불이 들어와 눈앞에 모든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이를 등불이 본다고 해야 할 것이다.

<阿難若無眼人 全見前黑이라가 忽得眼光하면 還於前塵 見種種色 名眼見者인댄 彼暗中人全見前黑이라가 忽獲燈光하면 亦於前塵 見種種色應名燈見이니라 >

[해설]

​하나는 눈의 밝음(眼光)이고 하나는 등불의 밝음(燈光)이니, 같습니다. 이 말은 눈의 밝음(眼光) 때문에 여러가지 색을 보는 것을 눈이 본다고 하면, 등불의 밝음(燈光) 때문에 여러가지 색을 보는 것도 등이 본다고 해야하니, 등불이 보는것이 아닌 것처럼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만약 등불이 보는 것이라면 등불이 이미 보는 성품이 있으니 보여 지는 등불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또 등불이 보는데 너하고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등불은 능히 모습[色]을 볼 수 있게 할지언정 이와 같이 보는 성품은 마음이지 눈이 아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若燈見者인댄 燈能有見이라 自不名燈이며 又則燈觀이니 何關汝事리오 是故當知이라 燈能顯色이언정 如是見者 是眼非燈이며 眼能顯色이언정 如是見性是心非眼이니라 >

 [해설]

암실에 있던 사람이 불을 켜서, 여러가지 보는 것을 등불이 본다고 하면 등불은 무정(無情)인데도 능히 보는 작용이 있겠다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이름을 등불, 즉 無情(무생물)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이지, 어찌 무생물이 볼 수가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또 등불이 본다고 하면, 등이 붉은지, 검은지, 책상인지 등등을 알아야 하는 것이고, 대신 너는 몰라야 할 것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등불은 빛을 비추는 작용을 하여 여러가지 모양을 나투어줄 뿐이라 했으니, 보는 것은 눈이라 했으니, 지금 이 경우는 눈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이와같이 보는 성품은 마음이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맹인이 본다고 하는 것이나 눈이 있는 사람이 본다고 하는 것이나, 본다고 하는 것은 눈이 있든 없든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니깐 상주불멸(常住不滅)이라는 뜻으로 듣는 것도 귀가 있으나 없으나 들으며, 코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육감각기관이 여러기지 前塵(대상)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왔다갔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눈이든 귀든 있든 없든 상관없이 작용하고 있으니깐, 눈의 보는 성품, 귀의 듣는 성품,이게 참마음이라는 뜻으로 애기하는 것입니다.

요즘 정신적 용어로 모양없는 주시자(注視者)가 항상 말없이 깨어서 지켜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참고적으로 안식등 5근의 識을 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전오식은 있고 없고만 알지, 앞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뒤의 6식인데, 이 육식이 바로 분별식입니다. 또 이 분별식에 의하여 그 뒤의 7식이 '나'라는 자아의식을 형성합니다. 그런데 8식은 대체적인 것만 알지 분별은 못합니다. 이 8식에 진아의식도 같이 있는데, 전오식과 8식은 같은 몸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별작용을 하는 6식(사고분별작용,기억등)을 빼고, 5식과 8식만 활용하는 수행을 하면 분별하는 생멸식(六識)이 없으므로 眞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근원통 수행법의 원리가 5식과 8식만을 활용하는 수행법입니다. 염불이나 다리니수행을 할때에 그 글자 의미를 생각하지 말고(6식작용을 억제) 음 자체만을 외라는 것이 이런 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의미하게 아무 뜻도 모르는 이상한 주문만 허구헌날 중얼거리고만 있으면 무슨 도를 얻겠느냐고 빈정되기도 하지만,이렇게 전오식과 8식이 체(體)가 같다는 문제는 불교와 흰두교 수행체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숨은(밀교) 수행원리입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도 자주 언급할 기회가  많을 겁니다.

                                                                      -무한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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